찬바람 불면 ‘개미와 베짱이’ 생각난다. 콧물이 나오듯 자연스레, 따뜻한 방안에서 웃고 있는 개미 가족과 창밖에서 떨고 있는 베짱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누구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이 우화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고작해야 싸구려 전기장판 속에서 “5분만 더~”를 외치는 것이 우리네 겨울 풍경일지어니.
몇 해 전, 소설가 김영하도 칼럼을 통해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스크린쿼터를 지키려는 영화인들을 베짱이로, “예술이 밥이냐 돈이냐?”를 외치는 생활인들을 개미로 놓고 베짱이의 편에서 예술을 옹호한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주장이지만, 그런 비유는 조금 위험해 보인다. 우리는 개미도, 베짱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일하는 우리는 베짱이보다 행복하고 개미보다 불행한 셈이다)
‘개미와 베짱이’의 결말을 생각해 보자. 낡은 외투를 입고 먹이를 구걸하는 베짱이와 그를 외면하는 개미. 결국 베짱이는 작은 바이올린을 안은 채 숨을 거두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위반한 개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따뜻한 겨울을 만끽할 뿐이다. 여느 동화처럼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게으른 자(루저 혹은 잉여)는 죽는 게 당연하다고, ‘쉬크한 듯 무심하게’ 말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 베짱이를 가리켜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2009 스프링 메이크업 룩은 ‘핑크 라이트 컬렉션’이다” 같은 느낌으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 칭한다. 이때 베짱이는 법적인 ‘예외상태’에 놓인 존재에 다름 아니다. 죽이는 일이 권장되진 않지만 죽여도 무방한 존재,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 ‘프런’처럼 잉여로 취급되는 ‘벌거벗은 존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조지 레이코프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우화의 비유를 통해 게으른 베짱이는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부인할 수도 있다. “나라면 베짱이를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테야!”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다음 질문. “만약 내가 베짱이가 된다면? 그때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끝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중 누군가는 개미가 되고 나머지는 베짱이가 된다는 것. 비참하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 행여 베짱이가 된다면, 우리를 죽이는 것은 다름 아닌 개미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 매고(완벽한 ‘S자’를 그리는 개미허리처럼!) 자식들을 ‘국제중’, ‘자사고’, ‘명문대’에 보내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우리를 개미와 베짱이로 나누는 것일까? 개미나 베짱이가 아닌, ‘인간’으로 사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지금, 학계에선 ‘지미 추’ 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아감벤이 그의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쉽게 답할 수 없는, 그러나 눈감을 수 없는 질문이 여기에 있다.
- 무비위크 405호
엄살과 무리한 개념화로 가득찬 이 글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닭살이 돋는다. 개미허리가 정말 완벽한 'S자'를 그렸던가? 그냥 8자 아닌가…. 아감벤을 '지미 추'에 비유한 것은 모르는 사람 자꾸 얘기한다고 욕먹을 일이 두려워서다. 나는 '지미 추'를 모르지만 그냥 귀동냥으로 명품 구두를 만든다는 것 정도만 알고 넘어 가듯이, 그렇게 슬쩍 물을 타보려 했단 말이다. (아감벤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겨울, 따뜻한 방안에서 벽난로를 쬐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일종의 과거애착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베짱이의 인생을 살고 싶어 했고, 자아 분열은 그렇게 시작된다…. 베짱이를 받아 들일 거냐는 질문은 그래서 우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베짱이조차 방치해 온 것이다.
언어의 힘은 아주 세서, 우리는 마치 개미 아니면 베짱이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유치원에서 그렇게 가르쳐주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간단하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되어 가끔 베짱이를 도와주면 되지 않겠는가. 베짱이로 살기는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으니까.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한다. "선줄로 아는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개미도 베짱이도 아니다. 인생은 O, X 퀴즈가 아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은 '열폭'에 다름 아니다. 더 많이 가진 개미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베짱이 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짜증인 것이다. 요즘 남자들은 다 애송이라고 렉시가 그랬던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이렇게 노래한 건 조용필이었겠지. 귀뚜라미나 베짱이나, 솔직히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