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될까? 스무 살 무렵의 내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아마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시간이 햇빛처럼 공짜였던 시절. 외국의 펑크 밴드들은 서른 넘은 어른은 믿지 말라며 악을 써댔고, 나는 노래에 맞춰 머리를 흔들곤 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머리는 가벼웠으니까. 유일한 문제라면 서른 넘은 어른 따위는 내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 정도? 조금 실망한 나는, 대신 스물다섯 넘은 복학생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학교 앞 술집들을 전전하던 밤, 짤랑대는 잔돈을 추렴해 술을 사들고 학교에 오르면 먹다 남은 중국집 접시와 파란 소주병을 앞에 둔 복학생 형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 때 자르지 않아 뻗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의 그들은 철학과 선배들이었다. 말장난을 좋아했던 선배들은 우리를 반겨 맞으며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곤 했다. 인생은 뭐라고 생각해? 너는 왜 사니?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인생은 무슨 소용일까? 하는 물음에 글쎄요, 뭐 그냥 사는 거죠, 어차피 밥 먹으면 다 똥 되는데 그래도 먹잖아요? 하는 심드렁한 대답이 이어졌고.

  지리한 문답 끝에는 대개 선배들의 인생 설교가 이어졌다. 저 마다의 개똥철학엔 유행처럼 냉소가 녹아들어 있었다. 설교 다음 순서는 바로 노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계천 팔가’니 ‘전화카드 한 장’이니 하는 노래들을 흥얼거리기 시작하지만, 선곡의 마지막은 언제나 김광석이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자니 이미 제대한지 오래고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자니 아직 파릇파릇했던 형님들이지만 다행히 김광석은 히트곡이 많았던 것이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그 새벽에, 떠나간 내 사랑은 ‘으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물었다. 그 사랑의 행방을 알 리 없는 순진한 새내기는 그저 뻐금뻐금, 담배 연기나 보탤 수밖에.

  그럴 때면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새벽, 내 볼에 까칠한 수염을 비비던 아버지의 시큼한 냄새가. 그런 새벽엔 선배도 아버지도 모두 우습고 또 쓸쓸해보였다.

  선배들이 권해주던 책들이 생각난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요수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신입생의 눈높이에 맞춘 것인지는 몰라도 수준 높은 추천은 아니었던 셈이다. 유행하는 소설 혹은 고등학교 필독서. 그럼에도 내 독서편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은 있었으니, 철학사나 한 번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물어오는 내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뭐, 렘프레히트도 괜찮고, 윌 듀란트도 괜찮고 네가 맘에 드는 거 아무거나 봐. 러셀 철학사만 빼고.” 왜냐고 묻는 내게 선배가 대답했다. “완전 제 멋대로 쓴 소설이거든.”
 
  러셀을 읽든 읽지 않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서른 넘은 어른을 믿지 말라던 펑크 밴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었고, 한 달 후면 나 역시 서른이 된다. 시간은 더 이상 공짜가 아니고 시끄러운 음악을 듣지 않는 내 머리는 무거워진지 오래다. 그 시절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인터넷 서점 MD라는 것으로 먹이를 벌며, 서른 살이 넘건 넘지 않건 믿을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서른 살 이후에도 삶은 계속될까? 누군가 지금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마 한숨부터 쉴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삶이라 부를 수 있는지,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우습게도 이런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은 러셀의 책이다. 냉소 반, 호기심 반으로 마침내 집어 든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은 깐깐한 노인네의 말투로 지극히 상식적이며 건강한 삶에 대한 믿음을 피력한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 역시 서른 살이 되면 인생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쉰여덟이 된 지금은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문득, 지금껏 한 번도 그 선배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므헌지가 되어 당신 곁으로’ 가고 싶다던 그들은 서른을 무사히 넘겼을까?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새로이 완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직도 말장난을 좋아하고 술자리의 끝엔 노래를 부를까? 그렇다면 나는, 서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린 친구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알 도리 없는 나는 그저 뻐금뻐금, 담배 연기나 내뿜을 수밖에.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12





"이제 입학식까지는 열 세 시간이 남았어"



짧은 금발, 하얀 피부 가득한 주근깨가 영락없는 개구쟁이 꼬마 가르만은 겁이 난다. 내일이면 학교에 가야하지만, 아직 글도 쓸 줄 모르고 다른 아이들처럼 이가 빠지지도 않았고 자전거 타기나 물속에 머리 넣기도 못하는 가르만은 그래서 궁금하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까?

주름진 얼굴에 틀니를 한, 커다란 가슴이 부드러운 할머니들에게. 순회공연을 떠나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빠에게. 예쁜 정원을 가꾸고 가르만의 도시락과 셔츠 단추를 챙겨주는 엄마에게, 가르만은 묻는다. 할머니는 아빠는 엄마는, 그러니까 어른은 "겁나는 게 있나요?"

저마다의 대답 속에서 가르만의 여름은 어느덧 끝나 간다. 작은 참새가 백 마리도 넘게 살고 있는 뜰 가장자리와 울타리 사이의 비밀 공간에서 죽어 있는 참새를 땅에 묻으며 가르만은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을 지나 하늘나라로 떠나겠지. 하지만 우선 지렁이가 사는 땅에 묻혀 흙이 되어야 해'

여름의 마지막 저녁, 필통을 정리하고 책가방을 정리하는 가르만. 마음도 키도 한 뼘쯤 자란 가르만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올해 첫 낙엽을 바라보는 가르만은, 혹시 빠질 것 같은 이가 있는지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가르만은, 여전히 겁이 난다. 여섯 번째 여름은 너무도 빨리 갔고, 이제 입학식까지는 열 세 시간이 남았으니까.

두려움도 결국 삶의 일부분임을 에둘러 말하는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가방을 다 싼 후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선 가르만의 뒷모습이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여섯 살 꼬마이지만 삶과 죽음, 두려움과 성장을 짊어진 한 사람으로서 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좋은 책이 늘 그렇듯, 작은 가르만의 이야기 역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린이가 읽을 책을 고르는 어른들에게 책을 권해주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한 사람의 직업인인 나를.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이 어른들의 눈에 걸러져 정작 아이들에게는 가닿지 못할까 두려워 종종 위축되는 나를.

그래서 꼬마 가르만의 앙상한 어깨의 떨림이, 그 작은 속삭임이 따뜻하다. 할머니도 아빠도 엄마도 가르만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펄렁거리는 나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금정연(2007-10-09)

이제 서른 까지 9시간이 채 남지 않았고,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 글을 올리고 담배를 피러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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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2-3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냅니다. 선생님, 부모님,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들을 따라하고 지내죠. 자꾸 비춰보고.
20대 때에는 유리처럼 지냅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빛을 반사하듯 튕겨내기도 하고, 맘에 들면 때론 흡수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부딪히다 깨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그렇게 여기 저기 치이고 깨어지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힘들고 지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곤하고. 깨지지 않고 조금씩 편하게 지내는 것. 그러다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
광석형님 라이브 콘서트 앨범 중에서 「서른 즈음에」끝나고 나오는 말 중에서 생각나는대로 복기해봤습니다. 「이등병의 편지」가 군대 시절보다 제대한 후에 더 절실하게 들렸듯이, 아마 광석형님의 노래도 마흔이 되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전 요즘 김훈 작가님의 이 말이 계속 맴돌더군요. "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서른 축하드립니다. ^.^

활자유랑자 2010-01-04 04:51   좋아요 0 | URL
너무 호들갑 떨어서 민망한 서른 살의 아침이에요.
30대 때에는 무엇처럼 지내는 건지 궁금해요. 깨지지 않고 조금씩 편하게 지내는 것?
그렇다면 종이처럼 지내는 걸까요. 다만 그 내용에 책임을 져야하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기인 2009-12-3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동갑이시네요 ^^; 글 잘 읽고 있습니다.
ㅋ 이제 6시간 쪼금 더 남았습니다.

활자유랑자 2010-01-04 04:57   좋아요 0 | URL
이제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건가요? 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k 2009-12-3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른 이후의 삶이란 '더이상 김훈과 지젝을 모순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서른을 사십분 남겨놓고서.

활자유랑자 2010-01-04 05:18   좋아요 0 | URL
갑자기 인생이라는 것의 무게가 실감 나는 이유는 뭘까요? >_<

어떤하루 2010-01-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여름, 홍대에서 08학번 후배와 술을 마시던 날이 생각납니다.
"언니, 내가 서른 살의 직장인과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웁스..
그 친구는 저보다 꼭 열 살이 어렸습니다 ㅋㅋ
올해는 09학번을 불러다 단둘이 술을 마셔야겠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머라 말할까요? 후훗.

어떤 선배가 되어야하는 것일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고민스러운 문젭니다.. ㅋ

활자유랑자 2010-01-12 11:26   좋아요 0 | URL
세상에, 08학번 아는 후배가 있다는 게 신기해요!
제가 학교 다닐때도 최고 높은 선배는 93학번이었거든요.

가끔씩은 후배들이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죠.
"그때 형이 이래서 내가 이렇게 된거야" 뭐 이런.
저는 이렇게 얘기해요. "웃기시네"

다락방 2010-01-1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인문MD님! 그러니까 이제 '겨우' 서른살이시군요!! 오호~

활자유랑자 2010-01-18 00:2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희 본부장님은 "너 지금와서 *** 하기에는 너무 늙었어"라고 하시던데요. 힁

삶은계란 2010-01-2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아홉도 버거운데 서른이라니...) 서른이 조금 덜 막막하려면 스물아홉엔 무엇을 해야하나요?

활자유랑자 2010-01-26 14:43   좋아요 0 | URL
노는 게 남는 거란 말이 있다죠.
다른 건 모르겠고 왜 안놀았나는 생각만 가득하다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