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신나게 윷을 놀았어요. 정월 대보름 세시풍속을 하루 앞당겨 쇤거예요. 윷놀이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허리를 틀며 방바닥을 기다가 두드리다가 꺽꺽 숨이 넘어가고 배꼽 빠지게 얼마나 웃어제꼈는지, 오곡밥에 고사리, 도라지, 부지깽이, 취, 시금치, 다래순, 고구마줄기, 도토라지, 콩나물, 가지, 호박, 버섯 등 무려 열 네 가지나 되는 말린 나물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무척이나 많지만 새로 자고 난 아침까지도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이 있었어요.
'모야! 걸이야!'
찰지게 외치며 윷판을 벌이는가 하면 한 쪽 머리에선 밥상을 차리느라 분주했어요.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으니 먹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윷 놀 집을 내놓으신 댁에서 음식 장만해 놓으셔서 밥상만 차리는데도 솔찮이 바빴어요. 워낙에 먹일 입도 많고 먹을 나물 가짓수도 많으니까요.
손끝 야무진 안주인 음식 솜씨에 탄복하며 볼이 미어터지게 밥을 다 먹어 갈 즈음 바깥주인께서 과일 접시를 상마다 내놓으시는거예요.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 아니 특별한 손님에게 서빙한다는 중후한 총지배인같이 멋있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말예요. 대보름달같은 큰 접시 맨 가생이에 사과를 뺑 돌린 후, 감과 딸기를 가운데 소복하게 쌓았더군요. 푸짐하고 싱그럽고 달콤한 과일 접시였어요. 상을 차리던 몇몇은 놀랐지요. 언제 저렇게 준비하셨을까 우리는 과일은 구경도 못했는데 말예요.
화장실에 가다가 제가 모르고 서재 문을 열었어요. 방 한 가운데 교자상이 펴져 있고 과일이며 껍질 나부랭이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죠. 치우려다 보니까 실패작 사과 토끼들이 보였어요. 저절로 웃음이 났어요. 밖에선 멋지게 서빙하던 웨이터가 이 방에선 어설픈 솜씨로 과일을 깎으신 것이죠. 한창 윷놀 때 바깥 주인장께서 어쩐지 안 보이신다 싶더니..... 저는 평소에 이 분을 어려워 했어요. 예순을 넘기신 노신사신데 저랑 연배가 맞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과묵하고 중후해서 무섭게 보이거든요. 항상 머릿기름 바르고 단정히 정장 입으신 모습에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같은 것이 느껴져요. 그런 분이 이 썰렁한 방에 앉아(서재엔 불을 넣지 않았더라구요) 사과로 토끼를 만드느라 여간 애를 쓰신 게 아니구나, 크핫~, 한 쪽 귀가 짤려 나간 사과 토끼를 집어 먹으며 혼자 웃었어요. 살점이 그대로 다붙은 두툼한 감 껍질은 또 어쩔거야? 큭큭. 혼자서 딸기는 또 어디서 씻으셨을까요? 주방은 우리가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물 다듬고 준비하는데 일거리 많으셨죠?"
하면서 안주인께 인사하니까 바깥주인께서 마늘이며 도라지를 까주셨대요. 근엄하신 주인장께서 도라지를 다듬다니 다들 믿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는 고개를 주억거렸죠. 그 뿐인가요? 주방 정리도 다 끝나고 모두가 윷놀이 삼매경에 빠져 울부짖을 때 그 분만 홀로 안 보이시더니 부엌 뒷쪽 베란다 항아리 앞에 쪼그려 앉아 계시는 거예요. 뭐하시나 등 너머 까치발 들고 보니 음료수 병에 깔대기 꽂고 오미자와 복분자 잘 익은 것을 조신하게 국자로 퍼서 따르고 계시더라구요.
가부장제를 엄격하게 지키시던 우리 아버지께서도 눈물 나는 파와 양파는 반드시 까주셨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올라와 목젖이 아릿해졌어요. '엄격하다, 무섭다, 근엄하다, 강하다' 따위의 이미지에 가려 있던 다정하고도 때로는 쓸쓸한 아버지의 마음을 말년에야 알았던 것이 안타깝네요. 병원에 계시던 일년 사 개월 동안 저는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지요.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과 회심한 후 뜨거운 감사의 눈물. 입원하시기 전에 왜 저는 아버지의 약하고 다정하고 눈물 많으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왜, 내 아버지는 항상 당당하고 강하게 그 자리에 계서야 한다고 믿었을까요. 여섯 딸이 각각 저마다 효도를 하는데 넷째 딸 저더러 '사려가 깊고 마음이 어질어'부모 마음 헤아려 주는 효도를 잘 한다고 하셨는데도 말예요......
손님들이 유쾌하게 윷놀이 할 때 혼자 방에 들어와 몇 시간(정말 시간 많이 걸렸을지도 몰라요. 그 서툰 솜씨에 그렇게 많이 깍아내자면) 감 씨앗을 발라내고 딸기 꼭지를 따며 사과 토끼와 씨름했을 그 분 모습을 상상하니 전에 없던 정겨움이 솟아나요. 20120206ㅇㅂㅊ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