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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정갈한 하얀 표지의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을 가슴에 안았을 때 내 습관 하나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길 떠날 때는 결벽증이다싶을 만큼 집을 깨끗이 치우는 버릇이 내게 있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날 중에 더러 아침 설거지를 낮까지 미루고 식구들이 훌훌 벗어던진 허물들이 먼지를 덮어쓰고 앉았어도 손가락 까딱 않는 걸 보면 그닥 깔끔스런 사람도 아니건만 가벼운 외출 담장 밖 은행이라도 다녀올라치면 얼마나 부산스럽게 소제를 해대는지. 그래서 여름휴가나 명절을 쇠러 사나흘 집 비울 때는 몇 날 며칠을 이사가는 집 마냥 정리하고 버리고 쓸어내고 닦아내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새파랗게 젊은 것이 어린 아들들을 앞에 놓고 미리 미리부터, 나 죽고 나면 화장해서 아무 나무 밑에나 묻든지 해달라고, 웃기지도 않는 이런 유언도 해쌌다. 나는 나의 흔적 남기는 것이 싫은 것이다. 부디 내가 없는 자리는 내 머리털 한 올 남기지 않고 깨끗하고 말끔하면 가장 좋겠다 싶었던 게다.
내가 생각하는 박경리 선생님의 이미지는 단아하고 정결하다 못해 차가울만큼 빈틈 없으신 분이시다. 박달나무처럼 야물고 헛점 하나 없으신. 이런 분은 자신이 가시고 난 다음엔 정말이지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완벽하게 정리해 놓고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이렇게 자손이 엮어서 한 권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시를 남기는 배려를 하셨다. 39편의 남겨진 시가 없었더라면 선생님을 잃은 우리들 가슴은 얼마나 허허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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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中
마지막 남긴 시는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웠다.
함축성 있는 언어로 정제되고 정제되어 문외한들은 알아먹기도 힘든 결정체만 남은 그런 시어는 아니었다. 행갈이 없이 그냥 죽 이어놓으면 단아한 수필같은 느낌, 아니 '일기'같은 느낌의 시였다. 하루의 단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그런 일기 같았다. 세인들에게 특별히 잘 보일 일도 없고 체면치레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솔직 담백하게 삶을 되돌아보시며 할머니,외할머니, 어머니...등의 피붙이 가족을 떠올리는 선생님 모습은 내게는 이미 낯익다. 예전에 우리 할매가 돌아가시 전에 그랬고 지금도 우리 엄마가 그러신다. 존경하면서도 맘대로 까불기 어려운 무서운 선생님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호흡을 담은 시를 음미할 때는 다 컸어도 부끄럼 모르고 쭈그러진 울 할매 젖가슴을 조물딱거리는 것 같았다. 친근하고 따뜻하다. 기발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내지도 않으시고 그저 늘상 듣던 범상하던 말들로도 가슴 울렸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 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 中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이다
/비밀中
제자들과 나란히 서 계시는 풍경이 떠올랐다
엄하면서도 제자들과 사람들을 아끼시는 선생님이 살아생전의 행적이 눈에 그려지는 시도 있었다. 말수가 많지 않으셨던 선생님이시니 사람 면전에서 칭찬 일색이거나 왁자하게 밝히진 않으시고 조용히 말끄럼히 쳐다보시며 눈으로만 이쁘다고 하셨을 그런 모습이다. 예전에 '어린 학생들이 토지를 읽어주기를 너무나 희망한다'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람도 열 달이면 태어나는 걸, 25년의 길고 긴 인고의 작업으로 토지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도 역사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주기 위함이었다. 소설을 쓰고 시를 쓰며 문학을 한다는 것은 후배와 제자들, 후학들까지 아끼고 보듬는 작업임을 느낀다. 선생님의 사랑을 지척에서 받은 젊은 후배(혹은 제자)들은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팔순 선생님의 말씀에 돌아가는 길엔 기어이 눈물 맺히는 것이다. 그 길의 고단함을 알기에.
<일 잘 하는 사내>와 <히말라야의 노새>가 39편의 시 중에 나는 가장 좋았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하략)
/일 잘하는 사내中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히말라야의 노새 全文
2009.1.ㅂㅊ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