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관에 가야겠다. 오랜만에. 점심은 도서관 매점의 쫄깃한 라면으로 때워야지. 루이보스 티를 우려서 보온병에 담고 새로 산 두툼한 레깅스에 털 안 빠지는 아크릴 니트를 입고 구두굽 소리가 적게 나는 부츠를 신어야지. 이게 얼마만의 도서관 여행인가!
아뿔싸. 오늘은 월요일이다. 도서관 휴관일.
문제는,,, 지난주 월요일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거다.
월요일만 되면 도서관에 가고 싶다. 닫힌 도서관의 문을 거침없이 열고 밀린 문학잡지들과 오늘의 신문을 보면서 야금야금 활자들을 잡아먹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는데. 쩝.
2. 이십년지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중고 동창생. 초등학교때는, 아니 국민학교때는 얼굴만 알던 동네 친구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걔가 걔라는 사실만 알았을뿐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지는 알면서도 모른척 지내던 친구였다. 같은 반, 앞 뒷자리에 앉자마자 그간의 모른체를 만회라도 하는 듯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친구는 늘 공부 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고 나는 친구를 따라 독서실을 따라가곤 했다. 친구는 모 투자신탁 차장. 나는 나.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의 자리를 부러워하고 이 몸으로 죽을때까지 살아야 하니 건강하게 돌보자는 다짐으로 한 시간의 긴 통화를 마쳤다. 친구도, 나도 늙어가고 있다.
3. 영화 & 영화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 & 어웨이 프럼 허. 두 영화는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집스러운 남편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아내가 다른 도시에 사는 삼남매 집에 방문하는 것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이미 자기 가정이 있고 자기 방식의 생활 패턴을 갖고 있는 자식들은 부모를 짐으로 생각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자식들은 살아있는 부모에게 냉담한가. 문득 손가락을 깨물고 싶어졌다. 아내는 일본의 그림자 춤 부토 무용수였으나 남편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그 춤을 꿈꾸었고 사랑하는 막내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 일본에 갈 날만을 기다린다. 그녀는 문득 세상을 떠나게 되고 혼자 남은 남편은 일본으로 떠난다. 아내가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일본에서 부토 춤을 추는 18세 일본 소녀를 만난다. 부토 춤을 추는 덩치 큰 늙은 사내의 행보는 지금 부터다.
어웨이 프럼 허, 의 감동은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단연코 첫번째다. 영화를 본 날이 여름, 어스름한 주말 오후였던 것을 기억한다. 치매에 걸린 아내, 아내는 치매라는 세상에서 다른 환자를 돌보고 사랑에 빠진 듯 보인다. 그걸 지켜봐야 하는 남편의 마음은 사랑을 잃은 자의 표정과 같다. 그러니까 치매는 우리와 조금 다른, 어떤 세상이다. 요양원에 모셔야 하고, 자식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치매와는 다른,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될 세상이다. 사랑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세상이 치매다.
지난 여름, 언니 가족과 춘장대 해수욕장에 다녀왔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갑작스레 폭우가 친 날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유소는 정전이 되어 카드 단말기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날밤, 심심한 가족들에게 중앙역, 을 보게 하였다. 14살, 18살이 끼어있어서 영화를 고르는게 쉽지 않았다. 이미 여러번 본 영화였으므로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영화 끄트머리에 눈을 떴을 때 언니 가족은 지쳐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이 영화가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과 아집에 지쳐 보이는 도라는 조슈에라는 소년을 만나고 소년의 불행에 본의아니게 뛰어들게 되고, 소년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함께 모험한다. 결말은 짐작 가능하다. 소년과 나이든 여자의 만남은 가족 만들기의 전형이다.
이스라엘 영화 누들, 은 독일 영화보다 좀 더 거칠다. 히브리어의 투박함이 독일어를 외려 부드러운 언어로 보여주는데 인물들 사이의 대화나 표정, 제스처들이 쎄다. 이 영화는 모두 날이 선 상태의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쩌다 떠맡게 된 중국인 꼬마의 집찾기, 엄마 찾기가 시작된다. 중앙역의 도라처럼 누들의 미리도 고집과 아집, 상처로 범벅된 인물이다. 화해라는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중국인 꼬마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엄마를 찾을 것 같은 실낱같은 희망을 보게 되었을 때 중국인 꼬마 누들은 미리와 미리의 가족들에게 젓가락 사용법을 호기롭게 가르친다. 엄마라는 배경은 그렇게 힘이 세다. 가족이란 배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포뇨와 렛미인의 유사점은 없는듯 보이지만, 3초만 더 생각하면 금세 알 수 있다. 아기 물고기와 뱀파이어. 그들과 사랑에 빠진 소년들. 물고기는 변신하여 소년의 세계로 들어간다. 뱀파이어는 소년과 함께 열차를 타고 칙칙폭폭 미래로 나아간다. 어쨌든 해피엔딩. 포뇨는 목소리가 너무 귀엽다. 포뇨가 몸 담았던 초록색 양동이도 너무 귀엽다. 물에 빠진 세상은 생각보다 살 만하다. 모험과 호기심이 산소라도 되는건지 마냥 신나는 아이들. 그런데 언제부터 일본 아이들도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엄마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일까. 소스케가 엄마를 찾으며 엄마의 이름, 리사를 부르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약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뱀파이어에게 나를 아주 세차게 차버리던지 아니면 나를 얼른 뱀파이어로 만들어 같은 종족의 선상에 서게 하던지 하라고 채근할 것이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징징거림일지도 모른다. 감동한 부분은 그 노인이다. 뱀파이어에게 마지막 피까지 헌사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 노인. 마지막 내 남은 핏방울로 너를 살게 한 사랑이란, 두렵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상대의 악조건 혹은 불편한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 참 어렵다. 순수한 사랑은 더더욱 어렵다. 그런 나이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나는 그런 사랑에 빠질까봐 두려워했다는 걸,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수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