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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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비열함을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비루함을 그려내어 역사를 보는 눈에 충격을 주었다. 나라의 큰 난리 속에서 문필로 지도자들의 빛과 그림자를 들추어내었다.

신작 <공터에서>는 대상을 현대로 끌어당긴다.

현대라는 공간은 논란이 많다. 그래서 작가가 이 공간을 어떻게 다루어낼지 궁금했다.

최근 가장 큰 공터는 광화문 광장이었다. 탄핵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내려는 강력한 의지가 드높았는데, 그 반대편에는 태극기를 들고 모인 노인들이 있었다.

흘러가려는 힘과 떠밀려가지 않으려는 발더둥. 두 힘의 격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갈등이라고 해야 할까? 그 힘의 근저에는 세대 갈등이 있었다.

혹자는 이 두 세력을 영화에 빗대어 <국제시장><변호인>의 충돌이라고 이름했다.

영화로 표상되는 세대 간의 가진 기억들이 서로 다르고 기억 위에 부과된 의미도 다르기에 벽이 생긴다. 현실에 생긴 충돌방지용 차로 만든 벽 만큼이나 기억의 벽은 높아서 넘기 어렵다.

세대, 간단히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늘 존재한다. 사춘기는 그 한 표현이다.

이런 세대갈등을 가장 격렬히 체화한 존재가 바로 작가 김훈이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이런 꼴로 살고 싶지 않다고 굳게 맹세했다고 한다.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밥벌이를 위해 한국일보에 입사 지원을 했을 때 부친의 문명(글 명성)을 익히 알던 오너는 그에게 부친에 대해 질문했었다고 한다. 그때 김훈은 내가 그 보다 못할리 없다고 당차게 (내가 들은 바에서 상당히 순화해서 묘사한 형태임) 말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또 다른 책, 수필집인 <라면을 끓이며>에 간간히 나온다. 밥이 뚝 떨어지는 삶, 그 삶에 대해서 가장이라는 존재가 보여준 무책임에 대해 신랄하기도 하고 냉소적이기도 하고 안쓰러운 동정도 보이는 미묘한 마음가짐이 보인다.

이 책은 그런 가족사를 중심에 놓는다. 두 핵심 주인공 마차세는 김훈이고, 마동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김훈과 아버지 김광주는 문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렇지만 아들 김훈은 글이란 현실을 다 담지 못하기에 늘 말이 허무하다고 강조한다.

소설 속의 마차세와 마동수는 시대의 중심으로 살지 못한다. 식민지 백성 거기서 벗어나려고 독립운동이라고 해보았지만 그 실체는 매우 왜소했다. 말이 거창하게 뻗으면 김훈은 늘 말의 실체를 파고 들었다. 이는 작가 김훈의 여러 번의 필화에 잘 나온다. 이 작품에서도 말을 뻗어내는 운동가의 실체를 드러내서 그 허무함을 보여준다. 대단한 듯 보였던 독립운동도 막상 실제 독립이 되어서는 작은 응징하나 못하고 감방에 갇혀야 하는 전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우스운 것은 그 운동 속에서도 주인공 마동수는 주변으로 매우 왜소했었다.

김훈에게 삶이 말이냐 밥이냐고 물으면 항상 밥을 먼저 내세운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그려진 짠한 세상인 함흥탈출과 부산피난이 있다. 그 시절은 가난했고 생존은 모든 가치에 우선했다.

 

오장춘은 교실 창문에서 유리를 떼어 내고 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철근을 훔쳤고 교실의 양은 주전자를 납작하게 찌그려뜨려서 가방에 담고 나와서 고물상에 팔았다.

그때 오장춘의 얼굴은 힘든 노동으로 먹이를 확보한 자의 피로감과 자부심으로 당당해 보였다. 마차세의 눈에, 그 음식은 이제 오장춘의 것이고 오장춘은 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대한 권리가 있었다.”

 

밥이 우선되기에 거꾸로 김훈은 똥을 이야기한다. 밥이 똥이 되는 과정이 삶이라고 강조하는 걸까?

함흥탈출의 뱃전에서 사람들은 똥을 누었고, 미쳐 돌아서 바다로 빠졌다.

똥을 다 눈 사람들이 다시 살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한다. 부산피난에서 밥의 해결은 가장 원초적 도구(?, 작품을 보시기를)로 이루진다.

베트남 또한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 아수라 속의 삶에 대해서 말은 무력하다고 김훈은 강조한다.

 

너는 말해도 몰라. 막상 그 자리에 가보지 않는다면.”

이라는 마차세의 형 마장세가 던지는 말은 모든 논리와 명분을 치워버리게 하는 몸짓이다.

 

다 읽고 나니 공터의 노인들, 그리고 광장의 태극기 든 그 손들이 가진 기억이 만들어낸 구호란 기억의 왜곡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들이 좋았더라 하고 품고 있는 기억은 실은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었고 우아하지 않은 비장한 아름다움에 가깝다.

 

시간은 도도히 흘러간다. 역사는 과거를 치워버리고 오늘을 새롭게 재건축 해낸다.

아픔 또한 같이 흘러간다. 작가 김훈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이제 훌쩍 커버린 그의 눈에 아버지는 왜소하고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렇게 문자로나마 옮겨 적어 작품에 남길만큼 여유감이 생겼다고 보인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무책임한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실이 연결되어 있다. 인연이라는. 잊고 싶은 인연이지만 종종 되돌아오면서 놀라게 한다. 사진첩의 부자간의 닮은 모습이 그렇다.

작가 김훈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은 필력이다. 부자가 모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건 우연은 아니다. 유전이고 인연이다. 다 없어져도 나에게 남겨진 짙은 유전의 흔적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전쟁과 개발연대 세대의 부모들이 그렇다. 그들은 분명 자신이 받은 수준 보다 훨씬 높다랗게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에서 더 고상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개개인끼리 깊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노력 덕분에 오늘이 이 땅이 가능하다 점에서 서로 연결된 셈이다.

 

내 눈에 태극기부대의 주장은 황당하게 느껴진다. 거기서 무너져 탄핵이 부결되었다면 딱 나라꼴은 남미의 식민국가들 수준으로 퇴보할 것이다. 아니면 유혈사태.

그렇게 갈라진 기억들 속에서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리고 <국제시장> 같은 포근함이 아니라 똥냄새가 풍기고 가난에 배곯는 김훈의 묘사를 포개본다.

그리고 작가가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을 같이 느껴본다. 그냥 그럴 뿐이다. 거창한 이념도 명분도 아닌 그냥 안쓰러움을 가지며 책을 덮었다.

문장은 인간을 가르기도 쉽고, 또 부족해서 실체를 드러내기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글이라는 쓰임을 통해 우리는 서로 이어진다. 연민은 인간다움을 만들어주는 숭고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현대사와 그 속에서 고난 받은 이들이 <공터에서>와 같은 글을 통해 서로 연민을 가지며 하나의 덩어리로 모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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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3-2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1979년이 아니라 더 앞으로 전진한 현대를
다루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작가가 가진 한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마천 2017-03-2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아주 최현대를 다룬 것으로 <영자>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매우 감동적입니다. 한계라는 표현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조정래 작가는 한계에 확실히 도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훈 작가는 아직 더 갈길이 있다라고 감히 주장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