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영웅전 -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 로마 군주의 거울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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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당 플라톤아카데미의 수장인 김상근 교수가 <플루타크영웅전>의 해설한 이 책은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다. 

지금 한국의 인문학은 열탕과 냉탕을 오가고 있다.

열탕으로는 기업의 인문학강의 시장이다. 잡스의 아이폰 이후로 인문학 이름 붙은 각종 강의가 줄줄이 이어졌다.

냉탕은 대학의 인문학과 구조조정이다. 교육부의 인원감축에서 대학들은 칼 뽑기를 취업률 기준으로 미흡한 인문학과들을 줄줄이 폐쇄하고 있다.

이 모순은 왜 발생하는가?

여기에 대해 김상근 교수는 인문학의 유래와 연혁을 길게 기술하면서 풀이에 도전해본다.

김교수의 말에 의하면 인문학은 페트라르카로부터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자녀를 대학에 보내지 않고 직접 인문학자들을 통해 교육시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술을 신학에 접목하여 삼단논법의 기교를 가지고 종교라는 불변의 진리의 과업에 매달리게 했다. 반면 상인들은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새롭게 변모되는 당대의 사회와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고전에 직접 부딪혀나가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대학이 고답적으로 원리에 매달릴 때 인문학은 대학 밖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은 스스로 인문학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청년실업을 부르는 사회의 침체 속에서 고등교육의 존립의 의미를 스스로 증명하는가? 이렇게 물어갈 때 쉬운 답은 잘 나오지 않는다. 내 주변의 대학교수들도 소수 최상위권 대학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의 취업난에 근본적 답을 주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역시 김교수구나 하고 감탄을 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본인이 직접 해설에 나선 영웅전 이야기는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특히 영웅전의 하이라이트인 캐사르 대목에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를 제국주의자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크도 캐사르의 야심에 대해 비판했고 캐사르와 시오노 둘 다 제국주의라는 거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시오노의 <로마인이야기>를 열독 하는 것 자체에 대해 이를 통해 역사에 접하는 현실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충분한 캐사르 이해일까?

알렉산더와 캐사르의 비교는 매우 논란 많은 문제이다.

알렉산더의 제국이 사후 분해되어 다른 길로 간데 비해 캐사르는 본인이 암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역사의 진로가 그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었고 제국도 통일이 유지되었다.

이는 캐사르가 하나의 조류의 선두에 서 있었고 그 조류를 더 강하게 밀고 나간 인물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캐사르 이전에 카틸리네의 반란 사건이 있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키케로의 경우 카탈리테를 체포하려고 했었고 나아가 동조자로 캐사르까지 처벌하려고 했다. 

키케로와 이후 캐사르 암살의 실행자 부르투스는 진정한 민주주의자였을까? 당시 로마 사회는 정복의 여파로 금융 산업이 발달해서 고리대금이 횡행했다. 이들 고리대금업자들은 속주에 나가 피정복민에게 고리대 장사를 헀다. 왜 속주민들은 고리대를 써야 했을까? 세금을 거두면서 그 세금을 낼 돈을 고리로 빌려주는 이중적 행태로 착취를 한 것이다.

이런식의 금융발달과 토지겸병 농민의 몰락은 정복전이 확대될수록 가속화되었다. 이 현상의 끝에 카탈리네의 반란, 그라쿠스의 개혁, 마리우스와 술라의 전쟁이 모두 있었다.

키케로도 부르투스도 고리대금업에 적극적이었고 그들의 자유는 이런 경제적 자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대인이였던 플루타크와 후세인의 차이는 세상르 볼 때 사회과학의 렌즈를 도입해 보느냐 마느냐다. 경제학과 사회학이 발달한 후세인의 눈으로 볼 때는 캐사르의 야심이 아니라 사회경제의 분화와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 보다 절대적인 권력의 도입이 필수적이었음을 이해한다. 이는 시오노나 이탈리아의 고교생 용 교과서에서도 확인한 점이다.


그런데 김교수는 너무나 쉽게 시오노가 현지에서 수십년간 살며 직접 느끼고 탐구한 결과물을 한마디로 매도하고 단정짓는다.

사실 강의로 큰 사람들의 문제는 쉽게 단정짓기다. 왜냐 강사는 선생님이어야 하고 선생님은 결론을 내주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공이 아닌 영역도 너무나 쉽게 단정지어 나간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이란 나라의 인문학은 가까운 일본의 서양 인식보다 너무 얕다. 김교수가 나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툭 치고 들어가 논쟁해줄 인력풀이 한국은 얕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만큼도 대중성을 못 가지고 출판문화 산업 자체가 풀이 작으니 졸업생들이 취업이 안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각설하고 김교수의 이 책은 서두의 출발점은 좋았지만 뒤로갈수록 약점을 노출한다. 책의 많은 부분에서 새로 배운점들이 있어서 가치는 인정해주지만 결론을 함부러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판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캐사르와 알렉산드더를 논한 대목이 그렇다. 이 글에서는 나도 캐사르를 중점으로 비판했지만 알렉산더 부분도 약점이 적지 않다. 

어쩄든 아쉽지나 이 정도로 하지만 하나 더 우리가 놓치 말아야 할 문제는 인문학의 열탕과 냉탕 문제다. 열탕은 사실 최근에 식어가고 있다. 저자도 책에서 언급했지만 현장의 교육 담장자들 중심으로 회의론이 일고 있다. 이 또한 강사의 문제이고 한국 인문학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냉탕의 문제. 그건 더 심각해지고 있다. 

아쉽지만 이런 문제는 고스란히 한국사회 역량의 문제이기에 길게 푸념을 늘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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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9-30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의 글을 읽으니 키케로와 부르투스의 처지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주아 계층의 입장과 경제적인 부분에서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기존 귀족과 성직자 계급에 대해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계층간 대립이라고 거칠게 표현한다면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과 유사함이 연상되네요^^: 사마천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6-10-01 12: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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