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
덕분에 세계 여러곳의 현대미술관에 가면 백남준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뿌듯하게 만든다.
단 워싱턴 현대미술관의 작가 해설을 잘 보니 born at Seoul, US citizen 이라고 나와서 국적을 유지하게 만드는게 어렵다는 느낌을 주었다. 생각해보니 윤이상, 이응로 등 많은 예술인들을 한국에서 쫓아내던 것이 한두건이 아닌데 굳이 예술가들이 한국에 머물러달라고 하소연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백남준씨의 가족은 대단한 부자였다. 일제시대부터 큰 재산을 유지했는데 해방 직후 이승만에게 풀베팅을
했다가 대박을 맞았다. 한국인삼을 팔기위해 홍콩 여행을 하는데 백남준을 데려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예 그곳의 영국인 학교에 유학 보내버렸다. 그래서 여권번호가 아마 10번대 안쪽이라고 들었다.
유학가기전에는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은 하지 않았다. (오늘 신문해설을 보니 경기고를 졸업했다고 나와서 어지간히 기자정신 없이 작성하는구나 하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독일로 건너간 백씨가 처음 접한 것은 현대음악이고 존 케이지 등의 희한한 연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음악이 그리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미술로 도전했다. 비디오 아트를 만들기 이전에도
상당히 괴짜 스타일의 작품을 남겼는데 머리에 묵을 담뿍 묻혀서 붓 대신 삼아 글을 쓰기도 하는 등
형식에 전혀 개의치 않는 활동이었다.
비디오 아트를 만들 때는 몇가지 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비디오 하면 무척 흔하지만 백씨가
처음 시도할 때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이를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 뒷받힘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얼마 뒤 집안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 자금 지원 거절이 화근이 되어
사업적으로는 몰락해버리고 만다.
비디오 아트를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는데 처음에 시작품 몇개를 만들어 공개하자 주변에서 흉내내고
자신이 제일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때 이럴줄 알았지 하면서 원래 준비해 놓았던
한 단계 깊은 작품들을 선보이자 아 당신이 원조요 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활동들 속에서 한국과의 관계도 형성이 된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만나서 TV 등 전자제품을
후원받기도 하고 1984년 조지 오웰 관련한 기획도 나오면서 한국을 처음 방문하게 된다.
공항에 내려서 유치원 동창인 여자분을 찾는다고 말하는 통에 당사자와 조우가 있었고 그 과정이 책으로 나와있는데 일화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그 책에서 인상적인 것 하나가 한강 다리가 왜 모양이 다틀린가라는 질문이었다. 답은 중동 바이어 보여주기 위해서 공법을 다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면에 대한 꽤 신빙성 있는 해설이다.
미국에서 말년에 체류했지만 자신의 국적은 개의치 않았다.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기원이 강했지만
특정 정치적 입장으로 강하게 표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부인은 일본인인데 비디오 아트의 후발주자지만 백씨의 의견에 의하면 청출어람이라고 한다.
시비 거는 사람 중에는 결혼을 놓고도 뭐라고 하지만 아까 언급했듯이 한국 사람들은 별로 예술가들에게
할말이 없어야 한다.
참고로 백남준에 대한 논평 중 하나가 김용옥의 석도화론이다. 시비가 많이 된 이 작품은 김용옥이 백씨에게
나 아느냐고 묻는데 백씨는 글쎄 모르겠다라고 답하자 속에서 불끈 화가 난다는 식의 표현이 많았다.
결국 화론 보다는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는 꼴이다. 관심 있으면 한번 들추어 볼 수는 있지만 글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한국인으로 보여준 무한한 가능성은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해주는
횃불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