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출신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진짜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던 경험이 있다.
이해하고 있는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면 밀란 쿤데라는 체코의 작가이고 내가 이 책을 처음 알았던 시점에서 보면 반체제 작가였다. 체코 당국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작년인가 각종 수필 스타일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책을 한 권 구매하였는데 구매할 당시 의도하고는 내용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 HP 의 Wolfgang 이라는 친구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사무실에 갖다 놓은 이 책의 저자를 알아보았다. 놀라운 일이다. 문화적으로 이미 많은 부분이 세계화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그도 나도 내용은 전혀 읽지 않았는데 말이다.
1968 년은 서구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해였다. 체코 정부의 일련의 위로부터의 자유화운동을 체코 공산당의 일부 분파가 모스크바의 권력자들의 힘을 빌어 강하게 탄압했다. 이 소설은 이 사건을 정점으로 하여 사회의 억압이 개인에게 만들어 내는 허위 속에서 인간들이 대응해 가는 모습을 잘 그려 내고 있다. 제목을 먼저 음미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표현이 되어 있다. 존재라는 것은 적어도 개인에게는 원래 무거운 것이다. 존재 자체 이외에도 인간은 주위의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느끼는데 이것을 무겁게 여긴다고 표현할 수 있다.
토마스와 테레사가 만나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우연이 필요하였다. 인간은 종종 운명이라는 특별한 것이 대지위에 자신이 가게 되는 길을 표시해 놓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의견은 수십억의 인구에 대해 일일이 배려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해 테레사는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광주리에 담긴 아이로 비유된다. 그녀의 손에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들려 있었는데 토마스에 대해 나는 당신과 같은 정신세계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는 테레사의 주장 내지 변호를 담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입장권의 기능을 한다. 그녀는 매우 우연한 관계에 의해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미인이여서 충분히 여러 명의 남자 중에 하나를 선택할 위치에 있었다. 이 것 저 것 고르는 중에 테레사의 아버지와 맺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여자의 그 때에 주의 깊지 않게 관계를 가진 그녀의 불찰과 테레사의 아버지의 조심성 없는 사정 덕분이었다. 하여튼 이제 가질 수 있던 가장 좋은 시절을 보내고 난 그녀는 자괴감에서 생에는 별로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딸에게도 자기와 같은 행동을 강요한다.
테레사는 결코 이러한 처사를 수긍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홉 명의 구혼자를 가질 정도로 아름다웠다면 아마 테레사 본인도 빠지지 않는 미모를 가졌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 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야만 했다. 이러한 불행 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는 남다른 불가침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남보다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항상 읽었다. 책은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신분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수단 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읽던 책을 알아보는 토마스는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올려 줄 수 있는 구원자로 보였다.
토마스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행동을 많이 하였다. 자신의 글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지만 막상 그 결과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바대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말이 거꾸로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넘기는 모양이 되고 마는 것을 여러 차례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도가 종종 바라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쿤데라의 소설 중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중앙유럽에서 공산주의 정권들을 전적으로 범죄자들의 기구라고 믿는 사람은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즉 범죄자 정권들은 범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천국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12 쪽
다 읽고 나면 사회라는 것의 모양새는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비나가 체코에서 노동절 시위에 발을 맞추지 못 했던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도저히 손을 들고 발을 맞추며 구호를 외치는 행동을 하지 못 했다. 손에 든 플랭카드의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잇는 성격이 체제에 저항적이냐 순응적이냐 하는 식으로 분류되는 것이 맞다.
마지막에 프란쯔는 자신이 선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간 그 오지에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현지 사람들의 손에 의해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프라하의 봄 이후 일어난 많은 변화 중의 하나가 자유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인데 증오의 감정으로 사진을 찍었던 테레사도 자신의 직장을 잃고 바에서 일자리를 구하였다. 그 곳의 회계는 전진 신학 교수였고 수납에는 전직 대사가 앉아 있었다. 토마스에게도 압력은 다가와 외디프스 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성한 글을 빌미삼아 회유와 압력이 들어온다. 어색한 타협을 취하려다가 그는 역겨운 행동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의 가닥 아래 계층으로 내려간다. 그는 청소부가 된 것이다.
이 점은 좌우익 갈등에서 나타난 편향적인 사상인식 그리고 반발이 만들어 낸 역편향을 모두 이해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도덕이나 정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인간들의 통치를 경험한 한국현대 사회 속에서 약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이상화는 하나의 역편향을 만들었다.
감동하는 것은 인간의 순간적인 모양새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