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정과 사랑, 가족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하는 두개의 플롯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고 오래 전의 삶이 오늘의 삶에 가치와 방향을 주는 쪽으로 작용하게 되어있다.
여주인공은 뚱뚱한 몸을 가진 중년여성으로 갱년기를 맞아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성적인 매력의 상실을 다른 분야로 극복하기 위해 갖은 솜씨를 발휘해서 음식을 만들어보지만 퇴근에서 돌아온 남편은 음식을 들고 바로 TV 앞에 앉아서 스포츠 중계에만 몰두한다.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카운셀링을 하는 단체 모임에 나가보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한채 실망감만 깊어간다.
이러한 모습은 대중문화로 가득찬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기혼여성들의 문제와 고민을 대변한다.
그러다 고모분을 문병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나이든 할머니와의 대화에 차츰 빠져들어간다.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여인 잇지와 루쓰는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다는 공동의 아픔을 안고 있다. 선머슴같이 활달한 잇지와 조용하고 섬세한 아름다운 여성 루쓰는 언뜻보기에 대조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보인다. 하지만 마음에 함께 가지고 있는 아픔은 서로를 의지하며 좋은 친구로서 삶을 보다 밝에 영위하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잇지는 교회를 나가라는 주위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들은 입으로 외우는 교훈을 결코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비꼬는 말을 던진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철도 화물객차에서 물건을 빼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의적 노릇을 한다. 옆에 있다가 우연히 이런 작업에 동참하게 된 루쓰를 향해 잇지는 마음을 연다. 역시 사람을 함께 만드는 것은 함께 풀어나가도록 주어지는 역경일 것이다.
루쓰가 결혼을 해서 이러한 관계는 더 유지되기 힘들줄 알았지만 실상 루쓰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루스를 무한정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서 구출해온 잇지는 철도역 옆에 자그마한 카페를 열었다. 이곳의 메뉴 하나가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다. 흑인과 백인이 자유롭게 어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두여인은 서로를 닮아가면서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배우면서 루쓰의 아이를 키운다. 여기에 찾아온 전남편과 KKK단은 흑인들에게 테러를 가한다. 여기서 잠시 배경을 살펴보면 잇지와 루쓰가 살고 있는 지역은 알라바마고 루쓰가 전남편이 있는 곳은 조지아주로서 둘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군의 일원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지역이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포레스트라는 이름을 가지는데 이는 원래 알라바마에서 KKK단을 만들었던 남군 장군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여러 남성들 또한 KKK단의 일원이다.
전쟁의 패배와 경제의 파괴로 상처받은 백인남성들의 자존심이 만들어낸 폭력이 다시 여성과 흑인에게 가해지고 있다면 이렇게 차별받는 여성들이 학대받는 흑인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남편이 아이를 빼앗으러 온 것을 정당방위로 우연히 죽이고 만 이들은 결국 꼬리가 밟혀서 재판을 받게 된다.
가까운 현실에서 위협하는 주먹이 KKK라면 보다 멀리 있는 법 또한 이들에게 정의의 방파제가 되지 못한다.
재판정을 살펴보면 판검사는 물론이고 배심원들이 모두 백인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이 어떤 식으로 제도라는 위선의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의 미국법정을 다룬 영화에 나오는 인권변호사의 활약이 아니라 목사의 위증이었다. 존경받는 목사가 성서에 손을 얻고 한 말의 위력은 곧 판사가 재판을 무혐의로 종결시키도록 하게 만든다. 하지만 선서에 사용한 책이 실은 성경이 아니라 그 정도 두께를 가진 <백경>이었다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의지가 가슴에서 불끈 솟게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캐이시는 체력단련에 나서고 활기차게 행동한다. 이런 바뀐 태도는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려는 것이다. 결국 주차장에 파킹할 때 잽싸게 자리를 빼앗은 얌체족의 차를 마구 박아버리는 것까지 발전한다. 이런 시원하고 통쾌한 태도는 관객을 대신해서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감의 회복한 여인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변모해가는 과정에는 마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한다는 요령을 터득한 것도 합리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삶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만들어준데 따르는 고마움에 대해서 캐이시는 할머니에게 무한정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갈 곳 없어진 할머니가 사실은 잇지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자기집의 새로운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결국 혈연으로 만들어진 가족의 유대가 느슨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마음을 통해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교훈이 주어진다.
미국 사람들이 왜그렇게 자원봉사에 열심히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열성적인가 하는 물음에 쓸만한 답하나가 될수도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