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종이조각 하나라도 엄청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 여양은 조금이나마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 듯한 심정을 느꼈다. 그것은 딱히 양식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정성들여 손으로 쓴 위임장이라는 제목의 짧은 문서였는데, 적힌 글자는 모서리가 동그란 것이 귀엽고 예쁜 어린 소녀의 글씨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뒷면에 두드러진 글자의 자국을 보면 제법 힘과 정성을 들여서 썼음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글의 가장 아래 부분에 서명과 함께 찍혀 있는 교장의 직인이 이 종이를 권한이 담긴 공식적인 문서로 둔갑시켜주는 징표가 되어주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종이 쪼가리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펼쳤던 모험담을 여양은 굳이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때 생각 없이 보여줬더니 지란은 ”로리 교장에게 쳐들어갔단 말야? 멋져! 대단해! 훌륭해! 쌈박하다고!”라며 호들갑을 떨어대었다. 쌈박이 뭐냐, 고 면박을 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위임장을 조금만 보자며 매달리는 통에 이야기를 꺼낸 스스로를 속으로 탓하며 마지못해 꺼내긴 했으나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금주법 시대의 폭력 형사가 경찰 배지를 보여주듯 슬쩍 시늉만 했을 뿐이다.
더 보자고 떼를 써도 손때가 탄다, 구겨진다는 둥 하며 파리 쫓듯 손을 내저으니 또 자기가 싫어졌냐며 우는 척까지 하며 관심을 끌어보려 했으나 그 역시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여양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한 채로 저녁으로 가져온 돈까스를 썰면서 오늘 일어난 일을 곰곰히 되짚어 보았다.

신문부의 제갈승미를 만났으나 냉엄한 현실의 벽을 깨달았다. 신문부라고 모든 정보를 입수한 것은 아니었고 일개 학생의 처지로는 조사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LXG가 어떻게 신문부도 모르는 증거를 갖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인 상태였지만. 이어서 찾아간 학생회에서는 처음 실망감을 느꼈다. 그들은 사건에 대해 무관심해 보였고 해결의 의지도 없었으며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무작정 교장실 앞으로 찾아갔으나 교장실은 기업 중역의 사무실처럼 이중으로 꾸며져 있었다. 문이 커다란 교장실 안에 비서가 앉는 자리가 있고 진짜 교장실이라 할 수 있는 집무실은 그 안에 별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 즉 방 안에 방이 있는 구조였는데 집무실에는 비서이자 교무주임 관채향이 있었다.
영화궁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 학교에서 근무했던 교사지만 이곳에서는 교무 관련 업무와 교장의 비서 역할을 전담하고 있어 현재로는 교사라기보다 교직원에 더 가까운 위치였기 때문에 교무실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교장실에 가면 교장을 만날 거라는 순진할 정도로 단순한 생각만 품고 무작정 찾아온 여양은 적잖이 당황했다. 상대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삼십대의 노련한 교사이자 행정가인 것이다.

여양은 직구로 승부하자는 생각에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으나 간단하게 거절당했다. 학생들의 고민상담 같은 것은 투고함에 편지를 넣거나 내부 게시판에 글을 쓰면 된다는 형식적인 답변만을 내세운 채로. 학생들을 공포와 무력감에 짓눌리게 만드는 데 있어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관채향의 앞에선 여양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무력감만을 곱씹으며 낙담한 채로 교장실을 나선 여양과 승미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떤 사람을 만났다. 복고풍인가 싶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 깨끗한 피부가 도드라져 보이는 훤히 드러난 이마, 주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교복 차림. 큰 키와 날씬한 몸매. 언젠가 한 번 마주친 듯한 기억이 남은 그는 바로 학예부장 진영아였다. 바로 여양을 여왕으로 만들자는 기고문을 신문에 실어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아까 학생회실에서 구석 자리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 의문에 답을 하듯 영아는 여양을 돕기 위해 왔다며 자신이 채향을 따돌리는 사이에 집무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의 도움으로 여양은 교장과 독대를 하는 데 성공한다. 처음엔 두려워하며 채향을 호출하려 했던 한송이 교장도 의심과 괴롭힘을 받는 학생의 구명을 위해 도움을 달라는 여양의 설득에 감화된다. 사실상 교장의 업무라는 것은 채향이 시키는 대로만 해왔던 한송이도 느낀 바가 있는지, 교장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신과 믿음을 재확인하고 싶었는지 결국엔 직접 위임장을 쓰고 직인까지 찍어서 주었다.
내용이야 위 사람은 교장의 대리인이니 교직원 및 학생들은 적극 협조해달라는 상투적인 문구였으나 바로 그 직인이 이 종이 조각에 무시 못 할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표창장 등의 공식 문서에만 날인하는 교장의 직인이 찍힌 이상 채향이라고 해도 쉽게 여양의 조사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여양이 교장실을 나오자 망을 보고 있던 승미가 손가락으로 OK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유유히 사라진 한참 후에야 채향과 영아가 돌아왔다. 이런저런 구실로 교장실에서 끌어내어 시간을 끌어주었던 것이다. 결국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싱거운 결과만 갖고 돌아온 채향은 자신이 없는 동안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길로 여양은 영화궁의 양호실장이자 학생들의 주치의인 감지민을 찾아가 검시 결과를 물었다. 일개 학생이라면 몰라도 교장의 대리인은 무시할 수 없었다.

“사인은 질식사. 목이 졸려서 죽은 건 확실해. 얼굴에 울혈이 나타나 있고…… 피가 고여 있단 말이지. 발견 당시에도 얼굴이 시뻘건 상태였어. 그리고 또 뭐가 알고 싶은 거지?”
“목에 난 상처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직접 시신을 확인했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사진이라도 볼 수 없을까요?”
“흐음. 그게 말이지,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역시 목의 자국이 이상한 거죠?”

지민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얕잡아보고 있다가 크게 당한 기분이었다.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사실 정말 이상해. 아침에 발견했을 때는 커튼으로 목을 맨 상태인데, 목에는 더 작고 깊숙이 들어간 자국이 남아 있어. 대략 3 센티미터 정도 되는 너비에, 단단하면서 어느 정도 탄력성이 있는 끈으로 추정돼.”

그럴 생각이 없었던 지민도 상대방이 이미 상당량의 정보를 갖고 있음을 알고는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확실히 커튼의 두껍고 투박한 매듭으로는 만들 수 없는 가느다란 자국이 목을 거의 한 바퀴 휘감듯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 기숙사의 커튼으로 목을 매어 질식하기란 어렵지 않나요?”
“맞아. 더구나 커튼이 매달린 높이를 생각해도 그렇지. 창문 자체가 그리 높지 않게 만들어져 있어 커튼으로 매듭을 만들어봤자 몸을 공중에 띄울 수도 없으니까. 발견 당시 시신의 발등이 땅에 닿은 상태였어. 사람이 아무리 죽고 싶어 목을 매었어도 목을 졸리고 숨이 막히면 발버둥을 치게 마련이야. 이 높이라면 얼마든지 땅을 밟고 살아날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로 죽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걸까나.”

여양이 가장 납득하지 못했던 부분도 그 점이었다. 나영은 누구보다 밝고 행복해 보였던 사람이다. 나영이 그토록 힘들고 불편하게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중의 자국이 있다는 LXG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병원을 나섰다. 처음 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확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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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말고 먹어.”
“아니, 그게……”
“걱정할 것 없어. 효범이는 늘 충분히 많이 만들어 오니까.”

빈나련은 그렇게 말하곤 두 손가락만으로 찻잔을 쥐고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학생회관 2층에 위치한 학생회실. 학생회 전용 회의실이 딸려 있는 제법 큰 공간이 온전히 학생회 멤버들만을 위해 제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양과 제갈승미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여유롭게 다과회를 즐기는 도중이었다.

“아항, 이게 바로 학생회 부회장이 직접 구운 쿠키란 말이죠. 잘 먹겠습니다.”

승미가 먼저 넉살 좋게 손을 뻗었다. 효범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승미는 리포터처럼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맛있다고 칭찬까지 해주었지만 여양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온 것만 같아 먹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나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왜? 맛이 없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텐데. 효범이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해보고 싶다면서 요리연구부에 다니면서 과자 굽는 걸 배운 성과거든. 솔직히 처음엔 별로였지만, 일 년 정도 하니까 이젠 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 것 같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효범은 나련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수제 쿠키나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련을 위해 무작정 시작한 과자 만들기였다. 주위에선 농구가 어울리는 외모에 무슨 쿠키 굽기냐며 비아냥 혹은 거부 반응이었으나 단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다른 반응을 다 무시할 수 있었다.

“버터를 많이 넣어서 그런지 부드럽네요. 초컬릿 칩을 너무 많이 넣은 것이 흠이지만 맛있어요. 파는 것보다 나은데요.”

승미는 양손으로 덥석덥석 집어 먹으면서 계속 칭찬을 늘어놓았다. 처음엔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부 정도로 생각했던 여양도 저 정도로 하는 걸 보면 진짜로 맛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하나를 집어 크게 베어 물었다. 손이 커서 그런지 쿠키의 크기도 거의 손바닥만 하고 초콜릿 칩이 잔뜩 박혀 있어서 파는 것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맛을 보니 과연 달고 부드러웠다. 특히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아 안에서 따스한 버터의 향이 진하게 나는 게 일품이었다. 여기에 우유를 탄 홍차를 더하니 금상첨화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눈길을 주니 효범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여자라면, 아니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그 옆에 앉은 나련 역시 말 잘 듣는 아이를 보는 보모와도 같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쑥스러워져서 고개를 숙이자 나련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 먹는 모습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어.”

나련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싶다고?”
“네. 아무래도 저 혼자 가면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용건이 용건이라……”
“용건?”
“원나영 선배의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나련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학생회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사이에선 왜인지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금기사항처럼 되어버린 일이다.
일어나선 안 될 부끄럽고도 슬픈 일이기 때문인 것도 그렇지만, 의혹과 의심이 번져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한 학생회에 대한 무력감과 자기반성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암묵적인 규제이리라.
껄끄러운 침묵을 깬 것은 역시 나련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교장 선생님은 교무주임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인 처지야. 열 살도 안 된 교장을 진심으로 따를 교사와 교직원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말이지. 실제로 교장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비서를 자처하는 교무주임 관채향이라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학생들의 생각이야.”

나련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교실에 있는 것과는 달리 등받이가 푹신하고 뒤로 젖혀지는 사무용 의자였다. 학생회의 비품은 교무실의 것에 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하게 갖춰져 있었다.

“바로 그 관채향 선생은 이사회의 심복이고. 결국 이사회가 이 사건을 덮어두려고 생각하는 이상, 우리가 그 사람을 설득하기란 무리라고 봐.”

여양은 말없이 찻잔 속 홍차에 비친 자기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나련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여양의 마음속에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오기가 생겨났다. 여기까지 온 것도 그런 자신의 고집 때문인지도 몰랐다.
친구의 목에 나이프를 찔러 넣으려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도, 가장 무섭다는 선배들의 방으로 쳐들어간 것도, 살인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나선 것도 결국은 하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그건 바로 고집과도 같이 물러날 줄 모르는 겁 없는 용기.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여양은 남은 차를 죽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만, 아직 좀 더 얘기를 해보면……”
“학생회의 입장을 들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럼 어쩔건데?”
“저 혼자서라도 찾아가야죠. 교장 선생님에게.”

모두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분명 실권은 교무주임이 갖고 있을지 몰라도, 엄연히 교장은 교장입니다. 직접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겠어요.”
“잠깐만! 같이 가!”

여양이 도망이라도 가듯 빠른 발걸음으로 회실을 나서자 승미가 얼른 쫓아갔다. 방을 나가기 전에 슬쩍 돌아보며 실례했다는 말을 남기곤 문을 닫았다. 얼떨떨한 표정의 효범을 슬쩍 본 나련은 좀 전의 느긋한 표정을 되찾았다.

“역시 보통이 아닌 걸. 이 정도면 아이들이 왜 여왕감으로 거론하는지 알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신입생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런 걸 궁리하고, 계산하고, 결국 혼자서 안 되겠다고 결론내려 미리 포기하고 마는 것이 우리들 학생회의 모습이야.”

나련의 지적은 곧 자기자신을 향한 자아비판이기도 했기에, 효범은 아무런 반론도 반박도 꺼낼 수가 없었다. 모두들 물에 젖은 듯한 무거운 침묵에 눌려 있는 동안 나련은 효범이 구운 쿠키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차 한 잔만 더 부탁해.”

효범은 잠에서 깬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있는 학생회실의 문에서 떨어지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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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나영이 방에서 자살을 했다는 부자연스러운 점. 기숙사 방은 수첩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그 수첩은 나영의 침대 밑 크래들에 꽂혀 있었어. 룸메이트인 금윤의 것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그 방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밀실 상태였단 말이지? 교직원이 마스터키로 들어갈 수 있다지만, 일단은 직원을 믿는다는 전제하에 생각해봐야지. 이 섬에서는 경찰이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의사와 경비 직원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린 여기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가 없을 거야. 자, 그럼 그 다음으로. 그 방은 1층이니까 창문으로 드나들 수는 있을지 몰라. 하지만 아침에 발견했을 때 창문은 잠겨 있었어.”
“잠깐만요, 너무 빠른데요.”

“뭐야, 너 받아 적고 있었어?”
“신문에 실렸던 방의 사진, 더 크고 뚜렷한 컬러 사진으로 받을 수 없을까요? 다른 각도로 찍은 것도 있겠죠?”

“너 우리 라이벌 신문이라도 낼 생각이야?”
“정보는 많을수록 좋아요. 뭐가 맥거핀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체링에게 들었던 말을 금방 흉내내어 자신이 한 말인 것처럼 폼을 잡아봤다. 승미는 맥거핀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뭐, 좋을 대로 해. 아무튼 문도 창문도 잠긴 상태에서 룸메이트가 옆에서 자고 있는데 목을 매다는 바보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하면 금윤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하지만 더 생각해보면,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받을 것이 뻔한 상태를 만들어놓는 바보 역시 없겠지? 살인을 저질렀다면 증거는 없애야 하고 알리바이는 만들어야 하는 게 당연지사니까. 마침 1층이니까 창문도 열어놓고 나영의 수첩을 방의 바깥에 던져놓는다든지 해서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 아니겠냐, 하는 점이 금윤이 범인일 가능성을 낮춰주고 있어.”

여양은 동의의 뜻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에 돌로리스가 꺼낸 새로운 정보가 더해져. 목에 남은 이중의 상처. 즉 나영은 커튼에 목을 매고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다른 끈으로 목이 졸려서 죽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타살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지면서 금윤의 범인 가능성이 도로 높아지는 거지. 밀실 안에 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영의 목을 조를 사람은 달리 없으니까.”

밝은 얼굴이 도로 흐려졌다. 여양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다. 자신이 겁도 없이 금윤의 무죄를 밝혀내겠노라 덤벼들었지만 솔직히 자신감과는 별도로 그 일을 해낼 가능성이 높은지를 냉정하게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 어떻게 생각해? 이제는 네 쪽에서 말할 차례야.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왜 너는 길금윤이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너희들이 언제 그렇게 서로를 믿을 만큼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금윤이 주장한 알리바이 정도는 들었겠지?”

승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여양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자신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다. 신문에서 읽은 기사, 금윤에게서 들은 말. 그것이 전부. 결국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무모한 용기와 근거 없는 믿음 하나만 갖고 덤벼든 것이다.

돌연 앞이 막막하고 두려워졌다. 겉에서 보면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숲이지만 들어가면 갈수록 길을 잃은 숲은 어두운 미지와 공포의 미궁으로 변한다. 여양은 숲 한 가운데에 들어선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은 길 잃은 방랑자였다.

“흠. 네 얼굴을 보니 대답은 안 들어도 될 것 같아. 하지만 앞으로 어쩔래? 우리 신문부의 기자들도 취재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거야?”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짓는 여양에게 승미는 좀 더 알기 쉽게 말했다.

“이미 우리는 나영의 시신을 발견한 직원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지만, 상부의 지시라며 대답을 거부했다. 의사 선생님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입을 열려면 이사회의 힘이 필요해. 아니면 적어도 교장 선생님 정도의 ‘빽’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저도 모르게 쥐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앉아 있을 순 없어요. 뭐라도 해야지. 이사회의 승낙이 필요하다면 가서 부탁이라도 해볼 게요.”
“아서라, 아서. 이사회가 일개 학생을 만나줄 리도 없어. 여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여왕도 없는 때이고. 학생회장이라면 되려나. 일단 빈나련을 설득해서 교장을 만나러 가.”
“교장 선생님을……?”

승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약간은 교활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란 기대감을 안은 미소였다.

“그래. 로리 교장을 구워삶아서 대리인 자격으로 사건의 조사를 맡는다면 직원들도 무시하지는 못할 걸. 이제 여기까지 알려줬으니 신문부 취재기자인 나의 동행을 거부할 순 없겠지?”
그의 진짜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지만, 여양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숲 속을 헤매다가 반가운 표지판을 발견한 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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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뒤쫓은 진실


학생회관 건물은 서도의 서쪽 끝에 있다. 현관이 있는 정면으로는 학교 건물, 남쪽으로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벽돌길이 깔려 있고 길의 양쪽은 과수들이 가로수의 역할을 겸하며 늘어서 있다. 건물 뒤쪽, 서도의 가장자리에는 포도와 감귤밭이 펼쳐져 있어 과일들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영글었다.

영화궁의 학생회관은 순수하게 학생들을 위해 제공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대학교의 것과 비슷했다. 학생회실, 회의실, 음악과 연극 등의 연습실, 특별활동 부실, 요리연습실, 과학 실험실 등이 모여 있으며 여럿이 모여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작은 회의실과 개별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습실이 구비되어 있어 학생들은 특별한 제한이 없이 수업이 끝난 후나 휴일에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서관이 시험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중고등 및 대학교와는 달리 영화궁의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의 역할을 비교적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학생들에게 충분히 공부할 장소를 제공해주는 학교의 넓고 편리한 시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영화궁에서는 메뚜기족이나 자리 지키기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오히려 시험기간이라고 해도 학습실에는 자리가 남아돌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여양은 학생회관의 복도를 걸어가며 들려오는 온갖 소음과 잡음에 귀를 기울였다. 특활 부실이 늘어선 양쪽 문 안에서는 토론하는 소리, 잡담을 나누는 소리, 웃음소리, 말다툼을 하는 소리,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 앰프에서 나는 잡음, 장구를 두드리는 소리, 자작 라디오에서 나는 잡음, 물이 끓는 주전자 주둥이에서 나는 피리 소리, 믹서를 돌리는 소리,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소리 등이 한데 뒤섞여 5.1채널로 울려 퍼졌다.
복도를 걸어가는 자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리듬으로 삼아서 듣고 있자니 불협화음을 절묘하게 엮어낸 인더스트리얼 장르의 음악을 듣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신문부는 지하 1층에 있었고, 교실 두 개 정도의 크기의 큰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인쇄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용하지만 분명히 신문의 인쇄를 시작하면 지금껏 들린 모든 소음을 잠재워버릴 정도의 큰 소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노크를 해봤지만 응답이 없어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보니, 안에는 열띤 토론을 하거나 기사 작성에 여념이 없는 여고생 기자들의 정열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책상 위에 신문을 깔아놓고 자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한 명, 교과서와 참고서를 펼쳐놓고 공부 아니면 숙제를 하는 사람이 두 명 있을 따름이었다.

“오! 벌써 왔네.”

유일하게 알고 있는 얼굴, 숙제를 하던 제갈승미가 고개를 돌리며 아는 척을 했다.

“잠깐만 거기 앉아서 기다려줄래? 숙제가 다 안 끝나서.”

여양은 순순히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비록 아무도 신문부원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부실은 확실히 신문부 다웠다.
여기저기 쌓인 종이와 신문, 모니터에 잔뜩 붙은 포스트잇, 화이트보드를 빼곡히 채운 기사의 제목이나 회의 내용 같은 메모들. 환기가 잘 안 되는 지하실다운 퀴퀴한 냄새와 특히 종이와 잉크 냄새가 가득했다.

멍하니 턱을 괴고 앉아 있자니 숙제가 끝났는지 둘이는 책을 덮고 손가방에 넣는다. 한 학생은 작별인사를 나눈 뒤 그대로 부실을 나갔고, 승미는 취재수첩을 들고서 여양의 옆으로 와서 앉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에서 기대감이 담긴 빛을 뿜어내며 물었다.

“자, 그러면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하는지 들어볼까?”
“사실은, 기대하신 것과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원나영 선배 사건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요.”
“호오? 그 사건은 왜?”
“금윤 선배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죠?”

흐음, 하고 승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반쯤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하고는 밀고 당기기 같은 게 안 될 것 같다, 라고 반쯤 혼잣말처럼 운을 띄우고는 말했다.

“사실은 알고 있어. 네가 그 사건에 흥미를 보이는 이유도 추측이 되고. LXG와 있었던 일 말이지? 우리 부원 하나가 그걸 목격하고 대화를 적어왔어. 걔의 기억과 속기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었어.”
“저도 대충 예상은 했어요. 신문부에서 이 사건을 모를 리가 없다고. 그래서 말인데, 돌로리스가 언급한 증거와 사진에 대해서 신문부에선 알고 있었나요?”

“아니, 전혀. 만약 우리가 알았다면 그걸 신문에 싣지 않았을 것 같아? 어떤 외압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쉽게 굽히지 않아.”
“그렇지만 그 사건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지 모른다는 의혹은 그 전부터 있었어요. 그리고 금윤 선배가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잖아요. 그런 의혹을 신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우리가 신문을 통해 길금윤이 범인이 아니라고 기사를 쓸 수는 없어. 왜냐하면 현재로는 금윤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만큼이나 금윤이 범인일지 모르는 가능성도 있거든. 여기서 한번 정리해볼까?”

승미는 수첩을 펼쳐 잠시 뒤적거리더니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우선 주변의 증언. 우리는 금윤을 비롯해서 평소 나영과 친하게 지냈던 반 친구들을 골고루 인터뷰했다. 그들 모두 하나 같이 나영이 목숨을 끊기 전날까지 밝고 기운차 보였다고 말했어. 이전에도 전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자살을 암시하는 언행을 보인 적이 없다고 증언했지.”

여양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저녁시간에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본 스스로가 입증할 수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미소와 목소리엔 꾸밈이 없었고 슬픔을 감춘 기색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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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넷이서 잡담을 하며 놀다가 지란이 들어오자마자 마트료나를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그를 사이에 두고 여양과 지란의 한 판 레슬링이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이좋게 나눠 가지기로 합의했다.

“그럼 마미의 상반신은 내 거야!”

지란이 음흉하게 외치며 뒤에서 마트료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야, 그럼 나는 하반신만으로 만족하라고?”

여양이 툴툴대자 지란은 하반신이 진짜배기라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양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둘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배를 하는 동안에 마트료나는 놔달라며 무력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슬프고 괴롭고 우울한 하루였지만 마지막에 웃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금윤은 생각했다.

그만 갈게, 가볍게 말하고 일어난 금윤을 여양이 불러 세웠다.

“선배, 그 방에 있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금윤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솔직히 무서워. 하지만 내가 그 방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아이를 홀로 버려두는 것만 같이 여겨져서.”

모두들 잠시 말을 잃었다.

“무섭거나 쓸쓸해지면 언제든 오세요.”
“그럼 여양은 나랑 같이 자는 거야?”

갑자기 지란이 눈에서 불을 켜고 달라붙었다. 여양은 날아드는 모기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누가 너 같은 변태랑! 선배는 내 침대에서 함께 자면 돼.”
“흥. 너도 위험해. 차라리 선배가 나랑 자요. 안 잡아먹을 게.”
“네가 그렇게 말하면 더 불안하다!”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동안에 금윤은 재차 작별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갔다. 간신히 두 사람의 마수에서 벗어난 마트료나도 체링을 앞세워 도망가듯 나가고 둘만 남았다.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지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들 갔네.”
“그래, 갔다.”
“여양아~ 역시 너밖에 없어. 내 곁에 남은 건 너뿐이야.”

돌연 칭얼대며 안기자 여양은 당황하며 발로 밀어냈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난 잘 거야! 참, 숙제할 거 가지고 왔는데? 나 숙제해야 해, 비켜!”
“쯧쯧. 그러게 숙제는 나처럼 학교에서 해결하고 와야지.”

의외다 싶어서 쳐다보니 지란은 약 올리려는 듯 혀를 내민다.

“난 반 친구들이랑 숙제 같이 하기 모임을 만들었지롱. 수업 끝나고 다 같이 모여서 파트를 나눠서 각자 한 다음에 합쳐서 베끼는 거야. 특히 수학 숙제가 하기 딱 좋지.”
“기가 차네, 기가 차.”

어처구니없어서 내뱉은 말을 지란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감고 턱을 치켜들며 뻐기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숙제 품앗이라고나 할까?”

여양은 혀를 내두르며 자기 책상으로 가서 참고서와 공책을 펼쳤다. 책을 파는 서점은 매점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문제집과 참고서는 선배들이 썼던 헌책도 있었다. 참고서의 경우는 단순히 가격이 싸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부분이 체크되어 있어서 중고가 인기가 많았다. 여양은 그 사실을 모르고 단지 가격만 보고 헌책을 샀다가 만족하는 중이었다.
전에 쓰던 선배는 친절하게도 시험에 나왔던 부분까지 체크를 해서 고마웠다. 책의 옆면과 뒷면에는 색볼펜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문자를 적어놓았는데 여양은 생전 처음 보는 글자여서 알 수가 없었다. 뒷면에 적혀 있는 그 글자 아래에는 아마도 발음으로 보이는 한글이 있어 읽을 수 있었다.

「1학년 6반 레 홍 뀐」

아무래도 유학생인 모양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궁금했다. 책의 발행일을 보니 지금 3학년일 테고, 6반이라면 예과이니 반이 바뀔 일은 없을 테니 현재 3학년 6반일 것이다. 여양은 실습 시간 같은 때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양이 숙제를 하는 동안 지란은 침대에 엎드려서 학생수첩으로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숙제를 마친 여양은 이불을 덮어준 다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턴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각오를 하거나 긴장을 하는 건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여양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보았던 혼이 빠진 듯한 금윤의 젖은 얼굴과 꿈을 꾸는 듯 황홀한 마트료나의 표정이 망막 안에 인화된 듯 사라지지도 않고 거듭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깝게 나타나는 한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죽은 원나영의 모습이었다.

나영의 수줍게 웃는 얼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머리카락에 매달려 반짝이던 머리핀에 달린 액세서리들은 영화궁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하게 반짝였다. 그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나영이라는 사람은, 불과 며칠 전에 만나서 얘기를 나눴던 그 존재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새삼 여양은 죽음이라는 게 이토록 갑작스럽고 허무한 것임을 실감했다. 같이 숨쉬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걸 바라보고, 함께 울고 웃던 한 존재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남겨둔 이야기들, 못다 한 이야기들, 언젠가 할지도 모를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겨둔 채. 그 태어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 꽃처럼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날까지 작은 씨앗들은 어쩌면 저 하늘 위 구름 너머, 어쩌면 저 검푸른 바다 밑바닥, 아니면 저 별들 속에서 웅크린 채 길고 긴 잠을 자고 있으리라.

여양도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되어 천천히 잠의 세계로 가라앉았다. 바다 위의 밤은 더 길고 고요했다.

(제6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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