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좋아. 아까 두 가지 조건이라고 했는데, 그럼 남은 하나는 뭐지?”

겨우 침착을 되찾은 메이브가 물었다.

“그건, 나영 선배를 죽인 범인을 찾는데 협조해줘요. 선배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여기 두 사람이죠? 뭔가 실마리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나영 선배가 쓰러졌던 곳에 가볼 생각이에요. 그 외에도 범인을 찾기 위해 최대한 협력해줬으면 합니다.”
“좋아. 화살이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생긴 상황이고, 우리 입장에서도 진범을 찾아서 잡아내는 것이 유리한 일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대신 약속대로 네가 알아낸 것 중에서 우리와 관련된 것은 빼고 금윤의 누명을 풀 정도로만 골라서 발표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상대로 이 정도의 거래를 하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왕이면 거래보다 협상이라고 표현해줬음 하네요. 그게 더 근사해 보이잖아요?”
“훗. 거래라는 말은 네가 먼저 했다는 걸 잊지 마.”
“앗, 그랬나? ……그랬구나!”

여양은 뒤늦게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참, 하나만 더하자면 앞으로 금윤 선배를 괴롭히거나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두 개라더니 몇 개까지 요구할 셈이야?”

카밀리아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요. LXG 여러분들이 그동안 벌인 일이 많으니까.”
“안 그래도 누구씨 덕분에 앞으론 자중하게 생겼어.”

카밀리아의 투덜거림에 돌로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웃음이 나오냐, 롤리타?”
“뭐 어때, 너도 인정해야지. 우리 다섯은 저 신입생에게 완전히 녹다운 당했다는 걸 말이야!”
“아니, 이건 TKO야. 우리 리더가 반박도 하지 못하고 녀석의 거래를 전부 받아들였으니.”

메이브는 빈 종이컵을 버리라고 아르진에게 반쯤 던지듯 건네고는 두 사람의 말을 자르듯 말했다.

“우린 링에도 오르기 전에 백기를 들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아이가 갖고 온 무기는 보통 무기가 아니었어.”

시선을 다시 여양에게로 향했다. 초록색 눈동자의 광채는, 여전히 미지의 공포를 주었다. 그 안에 담긴 힘을 알게 된 이상, 더더욱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임에는 분명했다.

“너도 우리와의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게. 오늘 밤의 이 대화는 비밀이고, 사건의 진상도 우리와 관련된 부분은 모두 빼줘.”
“근데 그렇게 되면 제가 알아내었다고 발표할 내용이 거의 없어지겠군요.”

왠지 말하고 나니 기운이 빠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생해서 찾아낸 진상이라고는 하지만 공개할 만한 것은 없고, 핵심 중의 핵심인 진범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아직 사건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명탐정 소리는 못 듣게 되겠지. 아쉬워? 네가 한 일을 자랑할 수 없게 되어 섭섭하니?”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과시하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택도 없죠, 명탐정이라니. 범인도 못 밝혀내는 명탐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 갈게요. 참, 외부로 공개는 하지 않겠지만 금윤 선배와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는 친구에게는 말할 거예요. 저만큼이나 믿어도 되는 아이들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그 아이인가 보구나.”

그들의 마음에 동시에 떠오른 한 소녀, 여양이 지금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 사람. 여전히 궁금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긴 해도, 지금은 이 뿌듯한 승리감에 도취된 채로 있고 싶다. 그와 함께 이 기분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럼 가볼게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그들이 늘 이렇게 밤에 모여서 논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분히 겉치레에 불과하긴 해도, 어쨌든 밤늦게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고, 팔다리가 한겨울이 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쪼그라든 폐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조금이라도 저들의 방에서 멀어지고픈 마음에 여양은 어두운 복도를 달렸다. 연한 초록빛의 비상등만 드문드문 불을 밝힌 기숙사의 복도는 차갑고 쓸쓸했다. 여양은 자력으로 끌려가듯이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문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빨리 응답이 왔다.

“왕님이니?”
“응.”

문이 열리며 파자마에 체육복 상의를 걸친 마트료나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 억지로 잠을 참아 피곤이 쌓인 얼굴은 이전보다 더 창백했다. 달빛과 비상등의 흐릿한 조명 속의 그 얼굴은 공포 영화의 유령처럼 새하얗다.
둘은 잠시 말없이 복도에 나와 등을 기대고 섰다.

“잘 되었니?”

말 안 하고 오래 버티기 시합이라도 하듯 길게 침묵하던 사이, 마트료나가 항복을 선언했다.

“응.”
“너의 추리가 맞았던 거야? 금윤 선배가 한 일이 아닌 게 맞지?”
“응.”
“메이브 선배는 네 조건을 받아들였니?”
“응.”
“잘 되었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별로 밝지가 않네?”

여전히 여양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마트료나의 표정도 조심스레 미소를 감추었다. 돌연 여양의 손이 마트료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마미,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왜, 왜? 무슨 일 있었어?”

“잘 들어. 난…… 너를…… 이 학교의 여왕으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넌 여왕이 되어줘. 나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여왕님이 되어줘.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넌 나만 믿고 따라와 줘.”
“그게 무슨……?”

둑이 터진 듯 열린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말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비누거품처럼 자유로이 흘러나와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너 초월랑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방법은 하나야. 네가 그의 뒤를 잇는 거야. 행방불명이 된 전임 여왕의 뒤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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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라고 물어봐도 될까?”

아주 조금, 호기심이 섞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지를 담은 굳은 표정을 보자 이쪽은 되레 기운이 빠지며 헛웃음이 피식 나온다.

“뭐, 네가 날 싫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어.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가 그렇게 안 되도록 막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선배에겐, 여왕의 자격이 없거든요.”

마치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판사의 목소리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말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몰래 조종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까지 이용하는 사람이 이 학교 학생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 여왕은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학생을 대표하여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교사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그런 중대한 자리를 선배에게 내줄 순 없어요.
제가 그동안 모은 증거와 증언은 LXG가 나영 선배의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놓습니다. 실제로 수수께끼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증거는 없지요. 나영 선배는 새벽 1시부터 계속 기다렸고, 2시에 카밀리아와 돌로리스 선배가 나영 선배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잖아요?”

“왓(what)!”
“뭐라고?!”

두 사람의 불만과 경악이 섞인 외침이 방해를 했으나 여양의 단호한 목소리는 끊기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정황을 보면 금윤 선배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은 거죠. 알리바이도 없고, 끈은 땅을 파고 숨겼거나 바다에 던져서 없앴을 수도 있고. 어떤가요? 저도 여러분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증거를 조작해서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아니면 최소한 여러분이 한 자살 조작만 밝혀도 LXG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겠지요.”
“원하는 게 뭐야?”

모래를 씹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밀리아가 물었다. 여양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대답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우선 메이브 선배가 여왕 선발에 나가지 않는 것. 이왕이면 직접 신문을 통해 이번 여왕 선발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게 좋겠죠. 어차피 제가 진실을 밝힌다면, 메이브 선배의 지지도는 추락하고 말겠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시신을 훼손하고 누명을 씌우려 했으니 여러분 모두 이사회로부터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겁니다. 감방에 얼마나 갇혀야 할지, 짐작도 못하겠네요. 그러니 제 제안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불명예와 고통을 받지 않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으니까요.”

LXG의 네 멤버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메이브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돌아가는 룰렛을 보듯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결국 멈춘 화살표는 꽝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한자성어가 진퇴양란이란 것인가 봐.”

여양은 그보다 사면초가 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역시 너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싶었던 거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그토록 열심히 이 사건을 조사하고 그 결과로 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여왕이 되기 위해서겠지. 너의 그 이름에 걸맞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건가?”
“아니오, 잘못 짚으셨네요. 제가 여왕이 되고 싶다면 이런 추한 길을 택하진 않겠죠. 진상을 밝히는 대신 이걸 가지고 선배와 거래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것도 목적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거라고 본다면, 저도 선배나 다를 바 없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잖아요. 방금 제가 제 입으로 선배에게 여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해놓고 저 자신도 이런 자격 없는 짓을 하고 있음을 자각한 이상, 제가 여왕이 된다는 걸 스스로가 용납할 수가 없어요.”

메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고지식한 건지 꽉 막힌 건지, 어쨌든 적당히 회유할 수 없는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멋진 연설이야. 너도 결국 빈나련인가……. 이걸로 왕당파들은 힘을 얻겠군. 이런 강력한 우군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아뇨, 또 틀리셨네요. 모든 학생들이 선배가 아니면 빈나련 선배를 지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빈나련 선배가 딱히 나쁘다거나 자격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뭐? 여왕 후보가 또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메이브도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님이 직접 여왕 후보로 나서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빈나련이 아닌 다른 인물을 지원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자신의 정보망에는 그럴 만한 인물이 따로 없을 터였다. 똑같이 1학년이면서 여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북도 정과는 앙숙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다. 도저히 떠오르는 인물도 짚이는 바도 없다.

“흠. 난 알 것도 같아.”

돌로리스가 돌연 침묵을 깼다. 혼자만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을 띄우자 여양은 그의 수수께끼와 같았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듯한 말들을 떠올렸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던 말. 그래서 돌로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선배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착하고, 그리고 여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굳이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소녀들은 차차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메랄드 아이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그날 밤 느꼈던 존재감과 박력은 역시 허상이 아니었다.
얼른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자라버렸어. 메이브는 허탈한 웃음밖에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감, 자신이 느낀 진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함께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자 메이브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과 LXG 모두를 합쳐도 그 둘에게는 이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감이 얼마나 정확한지 재확인하는 것은 좋았으나, 나쁜 예감마저 적중하는 것은 기분 좋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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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젠 메이브 선배가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밤중에 나영 선배를 부른 이유가 뭐죠? 선배의 죽음을 자살로 은폐하려던 이유는요? 혹시 이사회의 대응에 대해서도 짐작가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메이브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컵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곤 빈 종이컵을 돌로리스에게 내밀었다. 돌로리스가 병을 들고 술을 따랐다. 그걸 바라보며 메이브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한 건 원나영이 아니라 길금윤이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여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초록빛 눈동자가 알콜 덕분인지 조금 흐릿하게 보였다.

“길금윤을 몰래 만나기 위해 원나영을 잠시 밖으로 내보낸 것일 뿐이지. 하지만 그가 죽어 있는 걸 알고는 우리도 정말 놀랐어. 하지만 우린 이걸 이용하기로 했지.
그렇지만 금윤의 손에 끈을 쥐어놓는다든가 하는 식은 너무 유치했어. 주위 사람들도 믿어주지 않을 테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의심스러운 자살을 꾸민다는 작전이지. 마치 누군가가 죽여 놓고 어설프게 자살로 위장한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야. 짧고 두꺼운 커튼으로 목을 매어 놓은 것도 그런 이유야.
하지만 창문 밖으로 삐져나왔는지는 몰랐어. 그런 걸 발견하다니 제법 날카로운데?”

여양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건 체링이 발견하여 지적한 것이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얼마든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도록 놔두었다. 그게 실토하게끔 유도하는데 효과적일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금윤을 괴롭힌 이유는 따로 있어.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지. 우리의 진짜 목적은 초월랑이니까.”

초월랑?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마트료나가 만났다는 인물, 전임 여왕. 졸업식 날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람.
그런데 돌연 마트료나의 앞에 배를 타고 나타났다 감쪽같이 사라졌고, 금윤이 월랑을 만나고 싶다며 마미의 목을 향해 나이프를 들이대었던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 제공자. 그렇지만 그 모든 것보다 마트료나가 잠깐 만났을 뿐인데도 잊지 못하고 몇 번이나 들먹여 여양의 마음을 헝클어놓았다는 점에서, 마음 한 구석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는 인물. 왜 여기서 그의 이름이 나온 걸까.
처음으로 여양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떠오르자 메이브의 표정엔 대조적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도 알고 있는 이름이겠지? 마트료나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테니까.”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다니, 혹시 정말 저 에메랄드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얘기한 것, 조금 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 다만 여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히 신문부나 방송부 같이 귀찮은 애들에게는 말야.”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브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 목적은 초월랑을 제거하는 거야. 길금윤은 그러기 위해서 심어놓았던 미끼이고. 초월랑이 왜 사라졌다고 생각해? 그는 분명 여왕 자리를 내놓기 싫은 거야. 졸업식에 불참하고 이 섬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게 그 증거이지. 교칙에 의하면 여왕은 전임이 졸업을 하여 공석이 된 이후 선발하도록 되어 있어.
그런데 전임 여왕이 졸업을 거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여왕을 뽑을 근거가 없어지는 셈 아니겠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아무 접점이 없는, 월랑에게 목을 매다는 아이 중에서 하나를 골랐어. 그게 바로 길금윤이야. 내가 가진 에메랄드 아이의 힘으로 걔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었지. ‘초월랑을 만나면 숨겨 두었던 칼로 찔러라’라고 말이야.”

주위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 했다. 역시 에메랄드 아이에겐 숨겨진 힘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도 놀랍지만, 같은 학교 학생을 찌르도록 조종했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그 비정함에 숨이 막혔다.

“나중에 금윤에게 슬쩍 물어봐. 그때 나이프는 어디에서 났냐고.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무의식 단계에 묻어 놓은 지령이니까. 금윤은 항상 나이프를 옷 안에 감춰놓고 다니면서도 나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긴 해도,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전 네 친구를 공격한 건 일종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월랑을 만나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일으킨 실수지. 유감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이사회에 대해서 억측은 하지 말아줘. 우리도 이사회의 생각이나 목적은 전혀 몰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싶은 게 이사회의 꿍꿍이거든.
이 학교를 지배하기 위해선 언젠가 이사회와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올 텐데, LXG는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조직인 셈이지. 지금은 비록 유학생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권좌에 오르더라도 우리 멤버만으로 학생회를 꾸밀 생각은 없어. 우수한 인재라면 누구든 받아들일 생각이거든. 바로 너 같은 아이 말이야.”

이젠 갑자기 회유책으로 나오는 걸까. 여양은 이사회 이상으로 메이브의 꿍꿍이속이 궁금했다. 전임 여왕을 비밀리에 제거하려는 무서운 계획을 털어놓은 이유가 자신을 믿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한통속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아닐까. 사람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한 에메랄드 아이라면 불가능한 생각도 아니다. 그렇기에 메이브는 저토록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치 연기를 하듯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브 선배는, 여왕이 될 수 없어요. 아니 되어서는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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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여러분들이 나영 선배의 목에 난 상처가 찍힌 사진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요. 하지만 사실이라고 치죠. 어쨌든 그 정보는 신문부에서도 모르고 있던 기밀이고 외부로 새어나간 적이 없으니까요. 그걸 안다는 것은 의사 선생님 아니면 사건을 목격한 직원과 접촉했다는 뜻이고, 손선지 씨는 메이브 선배와 만났다고 진술했어요.
그때 선배의 에메랄드 아이가 힘을 발휘한 거겠죠. 스스로 신이 내린 눈동자며 마법사 가문의 후계자라고 말하고 다닌 분이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죄송하지만 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직접 말씀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동요하고 분노하는 네 명의 멤버들과 달리 메이브는 여전히 침착해보였다. 잠시 눈을 감고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듯 대답을 했다.

“내 능력을 인정해주니 고마운데.”
“선배님!” “선배!” “메이브!”

멤버들의 놀라는 혹은 나무라는 듯한 외침이 이어졌다. 하지만 메이브는 이미 결심한 듯 했다.

“여기까지 알고 왔다면 더 감추거나 모르는 시늉을 할 상황이 아니겠지.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모아놓고 밤중에 찾아오는 용감한 행동도 할 수 있을 테고. 우리 LXG를 보고도 시선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교사 중에서도 소수, 학생이라면 학생회장과 부회장 정도야. 그런데 신입생의 입장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는 건 그만한 무기가 있다는 이야기지. 그렇지?”

메이브의 시선이 여양에게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고양이의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몸을 옭아매는 듯 했다. 하지만 여양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안광에 녹아들어간 초능력이 자신에게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피어올랐지만, 억지로라도 참으며 버텼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메이브는 체념한 투로 말했다.

“난 시선이 마주친 상대를 잠들게 할 수 있어. 깨어난 후에는 그 사실을 잊어먹도록 만들 수도 있고. 하지만 소문처럼 거창한 초능력은 아니야. 난 그저 그 사람을 잠재우고 디카에 담긴 사진을 들여다보았을 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순순히 자신이 한 일을 시인한 것은 물론 여양에게 있어 좋은 수확이었다. 그렇지만 메이브의 이 증언이 수수께끼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되었음은 아직 본인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보인 여양의 표정이야말로 회심의 미소 자체였다.

“감사합니다. 선배 덕분에 의문은 풀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게 있네요. 대체 나영 선배를 죽인 건 누구죠? 여러분들도 모른다면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게 되는데 말이죠.”
“그걸 우리가 안다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당장 경비 직원이나 신문부에 알려주겠지.”

카밀리아의 대답은 지당했다. LXG 본인들이 범인이 아닌 한, 그걸 감출 이유는 없다. 하지만 금윤을 협박하여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점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여양은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이다. 이제 이야기할 때가 왔다. 그날 밤의 진상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 범인의 정체를 모릅니다. 하지만 전 그 외에 대해서는 알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마미, 그러니까 마트료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밤에 나영 선배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습니다. 분명 범인이 보낸 메시지겠지요. 새벽 1시에 기숙사 밖에서 만나자는 내용일 거예요. 전 나영 선배의 수첩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지워지고 없더군요.
나영 선배는 1시에 기숙사를 나가서 범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갖고 있던 끈으로 목을 졸려 숨지고 말았죠. 몸에 다른 상처가 없는 것으로 봐서 싸우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기습 혹은 방심한 사이에 당했겠죠.
그 후, 제가 마트료나를 데리고 이 방에서 나간 후 여러분 중에서 두 사람이 건물을 나갑니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죠. 여러분은 마트료나 다음엔, 나영 선배와 만날 예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선배는 그 1시간 전에 이미 다른 누군가와 만났고, 그에게 목숨을 잃었지요.”

카밀리아가 메이브에게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돌로리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보면서 여양은 말을 이었다.

“바로 카밀리아 선배와 돌로리스 선배, 두 사람이 나영 선배를 만나기 위해 약속한 장소로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이미 숨이 끊어진 선배였지요. 두 분은 아마도 곧 나영 선배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아요. 하지만 두 분은 자신들이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살인 혐의를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직접 들을 생각이지만, 덕분에 그 해괴한 자살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죠.”

여기서 청중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연사처럼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메이브 이외의 네 사람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외면하는 듯이 보였다. 메이브만은 표정이 굳어졌지만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두 분은 메이브 선배와 연락을 주고받았겠죠. 여기까지 생각하면 그 시각에 메이브 선배가 금윤 선배의 방에 있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어요. 누구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여러분은 나영 선배의 죽음을 자살로 꾸미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두 분이 선배의 시신을 옮겼고,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이 창문을 열고 시신을 받아서 방 안으로 집어넣었겠죠.
1층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이로써 창문이 잠긴 이유도 알 수 있었습니다. 열려 있다면 자살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은 커튼으로 선배의 목을 묶고, 창문을 닫아 잠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작은 실수가 있었죠. 창문 밖으로 커튼 자락이 살짝 삐져나온 거죠.”

돌로리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양 옆의 사람의 얼굴을 초조한 듯 바라보았다.

“전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출력 받아서 보관하고 있는데요, 직접 보시면 알 거예요. 커튼의 길이가 짧아서 목을 둘러도 발이 땅에 닿을 정도이기 때문에 자살을 하려면 끈의 길이를 가급적 최대한으로 늘여야만 합니다. 그러니 닫힌 창문에 일부가 끼어서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데도 그대로 놔두고 목을 맨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죠. 이건 아마도 너무 서두르다가 생긴 실수일 거예요. 아마도 혹시나 들킬까 싶은 마음에 방의 불도 껐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죠.
그러면 발견 이후의 상황을 볼까요? 밤새 이런 소동이 일어났는데도 깨지 않고 잠에 빠져 있던 금윤 선배가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에 목을 맨 나영 선배를 발견하고 경비실에 알립니다. 직원들이 숨진 것을 확인했고, 의사 선생님이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죠. 확인 결과 유서도 없고 전날까지 아무런 징후도 없던 나영 선배가 돌연 자살했다는 점, 창문이 잠겨 있었다는 점, 방은 다른 사람이 드나들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자연스레 금윤 선배가 의심을 받았죠. 여러분은 목에 난 이중의 상처를 언급하며 자살이 아닌 교살이었음을 드러내며 의혹을 부풀렸고요.
이상한 것은 이사회의 대응과 태도인데요, 이렇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마무리 짓고 사건을 서둘러 끝맺으려 합니다. 교사나 직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려서, 교장 선생님의 대리인 자격을 얻은 다음에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지요.”

단숨에 쏟아내듯 말을 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메이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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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권좌(權座)에의 도전장


시계 바늘이 밤 10시를 가리키던 때, 학생들의 몸은 쌓인 피로로 인해 늘어지고 정신은 구겨 넣은 지식으로 눅눅해졌다. 기숙사의 방에서 빛이 하나둘씩 꺼질 때, 하늘에선 되레 별들이 경쟁하듯 붉을 밝혔다. 이 어둠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빛나고자 하는 모습은 소녀를 닮아 보였다.

닫힌 창문 너머로도 환한 달빛과 바다의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별빛과 육지에선 느낄 수 없는 해류에 둘러싸인 영화궁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신비롭고 황홀한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이날 밤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터였다. 장소는 카밀리아와 돌로리스의 방. 며칠 전 마트료나가 끌려갔던 곳이었다. 그 안에는 그때의 당사자들이 그대로 모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 정각이 되자 큐사인을 넣은 배우처럼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딱 맞추어 작지만 또렷한 노크 소리가 들렸고, 파자마 차림의 카밀리아가 걸어와 문을 열었다.

“웰 컴(well come), 미스 여.”

여왕님은 그의 인사에 눈짓으로만 간단히 답례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메이브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레이스 달린 캐미솔을 입고 어깨엔 파자마를 걸친 차림으로 침대에 다리를 꼰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마치 애완동물처럼 작지만 요염한 인상을 주는 돌로리스가 파자마 차림으로 바짝 붙어 있었다. 옆쪽으로 아르진과 리디아가 의자를 끌어와 놓고 앉아 있었는데, 카밀리아를 포함한 방 안의 2,3학년생은 사제 잠옷을, 1학년생 두 사람은 여양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지급받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그때와 똑같았다. 옷차림이나 앉아 있는 모습에서, 방의 불을 끈 채 촛불을 책상이나 침대 위에 여러 개 놓고 밝혀서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까지. 탐미적이지만 퇴폐적이다, 라는 감상은 여전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서 굳어진 목을 풀기 위해 얕은 기침을 두 번 내뱉고, 여양은 말을 꺼내었으나, 메이브의 목소리가 그것을 덮었다.

“저기……”
“모처럼 온 손님이니까, 우선 마실 거라도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때?”

시큼한 냄새.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진이 플라스틱 병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든 탁한 액체가 무엇인지는 이미 마트료나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여양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죠. 전 아직 술을 안 마셔봤어요.”

카밀리아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한국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가면 몰래 감춘 술을 마신다고 들었는데.”
“전부 그런 건 아니에요.”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일부의 말만 듣고 그 나라 전체를 판단하다니, 이래서 외국인들의 편견은 종종 한국인들을 엉뚱하고 불쾌한 사람들로 만든다니까. 하지만 여양은 불평만 할 입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빨리빨리’가 입에 밴 외국의 관광 안내원, 관광 명소에 새겨진 한국어로 된 낙서 같은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던가.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핑계만으로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었다. 결국 그런 것들이 자신의 모습마저 규정해버리고 마니까.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내가 한국인의 명석한 부분을 보여줄 차례지, 여양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기운을 북돋았다.

“서로 얼굴 오래 보고 싶은 사이도 아니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어요.”

하지만 다섯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홀로 서서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더구나 촛불밖에 없는 어둠 속이고보니 마치 모놀로그(일인극)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긴장은 되어도 떨리지는 않았다. 문득 얼떨결에 나가서 상을 받은 콩쿨 때가 떠올랐다. 생전 경험도 없던 연기와 춤을 많은 청중들 앞에서 보여줘야 했건만, 어색해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수도 없었다.
그 덕분인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심사위원들에게 좋게 보였는지 어땠는지, 유명 연기 학원을 다니며 예고 입학을 준비하던 쟁쟁한 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대상을 받은 이변을 일으킨 것은 자신을 지도했던 중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했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예과의 동급생들에 비해 서툴고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느꼈다.

갑자기 못난 자신을 화려한 주위 친구들과 비교하자 괜히 마음만 우울해졌다. 잡념을 떨치고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

“사진 얘기부터 하죠. 금윤 선배를 협박할 때 사진을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건 손선지 씨에게서 받아낸 거 맞죠?”

상대방은 여양과 같은 연기 특기생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찔렸는데 감출만한 강심장도 아니었다. 그들의 당혹감과 놀라움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손선지라면, 경비 직원? 그 사람이 너에게 말했어?”
“아냐! 우리 LXG의 비밀 루트로 입수한 정보야!”

카밀리아와 돌로리스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여양은 카밀리아의 질문에 대답하고 돌로리스의 외침은 무시했다.

“여러분들이 원한대로, 그 분은 메이브와 만났다는 것밖에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건 현장을 찍었던 디지털 카메라에 데이터가 남아 있다고 증언을 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죠.”
“요즘 여러 군데 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많이 알아낸 모양이구나.”

종이컵에 자기들이 담근 밀주를 담아서 홀짝거리던 메이브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따지듯 달려드는 둘과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벌써 여양이 찾아온 목적과 할 말을 짐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면을 꿰뚫어본다는 소문이 자자한 에메랄드 아이라면 가능한 생각이었다.

“덕분에요. 메이브 선배님, 당신의 눈에 담긴 힘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초능력? 최면술?”
“왓 더 퍽(what the fuck)? 이 년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카밀리아가 따귀라도 올려붙일 듯 험악한 얼굴로 소리치며 일어났다. 하지만 메이브가 손을 들어 저지하자 분을 삭이지 못해 투덜대면서도 도로 침대에 걸터 앉았다. LXG의 규율은 엄격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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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10-08-0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만에 연재를 재개한 이유 : 원래는 요청글이 올라올 때까지 연재를 미룰 생각이었는데 그 와중에 연재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며칠 전에 생각이 나서 충동적으로 재개한 것입니다. 편의상 1부로 부르는, 책 1권 분량은 이미 다 썼으니 끝까지 연재하고요, 2부 이후는 반응 보고 연재 여부를 정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