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말고 먹어.”
“아니, 그게……”
“걱정할 것 없어. 효범이는 늘 충분히 많이 만들어 오니까.”
빈나련은 그렇게 말하곤 두 손가락만으로 찻잔을 쥐고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학생회관 2층에 위치한 학생회실. 학생회 전용 회의실이 딸려 있는 제법 큰 공간이 온전히 학생회 멤버들만을 위해 제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양과 제갈승미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여유롭게 다과회를 즐기는 도중이었다.
“아항, 이게 바로 학생회 부회장이 직접 구운 쿠키란 말이죠. 잘 먹겠습니다.”
승미가 먼저 넉살 좋게 손을 뻗었다. 효범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승미는 리포터처럼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맛있다고 칭찬까지 해주었지만 여양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온 것만 같아 먹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나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왜? 맛이 없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텐데. 효범이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해보고 싶다면서 요리연구부에 다니면서 과자 굽는 걸 배운 성과거든. 솔직히 처음엔 별로였지만, 일 년 정도 하니까 이젠 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 것 같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효범은 나련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수제 쿠키나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련을 위해 무작정 시작한 과자 만들기였다. 주위에선 농구가 어울리는 외모에 무슨 쿠키 굽기냐며 비아냥 혹은 거부 반응이었으나 단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다른 반응을 다 무시할 수 있었다.
“버터를 많이 넣어서 그런지 부드럽네요. 초컬릿 칩을 너무 많이 넣은 것이 흠이지만 맛있어요. 파는 것보다 나은데요.”
승미는 양손으로 덥석덥석 집어 먹으면서 계속 칭찬을 늘어놓았다. 처음엔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부 정도로 생각했던 여양도 저 정도로 하는 걸 보면 진짜로 맛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하나를 집어 크게 베어 물었다. 손이 커서 그런지 쿠키의 크기도 거의 손바닥만 하고 초콜릿 칩이 잔뜩 박혀 있어서 파는 것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맛을 보니 과연 달고 부드러웠다. 특히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아 안에서 따스한 버터의 향이 진하게 나는 게 일품이었다. 여기에 우유를 탄 홍차를 더하니 금상첨화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눈길을 주니 효범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여자라면, 아니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그 옆에 앉은 나련 역시 말 잘 듣는 아이를 보는 보모와도 같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쑥스러워져서 고개를 숙이자 나련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 먹는 모습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어.”
나련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싶다고?”
“네. 아무래도 저 혼자 가면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용건이 용건이라……”
“용건?”
“원나영 선배의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나련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학생회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사이에선 왜인지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금기사항처럼 되어버린 일이다.
일어나선 안 될 부끄럽고도 슬픈 일이기 때문인 것도 그렇지만, 의혹과 의심이 번져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한 학생회에 대한 무력감과 자기반성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암묵적인 규제이리라.
껄끄러운 침묵을 깬 것은 역시 나련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교장 선생님은 교무주임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인 처지야. 열 살도 안 된 교장을 진심으로 따를 교사와 교직원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말이지. 실제로 교장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비서를 자처하는 교무주임 관채향이라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학생들의 생각이야.”
나련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교실에 있는 것과는 달리 등받이가 푹신하고 뒤로 젖혀지는 사무용 의자였다. 학생회의 비품은 교무실의 것에 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하게 갖춰져 있었다.
“바로 그 관채향 선생은 이사회의 심복이고. 결국 이사회가 이 사건을 덮어두려고 생각하는 이상, 우리가 그 사람을 설득하기란 무리라고 봐.”
여양은 말없이 찻잔 속 홍차에 비친 자기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나련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여양의 마음속에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오기가 생겨났다. 여기까지 온 것도 그런 자신의 고집 때문인지도 몰랐다.
친구의 목에 나이프를 찔러 넣으려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도, 가장 무섭다는 선배들의 방으로 쳐들어간 것도, 살인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나선 것도 결국은 하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그건 바로 고집과도 같이 물러날 줄 모르는 겁 없는 용기.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여양은 남은 차를 죽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만, 아직 좀 더 얘기를 해보면……”
“학생회의 입장을 들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럼 어쩔건데?”
“저 혼자서라도 찾아가야죠. 교장 선생님에게.”
모두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분명 실권은 교무주임이 갖고 있을지 몰라도, 엄연히 교장은 교장입니다. 직접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겠어요.”
“잠깐만! 같이 가!”
여양이 도망이라도 가듯 빠른 발걸음으로 회실을 나서자 승미가 얼른 쫓아갔다. 방을 나가기 전에 슬쩍 돌아보며 실례했다는 말을 남기곤 문을 닫았다. 얼떨떨한 표정의 효범을 슬쩍 본 나련은 좀 전의 느긋한 표정을 되찾았다.
“역시 보통이 아닌 걸. 이 정도면 아이들이 왜 여왕감으로 거론하는지 알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신입생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런 걸 궁리하고, 계산하고, 결국 혼자서 안 되겠다고 결론내려 미리 포기하고 마는 것이 우리들 학생회의 모습이야.”
나련의 지적은 곧 자기자신을 향한 자아비판이기도 했기에, 효범은 아무런 반론도 반박도 꺼낼 수가 없었다. 모두들 물에 젖은 듯한 무거운 침묵에 눌려 있는 동안 나련은 효범이 구운 쿠키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차 한 잔만 더 부탁해.”
효범은 잠에서 깬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있는 학생회실의 문에서 떨어지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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