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아주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만약 이게 연극이라면 무서울 정도의 연기력이었겠지만,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보고 있자면 진심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처음 보는 신입생의 목에 칼을 겨누면서까지 애타게 찾고 있는 인물. 과연 그는 누구일까. 신입생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재학생들은 인질이 된 아이와 인질극을 벌이는 금윤을 걱정하면서도 내심 사라진 월랑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직 카메라만이 정면에서 당당히 마주보고 있을 뿐인 대치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이쯤 해두시지?”

카메라보다 몇 발짝 앞까지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던 마트료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살짝 뜨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님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금윤이 윽박지르듯 말했지만 왕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페트병과 종이컵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이쯤 해두라니까. 초면에 반말해서 미안하지만, 선배가 선배 같아야 말이지. 후배 목에 칼이나 겨누고 말야. 그리고 이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나 중학교 때 병으로 2년 꿇어서 나이는 열여덟이야. 곧 열아홉 되겠네.”

“닥쳐! 누가 네 얘기 듣재? 당장 꺼져!”
“내가 촛불이야, 꺼지게? 그거 고기 써는 나이프 같은데, 그걸로 눌러서는 상처도 안 나니까 헛고생하지 마슈.”
“뭐, 뭐라고?”

금윤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반면 왕님은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마트료나는 인질이라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용감할까.

“그걸로 잘라진다고 쳐도, 그래서 어쩔 건데? 거기 경동맥 있는 건 알고 계시나? 그걸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피가 말이지, 화단에 물 주다가 고무호스를 놓으면 자기가 막 춤추듯이 흔들거리며 사방으로 물을 뿌리잖아? 그렇게 돼. 시뻘건 피가 여기 주위에 흥건하게 뿌려질 거라고. 인간 분수가 되는 거야.”
“흐윽……”

금윤의 얼굴이 공포로 창백해졌다. 본인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미처 상상도 못해본 듯 했다. 하긴 그걸 안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했겠나 싶었다.

“사람이 피를 뿌리면서 죽는 걸 봤어? 삼류 호러 영화 말고 실제로 말야. 난 봤어. 우리 아빠는, 내 눈앞에서, 나한테 피를 퍼부으면서 죽어갔어. 난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고. 아빠의 피로 샤워를 하면서 나는 동맥이 잘린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봤다고!”

이제 왕님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금윤은 칼을 쥔 손을 비롯해 온몸을 바람 앞의 깃발처럼 심하게 떨고 있어 무력해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금윤의 손목을 재빨리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나이프를 빼앗았다.
공기가 빠져나간 풍선처럼 금윤은 힘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빨을 부딪혀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얼굴이 이내 붉어지더니 넘쳐흐르는 눈물로 뒤덮였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며 월랑의 이름을 불렀다.

“난 그저…… 그 분을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인데……”

그 다음 말은 울먹임에 섞여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왕님은 긴장이 풀리자 기운도 빠져서 곧 쓰러질 듯한 마트료나를 부둥켜안았다. 눈치도 없이 잿빛 양복을 입은 교직원들이 이제야 앞다투어 몰려왔다. 경비실의 CCTV 화면에 비치는 인질극 영상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미 상황이 끝났음을 알고 길금윤을 데리고 들어올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그는 병원에서 간단한 진찰을 받은 후 교칙 위반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웅성대던 소녀들의 목소리도 예전처럼 가라앉고 진정된 분위기가 되자, 정신없이 촬영에만 몰두하던 활인이 다시 인터뷰를 하겠노라 덤벼들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도 지칠 줄 모르게 덤벼드는 그 모습을 보면 과연 활어(活魚)라는 별명이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활인 _ 잠깐만요! 잠깐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왕님 _ 네? (손을 내저으며) 지금 마트료나가 지쳐보여서 기숙사에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은데요. 나중에 얘기할 수 없을까요?

활인 _ 잠깐이면 돼요. 신입생이죠?

왕님 _ 예. 보시다시피. (사복을 입은 자기 몸을 가리킨다)

활인 _ 아, 네네. 정말 대단했어요! 용감하기도 했고! 하지만 좀 위험한 상황이지 않았나요? 인질범을 섣불리 도발했다가 화가 나서 정말로 인질을 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왕님 _ 그거야 사람에 따라 다르죠. 제가 봤을 때 그 사람은 그런 행동이 처음이고 무척 충동적으로 보였어요. 뭐랄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나섰죠, 뭐.

활인 _ 야, 대단하네요. 그런 거 보통은 잘 모르거든요? 경호원 같은 쪽에 관심 있으세요? 경호학과에 가고 싶다든지.

왕님 _ 그런 생각 전혀 없고요. 저기, 이제 가야 하니까 비켜주세요.

활인 _ 아하, 네. 잠깐만요! 이름을 안 물어봤어! 입학식도 하기 전에 혜성처럼 나타난 우리 스타의 이름도 안 물어보다니 저도 참 리포터 자격이 없네요. 이름이 뭐예요?

왕님 _ (뒷머리를 긁으며 잠시 주저하다가) ……여왕님인데요.

활인 _ 네? 뭐라고요?

왕님 _ (조금 화가 나서 아까보다 큰 목소리로) 저는 여왕님입니다! 됐죠?


왕님은 마트료나를 부축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활인은 멍하니 카메라로 그 뒷모습만 잡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멘트를 이을 수 있었다.

활인 _ 이거 지금, 제가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전교의 학우 여러분. 아직 입학도 안 한 신입생이 말이죠, 신입생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선언했습니다. 다들 들으셨나요? 들으셨겠죠? 이거 생방송이지만 녹화도 하고 있으니까 내일 다시 틀어드릴게요! 여왕, 여왕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여왕이 되겠다고 전교생을 상대로 선언을 했습니다! 신입생이, 입학식도 하기 전에, 이야, 내가 이 학교의 전설이라 불리는 얘기들을 숱하게 들었지만 오늘처럼 충격적인 일은 처음인 것 같네요. 목에 칼을 들이댄 인질범을 가볍게 제압하더니 자기가 여왕이 될 거라고 당당하게 선언을 했습니다. 자, 영화궁의 아리따운 학우 여러분, 주목해주십시오. 앞으로 저 신입생이 이 학교에 돌풍을, 아니 돌풍이 뭐야, 아주 태풍을 몰고 올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네!



* * * * * * * * * *


“너 정말 멋졌어. 난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는데.”
“뭐, 운이 좋았다고 할까. 처음부터 마트료나를 노렸다면 내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까 그 말…… 진짜야?”
“응? 아빠 이야기? 사실 난 연극 특기생으로 들어왔어. 무용·연기 콩쿠르에서 상 받은 적이 있거든.”
“진짜?”
“진짜 정말이야. 중학교 때 뮤지컬 부문.”

“근데 사실 내가 물어본 건 2년 꿇은 건데? 진짜면 왕님 언니야 라고 불러야 되는 거잖아?”
“아! 그, 그건, 다, 당연히 연극, 연기지. 연기야, 연기. 그냥 반말하고 싶어서 둘러댄 거야.”
“그런가? 아무튼 그 휘릭 다가가서 홱 하고 칼 빼앗는 동작이 춤추듯 유연하다 했더니 역시나~. 뮤지컬 배우셨어? 앞으로 알아서 모실게! 하하.”

발랄하게 웃는 지란을 보면서 왕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진땀의 폭포가 느껴졌다. 나이도, 아버지도 모두 사실이었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물론 뮤지컬로 콩쿠르에서 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겨우 사귀게 된 친구들이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는 없었기에. 그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밝은 학생으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어두운 과거는 가장 먼저 벗어 던져야 하는 허물에 불과했다.

한편 활인은 헐레벌떡 식당 밖으로 쫓아 나왔지만 이미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학교 안에 있는 한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 영화궁 고등학교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 벗어날 길은 없다.
홀연히 사라져서 많은 이들을 슬프고 궁금하게 만든 전임 여왕 초월랑. 그 역시 목격자가 있는 이상 곧 나타날 것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그는 여왕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아서, 여왕 자리를 순순히 내놓고 싶지 않아서 졸업을 거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학교의 여왕 자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혜성처럼 나타난 신입생의 선전포고와도 같은 포부는 과연 이루어 질런지.

“이야, 올해는 진짜 재미있겠는 걸.”

활인은 카메라를 끄고 어깨에서 내리며 혼잣말을 했다. 기분은 후련했고 특종을 찍었다는 성취감에 마음도 들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이 더욱 기대되는 걸지도. 이 기분 좋은 흥분상태가 한동안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제2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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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09-08-2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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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red 2009-11-1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벌써 2장이 끝났다-고 느낄만큼 흡입력 있는 전개라 몰입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pilza2 2009-11-13 23: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장 단위로 몰아서 읽으시면 더 좋을 거예요.
저도 다른 분의 글을 읽을 때 감질나서 종종 그렇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