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의 일정이 끝난 금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3월이 끝나고 봄이 개화하는 남해는 이미 은혜로운 따스한 햇살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들 음료수 캔을 들고 재잘거리며 즐거운 하굣길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여양은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모든 일은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해결된 문제는 없었다. 금윤의 혐의를 벗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진범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밤 이후부터 3일 연속 교내신문은 특종으로 가득했고 학생들은 소문에 파묻혀 허우적거렸다. 다음날 메이브는 약속대로 직접 신문부를 찾아가서 여왕 선발에 나가지 않을 것을 밝혔고 그 즉시 신문 1면 전체를 차지하는 중대 기사로 실리며 전교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후보 등록 이전부터 굳어져 있던 양강구도가 일시에 무너지자 메이브를 지지하던 이들의 충격과 혼란은 상당했다. 자연히 왕당파가 힘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에 반발하던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현상이 빈나련 이외의 후보들에게는 기존 메이브가 가진 막강한 지지 세력을 모아서 흡수할 수만 있다면 지지도를 일거에 급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메이브의 미모와 카리스마가 학생들에게 일종의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왔고 외국 유학생이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오는 인기도 큰 지지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든 후보들의 세력 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은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날엔 여양 자신이 교장의 대리인으로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원나영이 새벽 1시에 기숙사를 나가서 산책을 하던 중 살해되었고, 범인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시신을 갖고 들어와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LXG 일원의 이름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전날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사회에선 이미 자살로 발표했고 부모님이 와서 시신을 인수해간 후였다. 여전히 영화궁은 남자의 접근을 막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바람에 배에서 내리려는 나영의 아버지와 이를 막는 직원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씁쓸한 뒷이야기를 남긴 채로 말이다.

그렇게 사건을 일단락 했다고 여긴 상태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고 결국 경찰 수사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이에 덧붙여 여양은 인터뷰를 통해 지난번 승미와 의견 일치를 본 문제를 언급했다.
전날 메이브가 후보 사퇴를 밝히면서 초월랑이 졸업을 하지 않아 새 여왕 선출이 불가능하며 그는 이사회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 데 이어서, 여양은 금윤이 받은 고통을 예로 들며 학생을 감옥에 가두는 비인권적인 처벌을 하는 현재의 상황을 외부로 알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이사회의 시정과 원나영 사건을 경찰에 신고할 것을 요구하며 이사회를 거듭 압박했다.

일순 궁지에 몰린 듯 보였지만 다음날 이사회는 대변인격인 교무주임을 통해 초월랑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학적상으로는 졸업을 한 것으로 처리되어 문제가 없고 여왕의 증표[여왕으로 선출된 이가 받는 세 개의 장신구로 망토, 왕관 모양 뱃지, 홀(笏)을 말한다]도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고 반박했고, 새로운 결과에 대해서는 학생 개인의 조사일 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만을 거듭했다. 학생들의 이사회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지만 그들은 눈도 꿈적하지 않은 듯 보였다.
여양은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바로 새 여왕이 선출될 때까지 말이다. 지금의 자신에겐 아무런 힘도 없고, 이사회와 접촉할 수단도 방법도 없다. 학생 중에서 이사회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징벌방에 감금되기 위해 지하로 끌려가는 걸 제외한다면 여왕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한 세 번째 특종이 바로 여왕님의 신문 발표문이다. 스스로 여왕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으니 앞으로는 후보로 거론하지 말아줄 것, 대신 곧 선거활동을 시작할 마트료나 후보를 지지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나이프 사건’의 인질로 얼굴은 알려져 있었으나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1학년생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선거 정국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졌다. 더구나 메이브의 낙마로 늘어난 부동층이 주목하던 후보 중 하나였던 여왕님이 자기 대신 밀어준다는 참신한 후보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다음 주에 발표되는 지지도 순위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두각을 나타낸 후보에게 부동층의 쏠림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음 주부턴 우리도 선거 운동 뛰어줄 테니 걱정 마!"

지란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트료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실어준다는 것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지만, 노혜는 지란이 과연 도움이 되어줄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내가 못 미덥다 이거야? 영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데?"
"앗, 아, 아냐. 난 그저……"
"그래, 나보단 네가 더 도움이 되겠지! 가슴이 확 트인 옷을 입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거야. 남녀공학이었으면 남자애들이 줄을 서서 받아갔을 텐데 참 아쉽네!"

그렇게 말하면서 남의 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어 움켜쥔다. 하지만 손아귀에 넣기에는 너무 커서 그저 손을 얹기만 할 뿐이었다.

"아악!"
"이 기분 좋다는 감탄사하며! 역시 넌 내가 만져줄 때 제일 기뻐하는 것 같아, 으흐흐!"

지란은 노혜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뒤틀자 더 신이 나서 손을 움직였다. 그 서슬에 책을 읽으며 뒤따라오던 체링이 노혜의 등에 부딪혀 비틀거렸지만 지란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체링은 못 봐주겠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책등이 파란, 앞장에 손가락 끝이 그려진 하얀 문고본을 주머니에 넣고 마트료나와 힘을 합쳐 둘을 떼어놓기 위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이 그 소란을 벌이는 동안에도, 여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될 선거전. 선거 전략이며 연설이며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걷던 도중 문득 자신의 앞을 걸어가는 여학생의 모습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싶었는데 기억이 되살아났다.
CCTV의 영상, 밤 12시 이후로 나간 모습이 없는데도 새벽 6시 이후에 기숙사로 들어온 모습만 찍혔던,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의 소녀.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인데, 왼손을 다쳤는지 붕대를 매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탄력이 있어 보이는 붕대. 여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빨리 하며 접근하고 있었고, 주위의 눈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그 소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이미 소녀의 왼쪽 손등과 손목을 거쳐 팔꿈치 아래쪽까지를 덮고 있는 붕대에 꽂혀진 채였다. 그래, 이 정도 너비라면 딱 맞겠어……. 여양의 뇌리에 원나영의 목에 난 이중의 자국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가상의 영상이 흘렀다. 목의 상처 위에 저 붕대를 얹어본다. 한 바퀴 감아본다. 딱 들어맞는다. 붕대의 양끝을 잡아당기는 작지만 억센 손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소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등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언젠가 식당에서 보았던, 화상을 당해서 머리로 얼굴을 가렸다는 그 아이였다. 자신과 같은 1학년생이라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신문부의 승미가 말해준 덕분에 그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왼손도 화상으로 다친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는 그날 밤의 일이 더 궁금했다. 밤새 어디에 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것일까.
그걸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커먼 장막으로 가려진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혐오감과 공포감을 자아내었다. 그때 느낀 충격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왜 이 아이를 봤을 때 그렇게 놀랐는지, 그리고 지금도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이성을 초월한, 좀 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검은 커튼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직 코끝과 입술의 일부, 그리고 왼쪽 눈뿐이었다. 오른쪽 얼굴의 반 정도는 왼손과 마찬가지로 붕대로 감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왼쪽 눈이 여양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메이브나 돌로리스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 끝이 저렸다.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어.’

입이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그 입이 당장 좌우로 죽 갈라지며 상어의 것과 같은 송곳니를 드러낼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건넨 한 마디.

"오랜만이야."

그 말만 남긴 채 석상처럼 굳어진 여양을 남겨두고 소녀는 유유히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고가 정지한 듯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여양은 두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하다니, 이상했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자신은 그를 알고 있고, 그도 자신을 알고 있다. 둘은 언젠가 만났던 사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상대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말은 여양 자신이 무심코 꺼낸 말을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잘 있었니?’

갈색 벽돌로 몸을 감싼 기숙사 건물을 보며 떠올린 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연스레 속으로 중얼거린 한 마디. 처음 간 장소에서 처음 본 건물을 보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양은 분명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양은 자신이 이곳을 알고 있고, 머리카락과 붕대로 얼굴을 가린 그 소녀를 알고 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서운 무언가가 혀를 날름거리며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알고 있어, 라고.

"왜 그래? 쟤랑 아는 사이야?"

지란이 아무 생각없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으나 여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보여준 한쪽 눈, 살짝 드러낸 이빨, 낮게 속삭인 듯한 한 마디 말이 마력을 발휘하여 석상으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이.

차가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작은 얼음 조각들이 몸 구석구석을 훑은 것만 같아서, 여양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떨고 있었다. 계절은 이제 완연한 봄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직 차가운 서리가 걷히지 않은 채였다.



-1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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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10-10-0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재를 마치며)
이로써 '화원의 여왕님'은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 연재되었습니다.
대충 책 1권 정도 되는 분량인데, 제가 처음 구상할 때 4권을 예상했으니 전체 이야기의 1/4 정도되는 셈이죠.
여러 사정에 의해 연재는 여기서 일단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인기가 없고 반응이 적기 때문이라는, 씁쓸한 결과 때문이지만, 글이 재미없는 것은 쓴 사람 때문일 테니 누굴 탓하겠어요. 그냥 받아들여야죠.

그러나 사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깔아놓은 복선과 뿌려놓은 떡밥이 그대로 남아 있고 초월랑 실종 등 수수께끼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긴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도 밝혀내지 못한 상태니까 말 다했죠 뭐. 미스테리라는 태그를 붙이는 게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목욕탕에서 잠깐 나왔던(엑스트라 수준;) 일본 유학생들이 대활약하는 등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입니다……만, 시간과 여력의 관계로 미뤄두게 되었네요. 안 되는 글 잡고 있느니 신작에 도전하는 게 낫거든요. 제가 전업작가도 아니고 출간이 보장된 상황도 아니니까.

아무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비록 접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도 놓고 싶지 않은, 애착이 담긴 이야기니까 언젠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재미가 있었다고 느꼈거나 뒷 이야기가 궁금해진 분이 있다면 피드백을 부탁드리며,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윤정애 2010-11-1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읽다가 사라지는바람에 겨우찾아서 이제야 재미있게읽고있는데 중단이라니 많이 서운하고 앞으로 벌어질일이 궁금하네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언제든 연제바랍니다. 즐겨찾기에 담아놓고 수시로 확인해볼까해요 그럼 작가님 겨울이오는데 감기조심하시구 좋은글 빨리만날수있기를 바랍니다.

pilza2 2010-11-12 20:11   좋아요 0 | URL
찾기까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따로 지우거나 감춘 적이 없어서 사라졌다는 말씀을 들으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언젠가는 반드시 연재를 재개할 생각이니 기대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윤정애님 같이 요청해주시는 분이 열 분만 있어도 당장 할 텐데 말이죠.;;;;

송민영` 2012-03-2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미있어 보이는데 이걸로 끝인가요? 인기가 없는 것은 이야기의 퀼리티 문제가 아니어 보입니다. 알라딘 말고 다른 곳에서 연재해보세요.

pilza2 2012-03-27 20: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더 좋은 반응을 받을지 모르겠네요. 판타지가 아니니 판타지 소설 사이트에서 연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무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multir 2013-04-2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보고 갑니다. 언젠간2부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애써준 여양을 앞에 두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울 정도로, 마트료나는 초월랑을 생각해왔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 LXG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았어. 여왕이 되고 싶어서 욕심을 내는 사람은 절대 여왕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 여왕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착하고, 모든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리고 내가 아는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마트료나 바로 너야. 너만이 될 수 있어. 네가 말했잖아? 초월랑을 동경한다고. 그에게서 바라던 미래를 보았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비밀이라고 한 결심이 있었지? 그게 바로 이거야. 너를 여왕의 권좌에 앉히겠다는 거.”

생각해보면 여양은 늘 자신의 곁에 있었다. 곤란하고, 외롭고, 슬프고, 힘들 때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위로해주고, 달래주고, 웃게 해주었다. 어둠을 밝혀주었다.

그랬는데, 자신은. 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자신은.

“그렇게 굳은 표정 짓지 마. 넌 나를 대신해서 얼굴만 내미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내가 네 이름으로 권좌에 대한 도전장을 내미는 셈이니까, 너무 부담 가지진 마.”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아팠지만 마트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위해 헌신한 이 사람을 마주본다. 참으려고 해도 눈가가 흐려진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솔직히 떨리고, 자신이 없어……. 메이브 선배가 물러났다고 해도, 전임 학생회장님이 있고, 북도그룹의 3세가 있고, 쟁쟁한 선배들이 후보로 나와 있는데 내가 나간다고 해도 잘 될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내 몫이니까. 너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만 믿고 있어. 나를 믿고 따라오기만 해줘. 반드시 너를 여왕의 권좌에 앉힐 테니까.”

마트료나는 어느새 눈을 촉촉하게 적신 눈물을 소매로 훔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를 믿을게.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그걸 원하고,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도 네가 원하는 걸 원하고 네가 믿는 걸 믿을 거야. 그럴 거야. 왜냐하면 널 믿으니까.”

“나도 널 믿어. 그리고 널 원해. 하지만 넌 나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돼. 그러기에 너는 너무 아깝거든. 그래서 난 너를 여왕으로 만들려는 거야.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프고 쓰라리지만, 내가 널 독점하는 건 그보다 더한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믿음. 굳건하지만 너무나 간단히 도망가는 한 마디. 다시 움직이는 시선. 여양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한다. 말을 하지 않고 담아두기엔 너무나 크게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내게 작은 부탁이 있어. 들어줄래? 내 작은 욕심이라고 해도 좋아. 꼭 들어줘.”

마트료나는 무슨 부탁이냐고 되묻지 못했다. 너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여양의 두 손이 마트료나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고, 서서히 목으로 올라왔고, 가늘고 부드러운 목을 쓰다듬듯 거슬러 올라가, 양 뺨을 가볍게 감싸 쥐고는, 그 자세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이마가 혹은 코가 부딪히겠다고 생각한 순간, 두 사람이 맞닿은 곳은 이마도 코도 아니었다. 입술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바람의 소리도 벌레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숨을 죽인 비상등의 깜박임과 달과 별의 숨소리만이 있었다.

여왕님은 그렇게, 자신의 첫 키스를 마트료나 M. 불가코프에게 바쳤다. 비록 마트료나의 첫 키스 상대는 그가 아니었지만 그 사실이 자신의 감정을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가벼운 충동과 욕심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상대에게 바친다는 증거로 마주 댄 입술이다. 그래서 숨소리마저 가라앉은 그 조용한 밤에, 눈을 감고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맡긴 그 모습은 마치 고결한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군주의 앞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기사처럼, 그의 어깨에 검을 얹고 자신의 기사임을 선언하는 군주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며 자신의 체온과 숨결과 마음과 영혼을 남김없이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둘의 숨결은 하나로 섞이고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서로의 영혼을 이어주리라.

그 순수하고 신실한 감정은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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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아. 아까 두 가지 조건이라고 했는데, 그럼 남은 하나는 뭐지?”

겨우 침착을 되찾은 메이브가 물었다.

“그건, 나영 선배를 죽인 범인을 찾는데 협조해줘요. 선배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여기 두 사람이죠? 뭔가 실마리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나영 선배가 쓰러졌던 곳에 가볼 생각이에요. 그 외에도 범인을 찾기 위해 최대한 협력해줬으면 합니다.”
“좋아. 화살이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생긴 상황이고, 우리 입장에서도 진범을 찾아서 잡아내는 것이 유리한 일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대신 약속대로 네가 알아낸 것 중에서 우리와 관련된 것은 빼고 금윤의 누명을 풀 정도로만 골라서 발표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상대로 이 정도의 거래를 하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왕이면 거래보다 협상이라고 표현해줬음 하네요. 그게 더 근사해 보이잖아요?”
“훗. 거래라는 말은 네가 먼저 했다는 걸 잊지 마.”
“앗, 그랬나? ……그랬구나!”

여양은 뒤늦게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참, 하나만 더하자면 앞으로 금윤 선배를 괴롭히거나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두 개라더니 몇 개까지 요구할 셈이야?”

카밀리아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요. LXG 여러분들이 그동안 벌인 일이 많으니까.”
“안 그래도 누구씨 덕분에 앞으론 자중하게 생겼어.”

카밀리아의 투덜거림에 돌로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웃음이 나오냐, 롤리타?”
“뭐 어때, 너도 인정해야지. 우리 다섯은 저 신입생에게 완전히 녹다운 당했다는 걸 말이야!”
“아니, 이건 TKO야. 우리 리더가 반박도 하지 못하고 녀석의 거래를 전부 받아들였으니.”

메이브는 빈 종이컵을 버리라고 아르진에게 반쯤 던지듯 건네고는 두 사람의 말을 자르듯 말했다.

“우린 링에도 오르기 전에 백기를 들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아이가 갖고 온 무기는 보통 무기가 아니었어.”

시선을 다시 여양에게로 향했다. 초록색 눈동자의 광채는, 여전히 미지의 공포를 주었다. 그 안에 담긴 힘을 알게 된 이상, 더더욱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임에는 분명했다.

“너도 우리와의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게. 오늘 밤의 이 대화는 비밀이고, 사건의 진상도 우리와 관련된 부분은 모두 빼줘.”
“근데 그렇게 되면 제가 알아내었다고 발표할 내용이 거의 없어지겠군요.”

왠지 말하고 나니 기운이 빠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생해서 찾아낸 진상이라고는 하지만 공개할 만한 것은 없고, 핵심 중의 핵심인 진범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아직 사건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명탐정 소리는 못 듣게 되겠지. 아쉬워? 네가 한 일을 자랑할 수 없게 되어 섭섭하니?”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과시하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택도 없죠, 명탐정이라니. 범인도 못 밝혀내는 명탐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 갈게요. 참, 외부로 공개는 하지 않겠지만 금윤 선배와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는 친구에게는 말할 거예요. 저만큼이나 믿어도 되는 아이들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그 아이인가 보구나.”

그들의 마음에 동시에 떠오른 한 소녀, 여양이 지금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 사람. 여전히 궁금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긴 해도, 지금은 이 뿌듯한 승리감에 도취된 채로 있고 싶다. 그와 함께 이 기분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럼 가볼게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그들이 늘 이렇게 밤에 모여서 논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분히 겉치레에 불과하긴 해도, 어쨌든 밤늦게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고, 팔다리가 한겨울이 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쪼그라든 폐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조금이라도 저들의 방에서 멀어지고픈 마음에 여양은 어두운 복도를 달렸다. 연한 초록빛의 비상등만 드문드문 불을 밝힌 기숙사의 복도는 차갑고 쓸쓸했다. 여양은 자력으로 끌려가듯이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문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빨리 응답이 왔다.

“왕님이니?”
“응.”

문이 열리며 파자마에 체육복 상의를 걸친 마트료나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 억지로 잠을 참아 피곤이 쌓인 얼굴은 이전보다 더 창백했다. 달빛과 비상등의 흐릿한 조명 속의 그 얼굴은 공포 영화의 유령처럼 새하얗다.
둘은 잠시 말없이 복도에 나와 등을 기대고 섰다.

“잘 되었니?”

말 안 하고 오래 버티기 시합이라도 하듯 길게 침묵하던 사이, 마트료나가 항복을 선언했다.

“응.”
“너의 추리가 맞았던 거야? 금윤 선배가 한 일이 아닌 게 맞지?”
“응.”
“메이브 선배는 네 조건을 받아들였니?”
“응.”
“잘 되었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별로 밝지가 않네?”

여전히 여양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마트료나의 표정도 조심스레 미소를 감추었다. 돌연 여양의 손이 마트료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마미,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왜, 왜? 무슨 일 있었어?”

“잘 들어. 난…… 너를…… 이 학교의 여왕으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넌 여왕이 되어줘. 나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여왕님이 되어줘.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넌 나만 믿고 따라와 줘.”
“그게 무슨……?”

둑이 터진 듯 열린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말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비누거품처럼 자유로이 흘러나와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너 초월랑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방법은 하나야. 네가 그의 뒤를 잇는 거야. 행방불명이 된 전임 여왕의 뒤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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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라고 물어봐도 될까?”

아주 조금, 호기심이 섞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지를 담은 굳은 표정을 보자 이쪽은 되레 기운이 빠지며 헛웃음이 피식 나온다.

“뭐, 네가 날 싫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어.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가 그렇게 안 되도록 막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선배에겐, 여왕의 자격이 없거든요.”

마치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판사의 목소리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말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몰래 조종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까지 이용하는 사람이 이 학교 학생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 여왕은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학생을 대표하여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교사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그런 중대한 자리를 선배에게 내줄 순 없어요.
제가 그동안 모은 증거와 증언은 LXG가 나영 선배의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놓습니다. 실제로 수수께끼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증거는 없지요. 나영 선배는 새벽 1시부터 계속 기다렸고, 2시에 카밀리아와 돌로리스 선배가 나영 선배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잖아요?”

“왓(what)!”
“뭐라고?!”

두 사람의 불만과 경악이 섞인 외침이 방해를 했으나 여양의 단호한 목소리는 끊기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정황을 보면 금윤 선배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은 거죠. 알리바이도 없고, 끈은 땅을 파고 숨겼거나 바다에 던져서 없앴을 수도 있고. 어떤가요? 저도 여러분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증거를 조작해서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아니면 최소한 여러분이 한 자살 조작만 밝혀도 LXG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겠지요.”
“원하는 게 뭐야?”

모래를 씹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밀리아가 물었다. 여양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대답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우선 메이브 선배가 여왕 선발에 나가지 않는 것. 이왕이면 직접 신문을 통해 이번 여왕 선발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게 좋겠죠. 어차피 제가 진실을 밝힌다면, 메이브 선배의 지지도는 추락하고 말겠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시신을 훼손하고 누명을 씌우려 했으니 여러분 모두 이사회로부터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겁니다. 감방에 얼마나 갇혀야 할지, 짐작도 못하겠네요. 그러니 제 제안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불명예와 고통을 받지 않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으니까요.”

LXG의 네 멤버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메이브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돌아가는 룰렛을 보듯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결국 멈춘 화살표는 꽝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한자성어가 진퇴양란이란 것인가 봐.”

여양은 그보다 사면초가 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역시 너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싶었던 거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그토록 열심히 이 사건을 조사하고 그 결과로 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여왕이 되기 위해서겠지. 너의 그 이름에 걸맞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건가?”
“아니오, 잘못 짚으셨네요. 제가 여왕이 되고 싶다면 이런 추한 길을 택하진 않겠죠. 진상을 밝히는 대신 이걸 가지고 선배와 거래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것도 목적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거라고 본다면, 저도 선배나 다를 바 없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잖아요. 방금 제가 제 입으로 선배에게 여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해놓고 저 자신도 이런 자격 없는 짓을 하고 있음을 자각한 이상, 제가 여왕이 된다는 걸 스스로가 용납할 수가 없어요.”

메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고지식한 건지 꽉 막힌 건지, 어쨌든 적당히 회유할 수 없는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멋진 연설이야. 너도 결국 빈나련인가……. 이걸로 왕당파들은 힘을 얻겠군. 이런 강력한 우군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아뇨, 또 틀리셨네요. 모든 학생들이 선배가 아니면 빈나련 선배를 지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빈나련 선배가 딱히 나쁘다거나 자격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뭐? 여왕 후보가 또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메이브도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님이 직접 여왕 후보로 나서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빈나련이 아닌 다른 인물을 지원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자신의 정보망에는 그럴 만한 인물이 따로 없을 터였다. 똑같이 1학년이면서 여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북도 정과는 앙숙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다. 도저히 떠오르는 인물도 짚이는 바도 없다.

“흠. 난 알 것도 같아.”

돌로리스가 돌연 침묵을 깼다. 혼자만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을 띄우자 여양은 그의 수수께끼와 같았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듯한 말들을 떠올렸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던 말. 그래서 돌로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선배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착하고, 그리고 여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굳이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소녀들은 차차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메랄드 아이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그날 밤 느꼈던 존재감과 박력은 역시 허상이 아니었다.
얼른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자라버렸어. 메이브는 허탈한 웃음밖에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감, 자신이 느낀 진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함께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자 메이브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과 LXG 모두를 합쳐도 그 둘에게는 이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감이 얼마나 정확한지 재확인하는 것은 좋았으나, 나쁜 예감마저 적중하는 것은 기분 좋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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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젠 메이브 선배가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밤중에 나영 선배를 부른 이유가 뭐죠? 선배의 죽음을 자살로 은폐하려던 이유는요? 혹시 이사회의 대응에 대해서도 짐작가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메이브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컵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곤 빈 종이컵을 돌로리스에게 내밀었다. 돌로리스가 병을 들고 술을 따랐다. 그걸 바라보며 메이브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한 건 원나영이 아니라 길금윤이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여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초록빛 눈동자가 알콜 덕분인지 조금 흐릿하게 보였다.

“길금윤을 몰래 만나기 위해 원나영을 잠시 밖으로 내보낸 것일 뿐이지. 하지만 그가 죽어 있는 걸 알고는 우리도 정말 놀랐어. 하지만 우린 이걸 이용하기로 했지.
그렇지만 금윤의 손에 끈을 쥐어놓는다든가 하는 식은 너무 유치했어. 주위 사람들도 믿어주지 않을 테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의심스러운 자살을 꾸민다는 작전이지. 마치 누군가가 죽여 놓고 어설프게 자살로 위장한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야. 짧고 두꺼운 커튼으로 목을 매어 놓은 것도 그런 이유야.
하지만 창문 밖으로 삐져나왔는지는 몰랐어. 그런 걸 발견하다니 제법 날카로운데?”

여양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건 체링이 발견하여 지적한 것이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얼마든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도록 놔두었다. 그게 실토하게끔 유도하는데 효과적일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금윤을 괴롭힌 이유는 따로 있어.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지. 우리의 진짜 목적은 초월랑이니까.”

초월랑?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마트료나가 만났다는 인물, 전임 여왕. 졸업식 날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람.
그런데 돌연 마트료나의 앞에 배를 타고 나타났다 감쪽같이 사라졌고, 금윤이 월랑을 만나고 싶다며 마미의 목을 향해 나이프를 들이대었던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 제공자. 그렇지만 그 모든 것보다 마트료나가 잠깐 만났을 뿐인데도 잊지 못하고 몇 번이나 들먹여 여양의 마음을 헝클어놓았다는 점에서, 마음 한 구석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는 인물. 왜 여기서 그의 이름이 나온 걸까.
처음으로 여양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떠오르자 메이브의 표정엔 대조적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도 알고 있는 이름이겠지? 마트료나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테니까.”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다니, 혹시 정말 저 에메랄드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얘기한 것, 조금 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 다만 여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히 신문부나 방송부 같이 귀찮은 애들에게는 말야.”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브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 목적은 초월랑을 제거하는 거야. 길금윤은 그러기 위해서 심어놓았던 미끼이고. 초월랑이 왜 사라졌다고 생각해? 그는 분명 여왕 자리를 내놓기 싫은 거야. 졸업식에 불참하고 이 섬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게 그 증거이지. 교칙에 의하면 여왕은 전임이 졸업을 하여 공석이 된 이후 선발하도록 되어 있어.
그런데 전임 여왕이 졸업을 거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여왕을 뽑을 근거가 없어지는 셈 아니겠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아무 접점이 없는, 월랑에게 목을 매다는 아이 중에서 하나를 골랐어. 그게 바로 길금윤이야. 내가 가진 에메랄드 아이의 힘으로 걔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었지. ‘초월랑을 만나면 숨겨 두었던 칼로 찔러라’라고 말이야.”

주위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 했다. 역시 에메랄드 아이에겐 숨겨진 힘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도 놀랍지만, 같은 학교 학생을 찌르도록 조종했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그 비정함에 숨이 막혔다.

“나중에 금윤에게 슬쩍 물어봐. 그때 나이프는 어디에서 났냐고.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무의식 단계에 묻어 놓은 지령이니까. 금윤은 항상 나이프를 옷 안에 감춰놓고 다니면서도 나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긴 해도,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전 네 친구를 공격한 건 일종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월랑을 만나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일으킨 실수지. 유감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이사회에 대해서 억측은 하지 말아줘. 우리도 이사회의 생각이나 목적은 전혀 몰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싶은 게 이사회의 꿍꿍이거든.
이 학교를 지배하기 위해선 언젠가 이사회와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올 텐데, LXG는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조직인 셈이지. 지금은 비록 유학생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권좌에 오르더라도 우리 멤버만으로 학생회를 꾸밀 생각은 없어. 우수한 인재라면 누구든 받아들일 생각이거든. 바로 너 같은 아이 말이야.”

이젠 갑자기 회유책으로 나오는 걸까. 여양은 이사회 이상으로 메이브의 꿍꿍이속이 궁금했다. 전임 여왕을 비밀리에 제거하려는 무서운 계획을 털어놓은 이유가 자신을 믿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한통속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아닐까. 사람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한 에메랄드 아이라면 불가능한 생각도 아니다. 그렇기에 메이브는 저토록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치 연기를 하듯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브 선배는, 여왕이 될 수 없어요. 아니 되어서는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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