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의 일정이 끝난 금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3월이 끝나고 봄이 개화하는 남해는 이미 은혜로운 따스한 햇살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들 음료수 캔을 들고 재잘거리며 즐거운 하굣길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여양은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모든 일은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해결된 문제는 없었다. 금윤의 혐의를 벗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진범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밤 이후부터 3일 연속 교내신문은 특종으로 가득했고 학생들은 소문에 파묻혀 허우적거렸다. 다음날 메이브는 약속대로 직접 신문부를 찾아가서 여왕 선발에 나가지 않을 것을 밝혔고 그 즉시 신문 1면 전체를 차지하는 중대 기사로 실리며 전교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후보 등록 이전부터 굳어져 있던 양강구도가 일시에 무너지자 메이브를 지지하던 이들의 충격과 혼란은 상당했다. 자연히 왕당파가 힘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에 반발하던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현상이 빈나련 이외의 후보들에게는 기존 메이브가 가진 막강한 지지 세력을 모아서 흡수할 수만 있다면 지지도를 일거에 급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메이브의 미모와 카리스마가 학생들에게 일종의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왔고 외국 유학생이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오는 인기도 큰 지지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든 후보들의 세력 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은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날엔 여양 자신이 교장의 대리인으로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원나영이 새벽 1시에 기숙사를 나가서 산책을 하던 중 살해되었고, 범인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시신을 갖고 들어와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LXG 일원의 이름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전날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사회에선 이미 자살로 발표했고 부모님이 와서 시신을 인수해간 후였다. 여전히 영화궁은 남자의 접근을 막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바람에 배에서 내리려는 나영의 아버지와 이를 막는 직원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씁쓸한 뒷이야기를 남긴 채로 말이다.
그렇게 사건을 일단락 했다고 여긴 상태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고 결국 경찰 수사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이에 덧붙여 여양은 인터뷰를 통해 지난번 승미와 의견 일치를 본 문제를 언급했다.
전날 메이브가 후보 사퇴를 밝히면서 초월랑이 졸업을 하지 않아 새 여왕 선출이 불가능하며 그는 이사회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 데 이어서, 여양은 금윤이 받은 고통을 예로 들며 학생을 감옥에 가두는 비인권적인 처벌을 하는 현재의 상황을 외부로 알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이사회의 시정과 원나영 사건을 경찰에 신고할 것을 요구하며 이사회를 거듭 압박했다.
일순 궁지에 몰린 듯 보였지만 다음날 이사회는 대변인격인 교무주임을 통해 초월랑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학적상으로는 졸업을 한 것으로 처리되어 문제가 없고 여왕의 증표[여왕으로 선출된 이가 받는 세 개의 장신구로 망토, 왕관 모양 뱃지, 홀(笏)을 말한다]도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고 반박했고, 새로운 결과에 대해서는 학생 개인의 조사일 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만을 거듭했다. 학생들의 이사회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지만 그들은 눈도 꿈적하지 않은 듯 보였다.
여양은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바로 새 여왕이 선출될 때까지 말이다. 지금의 자신에겐 아무런 힘도 없고, 이사회와 접촉할 수단도 방법도 없다. 학생 중에서 이사회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징벌방에 감금되기 위해 지하로 끌려가는 걸 제외한다면 여왕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한 세 번째 특종이 바로 여왕님의 신문 발표문이다. 스스로 여왕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으니 앞으로는 후보로 거론하지 말아줄 것, 대신 곧 선거활동을 시작할 마트료나 후보를 지지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나이프 사건’의 인질로 얼굴은 알려져 있었으나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1학년생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선거 정국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졌다. 더구나 메이브의 낙마로 늘어난 부동층이 주목하던 후보 중 하나였던 여왕님이 자기 대신 밀어준다는 참신한 후보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다음 주에 발표되는 지지도 순위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두각을 나타낸 후보에게 부동층의 쏠림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음 주부턴 우리도 선거 운동 뛰어줄 테니 걱정 마!"
지란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트료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실어준다는 것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지만, 노혜는 지란이 과연 도움이 되어줄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내가 못 미덥다 이거야? 영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데?"
"앗, 아, 아냐. 난 그저……"
"그래, 나보단 네가 더 도움이 되겠지! 가슴이 확 트인 옷을 입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거야. 남녀공학이었으면 남자애들이 줄을 서서 받아갔을 텐데 참 아쉽네!"
그렇게 말하면서 남의 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어 움켜쥔다. 하지만 손아귀에 넣기에는 너무 커서 그저 손을 얹기만 할 뿐이었다.
"아악!"
"이 기분 좋다는 감탄사하며! 역시 넌 내가 만져줄 때 제일 기뻐하는 것 같아, 으흐흐!"
지란은 노혜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뒤틀자 더 신이 나서 손을 움직였다. 그 서슬에 책을 읽으며 뒤따라오던 체링이 노혜의 등에 부딪혀 비틀거렸지만 지란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체링은 못 봐주겠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책등이 파란, 앞장에 손가락 끝이 그려진 하얀 문고본을 주머니에 넣고 마트료나와 힘을 합쳐 둘을 떼어놓기 위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이 그 소란을 벌이는 동안에도, 여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될 선거전. 선거 전략이며 연설이며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걷던 도중 문득 자신의 앞을 걸어가는 여학생의 모습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싶었는데 기억이 되살아났다.
CCTV의 영상, 밤 12시 이후로 나간 모습이 없는데도 새벽 6시 이후에 기숙사로 들어온 모습만 찍혔던,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의 소녀.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인데, 왼손을 다쳤는지 붕대를 매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탄력이 있어 보이는 붕대. 여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빨리 하며 접근하고 있었고, 주위의 눈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그 소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이미 소녀의 왼쪽 손등과 손목을 거쳐 팔꿈치 아래쪽까지를 덮고 있는 붕대에 꽂혀진 채였다. 그래, 이 정도 너비라면 딱 맞겠어……. 여양의 뇌리에 원나영의 목에 난 이중의 자국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가상의 영상이 흘렀다. 목의 상처 위에 저 붕대를 얹어본다. 한 바퀴 감아본다. 딱 들어맞는다. 붕대의 양끝을 잡아당기는 작지만 억센 손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소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등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언젠가 식당에서 보았던, 화상을 당해서 머리로 얼굴을 가렸다는 그 아이였다. 자신과 같은 1학년생이라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신문부의 승미가 말해준 덕분에 그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왼손도 화상으로 다친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는 그날 밤의 일이 더 궁금했다. 밤새 어디에 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것일까.
그걸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커먼 장막으로 가려진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혐오감과 공포감을 자아내었다. 그때 느낀 충격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왜 이 아이를 봤을 때 그렇게 놀랐는지, 그리고 지금도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이성을 초월한, 좀 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검은 커튼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직 코끝과 입술의 일부, 그리고 왼쪽 눈뿐이었다. 오른쪽 얼굴의 반 정도는 왼손과 마찬가지로 붕대로 감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왼쪽 눈이 여양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메이브나 돌로리스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 끝이 저렸다.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어.’
입이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그 입이 당장 좌우로 죽 갈라지며 상어의 것과 같은 송곳니를 드러낼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건넨 한 마디.
"오랜만이야."
그 말만 남긴 채 석상처럼 굳어진 여양을 남겨두고 소녀는 유유히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고가 정지한 듯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여양은 두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하다니, 이상했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자신은 그를 알고 있고, 그도 자신을 알고 있다. 둘은 언젠가 만났던 사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상대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말은 여양 자신이 무심코 꺼낸 말을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잘 있었니?’
갈색 벽돌로 몸을 감싼 기숙사 건물을 보며 떠올린 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연스레 속으로 중얼거린 한 마디. 처음 간 장소에서 처음 본 건물을 보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양은 분명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양은 자신이 이곳을 알고 있고, 머리카락과 붕대로 얼굴을 가린 그 소녀를 알고 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서운 무언가가 혀를 날름거리며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알고 있어, 라고.
"왜 그래? 쟤랑 아는 사이야?"
지란이 아무 생각없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으나 여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보여준 한쪽 눈, 살짝 드러낸 이빨, 낮게 속삭인 듯한 한 마디 말이 마력을 발휘하여 석상으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이.
차가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작은 얼음 조각들이 몸 구석구석을 훑은 것만 같아서, 여양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떨고 있었다. 계절은 이제 완연한 봄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직 차가운 서리가 걷히지 않은 채였다.
-1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