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는 넷이서 잡담을 하며 놀다가 지란이 들어오자마자 마트료나를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그를 사이에 두고 여양과 지란의 한 판 레슬링이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이좋게 나눠 가지기로 합의했다.

“그럼 마미의 상반신은 내 거야!”

지란이 음흉하게 외치며 뒤에서 마트료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야, 그럼 나는 하반신만으로 만족하라고?”

여양이 툴툴대자 지란은 하반신이 진짜배기라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양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둘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배를 하는 동안에 마트료나는 놔달라며 무력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슬프고 괴롭고 우울한 하루였지만 마지막에 웃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금윤은 생각했다.

그만 갈게, 가볍게 말하고 일어난 금윤을 여양이 불러 세웠다.

“선배, 그 방에 있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금윤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솔직히 무서워. 하지만 내가 그 방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아이를 홀로 버려두는 것만 같이 여겨져서.”

모두들 잠시 말을 잃었다.

“무섭거나 쓸쓸해지면 언제든 오세요.”
“그럼 여양은 나랑 같이 자는 거야?”

갑자기 지란이 눈에서 불을 켜고 달라붙었다. 여양은 날아드는 모기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누가 너 같은 변태랑! 선배는 내 침대에서 함께 자면 돼.”
“흥. 너도 위험해. 차라리 선배가 나랑 자요. 안 잡아먹을 게.”
“네가 그렇게 말하면 더 불안하다!”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동안에 금윤은 재차 작별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갔다. 간신히 두 사람의 마수에서 벗어난 마트료나도 체링을 앞세워 도망가듯 나가고 둘만 남았다.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지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들 갔네.”
“그래, 갔다.”
“여양아~ 역시 너밖에 없어. 내 곁에 남은 건 너뿐이야.”

돌연 칭얼대며 안기자 여양은 당황하며 발로 밀어냈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난 잘 거야! 참, 숙제할 거 가지고 왔는데? 나 숙제해야 해, 비켜!”
“쯧쯧. 그러게 숙제는 나처럼 학교에서 해결하고 와야지.”

의외다 싶어서 쳐다보니 지란은 약 올리려는 듯 혀를 내민다.

“난 반 친구들이랑 숙제 같이 하기 모임을 만들었지롱. 수업 끝나고 다 같이 모여서 파트를 나눠서 각자 한 다음에 합쳐서 베끼는 거야. 특히 수학 숙제가 하기 딱 좋지.”
“기가 차네, 기가 차.”

어처구니없어서 내뱉은 말을 지란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감고 턱을 치켜들며 뻐기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숙제 품앗이라고나 할까?”

여양은 혀를 내두르며 자기 책상으로 가서 참고서와 공책을 펼쳤다. 책을 파는 서점은 매점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문제집과 참고서는 선배들이 썼던 헌책도 있었다. 참고서의 경우는 단순히 가격이 싸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부분이 체크되어 있어서 중고가 인기가 많았다. 여양은 그 사실을 모르고 단지 가격만 보고 헌책을 샀다가 만족하는 중이었다.
전에 쓰던 선배는 친절하게도 시험에 나왔던 부분까지 체크를 해서 고마웠다. 책의 옆면과 뒷면에는 색볼펜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문자를 적어놓았는데 여양은 생전 처음 보는 글자여서 알 수가 없었다. 뒷면에 적혀 있는 그 글자 아래에는 아마도 발음으로 보이는 한글이 있어 읽을 수 있었다.

「1학년 6반 레 홍 뀐」

아무래도 유학생인 모양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궁금했다. 책의 발행일을 보니 지금 3학년일 테고, 6반이라면 예과이니 반이 바뀔 일은 없을 테니 현재 3학년 6반일 것이다. 여양은 실습 시간 같은 때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양이 숙제를 하는 동안 지란은 침대에 엎드려서 학생수첩으로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숙제를 마친 여양은 이불을 덮어준 다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턴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각오를 하거나 긴장을 하는 건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여양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보았던 혼이 빠진 듯한 금윤의 젖은 얼굴과 꿈을 꾸는 듯 황홀한 마트료나의 표정이 망막 안에 인화된 듯 사라지지도 않고 거듭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깝게 나타나는 한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죽은 원나영의 모습이었다.

나영의 수줍게 웃는 얼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머리카락에 매달려 반짝이던 머리핀에 달린 액세서리들은 영화궁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하게 반짝였다. 그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나영이라는 사람은, 불과 며칠 전에 만나서 얘기를 나눴던 그 존재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새삼 여양은 죽음이라는 게 이토록 갑작스럽고 허무한 것임을 실감했다. 같이 숨쉬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걸 바라보고, 함께 울고 웃던 한 존재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남겨둔 이야기들, 못다 한 이야기들, 언젠가 할지도 모를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겨둔 채. 그 태어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 꽃처럼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날까지 작은 씨앗들은 어쩌면 저 하늘 위 구름 너머, 어쩌면 저 검푸른 바다 밑바닥, 아니면 저 별들 속에서 웅크린 채 길고 긴 잠을 자고 있으리라.

여양도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되어 천천히 잠의 세계로 가라앉았다. 바다 위의 밤은 더 길고 고요했다.

(제6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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