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은 한숨을 쉬고 유리문 옆에 있는 자판기로 가서 수첩을 찍어서 계산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뽑아 손에 들었다. 역전 광장의 비둘기 떼처럼 모여 있는 저 아이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누가 지나가다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체링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 체링아, 오랜만이야.”
“안녕. 오랜만이에요.”
“정말 요즘 통 얼굴도 못 보네?”
“난 시간이 나면 늘 도서관에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벌써 손에 책을 세 권이나 들고 있었다. 하얀색도 있고 검은색도 있고, 책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여양에게는 그저 신기할 뿐.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체링이 책 하나를 들어서 보여줬다. 새하얀 표지에 제목과 지은이가 작은 글자로 적혀 있을 뿐인 지극히 소박한 표지였다.

“어쩐지 여기에 오니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아서 빌렸어요.”
“『여자만의 나라』? 정말 그렇네. 여기는 여자밖에 없는 학교니까.”
“섬 전체가 폐쇄되어 여자만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학교도 헐랜드(Herland)와 비슷하긴 하죠. 근데 이 책 속의 나라는 더 대단해요. 처녀생식으로 여성들만의 생존이 가능해진 거죠.”
“그래? 그거 대단한데.”

“다 읽으면 빌려줄게요. 아직 반납기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고마워. 근데 그건 그렇고, 사실 난 학교 신문을 보려고 왔는데……”
“아, 오늘 나온 거요? 이상하게 인기가 있던데요.”
“아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사건에 대해 알고 싶은 거겠지.”
“그럼 날 따라와요.”

돌연 체링이 손짓을 해서 영문도 모른 채 계단을 타고 3층 열람실으로 올라갔다. 구석 자리에 책을 쌓아 놓고 젠가(Jenga)라도 하려는 듯한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체링이 찜해놓은 곳이었다. 이제는 아주 개인 전용석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체링은 책 무더기 속으로 손을 쓱 집어넣더니 학교 신문을 몇 부 꺼내었다.

“음…… 오늘자가…… 이거예요.”
“어! 이거 어디서 났어?!”
“아침에 한 부 가져왔어요. 신문을 모으고 있거든요. 삼 년동안 모으면 꽤 많겠지만, 졸업할 때 기념으로 갖고 가려고요.”
“대단하다, 신문 모을 생각을 다 하고. 덕분에 이렇게 보게 되었네.”
“필요하면 복사기에서 복사를 해요. 제가 모아야 하니까 드릴 수는 없어요.”

여양은 애타게 찾던 걸 쉽게 손에 넣게 되자 헤벌쭉 웃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체링을 다짜고짜 껴안고 뺨을 비볐다. 갓 구운 빵처럼 체링의 뺨은 탐스러운 갈색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 이런 귀염둥이 같으니!”

숨이 막힌다며 콜록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양은 포옹을 풀지 않았다. 체링의 키가 작아서 여양의 품속에 쏙 들어간 느낌인데 너무 말라서 당장이라도 툭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여양은 왠지 체링에게서 그리운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체링아, 너한테서 할머니 냄새가 나.”
“할머니 냄새? 그거 좋은 건가요?”
“응……. 좋긴 한데, 솔직히 여고생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 미안해, 헤헷.”
“제가 할머니의 팔찌를 끼고 있어서 그런가 보죠? 난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아냐, 아냐.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겨우 포옹을 풀고 오늘자 학교 신문을 펼쳤다. 역시나 1면부터 대문짝만 하게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현장을 찍은 사진이라며 실린 것은 나영과 금윤의 방문을 찍어놓은 것 뿐. 그 밑에는 경비 직원의 제지로 내부 촬영에 실패했다고 적혀 있었다.

우선 사건의 개요를 읽어보았다. 토요일 아침 7시 40분, 길금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룸메이트 원나영이 창가에 목을 매단 채로 매달려 있었다. 두 장의 커튼 중에서 하나를 뜯어서 창문 위에 설치한, 커튼을 고정하는 봉에 묶은 것이다. 기숙사의 천장과 마찬가지로 창문의 높이도 낮은 편이라 커튼 봉의 높이는 2미터도 되지 않아서 발견 당시 나영의 몸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발등이 바닥에 닿은 상태였다. 옷차림은 파자마 상태였고 안경이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금윤은 발견 즉시 파자마 차림으로 1층 경비실로 뛰어 내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경비 직원은 당직 교사와 이사회에게 보고를 한 후 즉시 달려가 평소에 지시받은 대로 현장 사진을 서너 장 찍은 후 커튼을 풀어 시신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임을 확인했다.
약 십 분 후 의사인 감지민이 간호원 및 경비 직원들과 함께 도착, 시신을 들것에 싣고 병원으로 운반했다. 경비직원들은 호기심에 몰려든 학생들의 접근을 통제했다. 신문부 기자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등교 도중 혹은 자기 방에서 취재를 위해 달려왔으나 일체의 사진 촬영 및 취재를 거부당했다.

신문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덕분에 배포가 평소보다 조금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나온 즉시 동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원래부터 인기가 없어서 소량만 찍었던 게 원인이기도 했지만.
듣기로는 기사를 더 써서 내일쯤 호외를 찍을 예정이라고 하니 더 자세한 소식은 그때쯤에나 알 수 있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화제의 중심이 되고 만 길금윤을 여러 차례 만나 상세히 물어보겠다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보니 기분이 착찹했다.

원래 길금윤은 나이프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비인간적인 처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생각이었고 기자인 제갈승미도 이에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며칠만에 극적으로 입장이 바뀌어서 자살 사건에 대한 목격자이자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며, 인터뷰 또한 자살 사건에 대한 것으로 바뀌고 만 것이었다.

여양은 신문을 책상 위에 떨어뜨리듯 놓고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앞이 막막하고 정신이 멍해졌다.

“아는 사이였죠, 길금윤이라는 선배와.”

체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원나영 선배도 만난 적이 있어.”

그것도 자살하기 전날에. 여양은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상인 것만 같았다. 나이프 사건으로 고초를 겪다 풀려난 날, 반갑게 재회했던 룸메이트가 그 다음날 목을 매달았다니.
그날 밤은 마트료나가 유학생들에게 끌려가 험한 꼴을 당했고 여양 자신이 직접 데리고 오기도 했던 날이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그 밤사이에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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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깊숙이 퍼져나갔다. 여고생들 사이에서 비밀이라는 낱말은 그리 큰 의미도 강한 구속력도 가지지 못한 허울에 불과했다. ‘이건 비밀이야’, ‘너에게만 하는 얘긴데……’,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같은 머리말을 달고 시작하는 비밀 이야기들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소녀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없는 고립된 세상에서 그들은 고전적인 방식인 밀담(주로 교실과 식당의 구석자리와 화장실과 기숙사 뒤뜰에서 벌어지는)과 쪽지(읽고는 바로 찢어서 버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에 의존했다.
교내에 비치된 학습용 컴퓨터와 학생수첩을 통해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는 있지만 공개된 게시판에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저 소문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있었으나, 쉬쉬 하는 은밀한 분위기를 금세 눈치 채고는 꼬리를 감추며 말을 흐리기 일쑤였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아주 짧고 간단명료했다. 「자살했다던 원나영은 실은 살해되었다. 그 범인은 바로 룸메이트이자 나이프 사건을 일으킨 길금윤이다.」
그렇다면 왜 소녀들은 이러한 의혹을 겉으로 드러내어 사실여부를 명확히 밝히자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폐쇄된 사회를 지배하는 이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에서 기인한다.

우선 이사회는 이 사건에 대해 경찰에 신고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스스로 처리하여 해결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개교 이래 한 번도 외부인(즉 남성)을 교내로 들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러하겠다는 이사회의 뜻에 다른 것인데, 가족의 면회나 취재 및 인터뷰, 외부 강사 초청, 졸업식 등의 행사를 위해 교내로 들어온 소수의 외부인도 전원 여성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자의 비율이 높은 경찰의 진입을 거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만약 경찰측에서 학교의 방침을 이해하여 여경만을 보내겠다고 해도 거부하겠다는 말인지, 그에 대한 이사회의 입장은 밝혀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질문을 감히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동안 이사회의 이러한 방침에 반발한 학생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학교가 물리적으로도 폐쇄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모든 통신망마저 장악되어 있음을 알고는 무력함을 깨달으며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실감하는 예정된 결말을 맞곤 했다.
설치된 모든 전화는 내선으로 이어져 있어 심지어 119를 눌러도 교내의 경비실로 연결이 된다(이것이 법을 위반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무시당했다). 인터넷은 오직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그것도 실시간 감시(어떤 웹사이트에 접속했는가는 기본이고 키보드로 입력한 글자까지 전부 기록되는데, 역시 이것이 보안상 문제가 있다는 항의는 가볍게 무시당했다)가 되고 있는 소수의 컴퓨터를 통해서만 이용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딴짓’을 못하게 하려고 철저하게 통제된 상태였기에 학생들은 자기 미니홈피에 몰래 접속만 해도 경고창이 뜨는 것을 보고 질색을 하곤 했다.

학교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사건이 일어난지 사흘이 지난 월요일, 이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으면서도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사회에선 덮어두려 하고, 교사들은 수수방관이니 학생들은 마음껏 추측과 의심과 억측과 오해를 잔뜩 뭉쳐서 눈싸움을 하듯 사방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눈덩이에 얻어맞는 것은 오직 한 사람,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있는 길금윤이었다.

도서관의 1층 로비에는 신문을 철해놓고 있어 무료로 볼 수 있었다. 교사들을 위해 교무실로, 직원용으로 직원 휴게실과 경비실로 배달되는 분량 등을 제외하면 사실 학생들이 신문을 볼 수 있는 공간은 도서관이 유일했다.

몇 대 되지 않는 TV와 함께 섬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신문이지만, 지리적 특성상 아침에 발간되는 일간신문은 저녁때에나 볼 수가 있었다. 식재료 등의 물품을 배달하는 선박이 토,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하루에 한 번 오는데, 주로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오기 때문에 그때 신문이 같이 도착하는 것이다.
그마저도 입수가 쉽지 않은 신문은 며칠 밀려서 한꺼번에 오기도 하는 등 수급이 원활하지 않는 상태였다. 영화궁 고등학교는 약 열 종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지만 매일 오는 것은 절반 정도였고 그 외에는 이삼일 치를 몰아서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월요일 오후에 도서관에 가도 원하는 신문을 볼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지만 여양이 지금 보려고 하는 신문은 다름 아닌 학교 신문이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없었다. 영화궁 고등학교의 학교 신문은 신문부 주임 교사가 발행인 자격이고 신문부 학생들이 취재 및 기사의 편집을 도맡아서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학교에 큰 사건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호외를 발간하고 있으며, 문예부와 합동으로 문집, 행사 안내 책자 등을 만들기도 하고 취재에는 방송부 등 다른 부서와 협력하기도 한다. 기사의 편집 및 칼럼 등에 있어서는 학생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사실 신문부는 학생회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클럽으로 학생회 회의에 참여하여 회의록 작성 및 결과보고에 대한 협력을 하고 신문지상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듯 학교 신문이 단순히 학생들의 클럽 활동일 뿐만 아니라 학교의 공식적인 보도 매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번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을 접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 사건에 대한 관심사가 얼마나 폭발적인지 알 수 있는 증거로 오늘 나온 신문은 나온지 반나절도 안 되어 씨가 마른 듯 자취를 감춰서 찾을 수가 없었다. 보통은 인기가 없어서 교사(敎舍) 1층 로비와 식당, 기숙사 입구에 설치한 배포대에 1주일 내내 먼지를 덮으며 색이 바랜 채 쌓여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여양은 신문이 남아 있는 마지막 장소인 도서관에 온 것이다. 신문부원과 면식이 있다는 이유로 찾아가서 남은 게 있으면 달라고 부탁할까 생각도 했지만 인터뷰를 거절했던 주제에 너무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막상 오니 그런 생각이 도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벌써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서 신문을 펼쳐 놓고 마구 떠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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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The Hanged Girl(목 매단 소녀)


(차임벨 소리)

마경 _ 영화궁 고등학교!

마경,익희 _ (동시에) 방과후 교내방송!

(시그널 음악)

마경 _ 학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2학년 1반 마경입니다.

익희 _ 안녕하세요. 1학년 3반 오익희입니다.

마경 _ 오늘은 한 주의 시작을 맞이하는 월요일입니다. 이번 주도 열심히 공부하며 밝고 힘차게 지내도록 합시다. ……라고 대본에 써있지만 말이지, 나 지금 졸려 죽겠어.

익희 _ (작은 목소리로) 언니, 생방송 중이에요! 파이팅!

마경 _ 아무래도 월요병인가봐. 오늘 아침에도 너무 늦게 일어나서 지각할 뻔했어.

익희 _ 제가 기숙사 현관에서 기다리다 안 내려오셔서 결국 깨우러 올라갔잖아요.

마경 _ 우리 잇키~의 깨워주는 방법이 안 좋아서 늦게 일어난 거야.

익희 _ 예? 갑자기 제 잘못이 되는 건가요? 덕분에 저도 지각 직전에 겨우 교실에 들어갔는 걸요. 언니가 도통 안 일어나니까…….

마경 _ 그럴 땐 귓가에 대고 ‘얼른 안 일어나면 키스해버릴 거예요 우훗♡’이라고 속삭여줘야지.

익희 _ 그런 창피한 말을 어떻게 해요! 게다가 무슨 만화도 아니고요…….

마경 _ 세상에! 우리의 관계가 고작 이거밖에 안 돼?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아흐흑 (과장된 울음소리)

익희 _ 언니, 장난은 그만하면 됐으니까 본론으로 가주실래요?

마경 _ 거 봐! 장난이래! 역시 장난이었어! 잇키는 날 그저 갖고 논 거였어! 흐윽흐윽흐윽.

익희 _ (헛기침)

마경 _ 실은 내가 마법에 걸린 날이어서 기운이 없어서 그랬어. 생리통이 좀 심한 편이거든.

익희 _ 갑자기 정색하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이거 전교생이 다 듣는다고요!

마경 _ 괜찮아. 여긴 여자밖에 없잖니. 학생도 선생님도 매점 아줌마도 전부 여자들. 그 아마존에 있다는 나라 같지 않니?

익희 _ 그, 글쎄요.

마경 _ 그나저나 내 룸메 공양이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가버린 거 아니겠니! 이 배신자! 내가 누구 땜에 방송부 들어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익희 _ 두 분은 참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하하. (당황을 감추기 위한 어색한 웃음)

마경 _ 오늘 수학시간에 졸다가 선생님한테 들켜서 혼나기도 했지,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너무 안 좋아. 방에서 요양을 해야겠어. 방송은 그냥 네가 하렴.

익희 _ 언니. 선배니임! (한숨) 여러분, 선배님은 지금 책상에 엎드려서 진행을 포기하고 계십니다. 아, 지금 고개를 드시네요. ……하품을 하셨습니다. 헤드폰을 벗고, 본격적으로 엎드려 주무실 포즈를 취하고 계시네요.

마경 _ (엎드린 채로) 나 자는 거 중계하는 거니?

익희 _ 아하하, 이거 참 난처하네요. 별 수 없이, 일단 기운을 차리실 때까지 저 혼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사건들이 좀 많이 있었어요. 오늘 발행된 영화궁 교내신문이 지금 여기 준비되어 있으니 소개해 드릴게요. 일단 여왕후보 지지도 순위가 나왔습니다. 약 2주간 17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고요, 여러 날에 걸쳐 무기명으로 조사를 해서 동일한 사람이 복수 응답을 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유의해달라고 적혀 있네요. 신문을 갖고 계신 분은 직접 보시는 게 더 빠르겠지만요, 일단 제가 읽어드릴게요. 우선 지지율을 보면,
    빈나련 31.5%
    메이브 23%
    여왕님 11%
    북도정 9.3%
    기타 및 무응답 25.2%

익희 _ 2주 전 순위와 비교하면 빈나련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했고 메이브와 북도정 후보의 지지율이 소폭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타나 응답 없음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고요. 그 다음에 1면에 실린 내용이…… 네, 다 아시겠지만, 2학년 원나영 학우가……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죠.

마경 _ 하지만 소문 들었니? 그게 실은 자살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어!

익희 _ 깜짝이야. 언니 깨셨어요?

마경 _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귀가 쫑긋 섰는 걸. 후후.

익희 _ 그치만 그 얘기는 여기서 하기가 좀 그런데요. 그냥 떠도는 소문 아닌가요?

마경 _ 왜 학교마다 그런 이야기 있잖아. 여고 괴담 같은 거?

익희 _ 네? 무, 무서운 이야기인가요?

마경 _ 어머나, 겁 먹었니?

익희 _ 거, 겁을 먹긴요? 누가!

마경 _ 우리 학교는 7년밖에 안 되어서 별로 괴담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는데, 근데 있더라고.

익희 _ 저저저정말요?

마경 _ 여기는 사방이 바다잖니? 그래서 바다에 빠져서 행방불명된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타나선……

익희 _ 악! 잠깐만요! 방송실 불이……!

마경 _ 공양, 굿 잡(Good job). 참고로 방금 디렉터 공양이 불을 껐답니다. 평소 똑부러지는 우리 익희양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귀엽네요. (웃음)

익희 _ 아니 언니, 지금 장난치실 때가 아니라고요! 사람이 죽었다는데…….

마경 _ 그래서 말이지, 우리 학교에 실은 옛날에 목을 매고 죽은 학생이 있었대. 근데 그 후로 그 학생의 유령을 봤다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진 거야. 그래서 영혼을 달래준다고 목을 매단 인형을 만들어서 그 방에 걸어 놓고 제사를 지냈더니 그 후로 안 나타나더래. 그 이후로 특활부 선배들이 신입생들 환영식으로 목 매단 인형을 몰래 밤중에 방에 걸어놓고 아침에 일어날 때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장난이 유행했대.

익희 _ 왠지 전 처음 듣는 얘기네요.

마경 _ 우리 방송부는 그런 거 안 하니까. 이 참에 해볼까?

익희 _ 전 이미 들었으니까 하나도 안 무서워요!

마경 _ 흐흥. 어떨까나~?

익희 _ 왜, 그, 그런 눈으로 절 보세욧!

마경 _ 으흐흐흐. (음산한 웃음)

익희 _ 다음! 다음 소식! 나이프 사건을 일으켰던 길금윤 학우가 징벌방에서 풀려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하필 그 자살한 원나영 학우의 룸메이트였다고 하네요.

마경 _ 기숙사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금윤이 발견을 했다는 거야.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천장에 매달린……

익희 _ 으아아! (기겁을 함)

마경 _ 사실은 내가 말한 소문도 이것 때문에 생긴 거야. 이게 우연인지 어떤지.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뭐랄까…… 이상한 일이지 않니?

익희 _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만 아직 분명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괜히 이런 데서 섣불리 추측을 했다가 교내로 퍼지면 곤란하니까 더 얘기하지 말기로 해요.

마경 _ 할 수 없지. 아무튼 학우 여러분, 이 일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거나 제보할 것이 있는 분은 언제든지 편지를 보내주세요. 방송실 앞에 있는 우편함에 넣어도 좋고, 학교 인트라넷에 있는 방송부 게시판에 쓰셔도 좋고, 저한테 직접 주셔도 좋습니다. 익명 가능!

익희 _ 직접 와서 주는 건 익명이 아니죠…….

마경 _ 본명이든 익명이든 관계없다는 의미야. (웃음)

익희 _ 언니의 방송이 마경(魔境)이라고 불렸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한숨) 그러면 학우들로부터 온 편지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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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그 순간을 방해한 것은 나지막한 노크 소리였다. 하지만 모두들 비상경보라도 울린 듯 행동을 멈추고 초조한 얼굴들을 마주보았다. 메이브는 턱짓으로 카밀리아에게 가보라는 지시를 했고, 그는 말없이 안경을 고쳐 쓰며 방문 앞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누구……?”
“여왕님이라고 합니다. 열어주시죠.”

일부러 크게 낸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카밀리아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자 메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어주자 여왕님이 역시 파자마 차림으로 서있었다. 조금 떨어진 뒤에는 나즐리가 파자마 위에 히잡을 덮어쓰고 목을 뻗어 안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유명하신 여왕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지?”

메이브가 약간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을 건넸으나 표정은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듯 약간 굳어 있었다.

“이건 교칙위반 아닌가요? 밤에 잠은 안 자고 모여서, 더구나 이 냄새는 술 냄새 같은데요?”

카밀리아가 인상을 확 쓰더니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신입생 주제에……”
“교칙을 어기고 후배를 괴롭히는 선배들이 신입생을 나무랄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활지도 선생님 만나러 줄줄이 몰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다면 지금 당장 마트료나를 보내주시죠.”
“썩스(Sucks)! 이년이 어디 앞에서 건방지게……!”

카밀리아는 당장 따귀라도 날릴 듯 성을 내며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메이브가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놔 둬. 역시 나이프 사건을 해결한 건 충동이나 행운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재미있군.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리고 유약한 신입생의 모습이 아니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쌓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무게감이 느껴져.”

여양은 순간 움찔했다. 숨겼던 자신의 진짜 나이를 알아차린 걸까? 과연 에메랄드 아이라며 자자하던 명성이 단순한 뜬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의 속내를 간파하고 마음을 지배한다는 마력의 눈동자, 에메랄드 아이. 확실히 겁없이 굴었던 여양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빈나련이나 돌로리스와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성숙한 여성이 풍기는 고혹적인 분위기와 초록색 눈동자에서 뿜어나오는 마력과도 같은 매력이.

메이브는 또한 그 나름대로, 무시하지 못할 강적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 존재감과 파괴력…… 어쩌면 앞으로 빈나련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장하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만 해. 그런 생각을 포커 페이스로 감추며, 메이브는 짐짓 느긋한 척 손짓을 하여 마트료나를 풀어주라고 명했다.

“모처럼 신입 회원을 맞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훼방꾼이 나타나서 흥이 사라졌어. 데리고 사라져!”

마트료나는 오한이 들린 듯 몸이 떨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여양이 얼른 다가가 옷을 대충 입히고 브래지어를 주워서 어깨를 끌어안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가기 직전에 고개를 슬쩍 돌려 방 안을 훔쳐보니 모두들 종이컵에 담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돌로리스의 도발적인 눈빛과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움츠러 들며 고개를 돌렸다. 막 닫히려는 문 너머에서 돌로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 후후후.”

문이 닫혔다. 카밀리아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묻자 여양과의 비밀이라며 웃어 넘기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거지! 크크크…….”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마트료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 여양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잘 자라고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마트료나가 불러 세웠다.

“……어떻게 알았어?”
“실은 나즐리에게 부탁했었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알려달라고. 거기 있던 사람 중에서 돌로리스라는 선배를 만났는데, 네 얘기를 하면서 묘하게 언행이 수상하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다행히 네가 방을 나간 후에 나즐리가 잠을 깨고 몰래 따라갔던 모양이야. 조금 늦어서 처음엔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했는데 어느 방에서 여러 사람 목소리가 들리길래 가보니 문 옆의 명찰에 돌로리스라고 적혀 있지 않겠어.”
“그랬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신경쓰지 마. 혹시 내일부터 그 선배들이 또 괴롭힐지 모르니 조심해.”
“참, 나, 네가 해준 말 생각했어.”

다시 나가려던 여양은 다시 마트료나의 머리맡으로 돌아왔다.

“언제였더라? 학기 시작되고, 내가 적응하기 힘들다고 했을 때 네가 해준 말 있지? 눈을 꼭 감고 셋을 센 후에 눈을 뜨라고. 눈을 감은 동안 기존의 세계는 사라지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계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그러니 겁먹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랬던가. 확실히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은 난다. 그건 여양 자신이 어릴 적에 직접 만든 자기만의 주문이었으니까 잊을 리는 없겠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마트료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 말을 떠올리고 용기를 내었어. 선배들 다섯 명이 둘러싼 방 안에서, 그들의 엘리트 모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했어. 괴롭힘을 당하긴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그때 난 눈을 꼭 감고 생각했는걸. 그 전의 나는 사라지고, 눈을 뜬 순간의 나는 용감한 새로운 내가 되었으니까.”
“마트료나…….”
“나, 앞으론 더 강해질 거야. 언제까지 네 도움만 받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 너무 내 걱정하지 마.”
“그래,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

여양은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일어났다. 나즐리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파자마만 입고 복도에 나오니 무척이나 추워서 양팔로 몸을 감싸고 반쯤 뛰듯이 걸었다.
하다못해 교복 코트라도 걸칠 것을, 급한 마음에 침대를 박차고 튀어 나오니 이 꼴이었다. 스스로도 참 한심하구나 생각하며 여양은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지란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여양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생각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기를. 더는 마트료나가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그런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방 안에서 펼쳐지던 탐미적이되 퇴폐적인 풍경이 마음 한켠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 드러난 마트료나의 알몸과 이를 탐욕스럽게 더듬던 금발벽안 선배들의 손가락, 그 자극적인 손길, 손길들.

하지만 같은 시각, 또 하나의 손길이 어둠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사의 이빨처럼 치명적인 손짓이었다.


(제5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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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컵을 두 손으로 쥐고 만지작거리던 마트료나가 마침내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힘없이 늘어졌던 눈에 총기를 되찾고 있었다.
잠에 취하고 어둠에 두려워하며 선배들에게 억눌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기만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트료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인질로 붙잡힌 채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그 얼굴,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던 그 얼굴, 슬프고 외로울 때 언제나 옆에 있어준 그 얼굴. 여왕님의 얼굴. 기억 속의 그가 속삭인다. 그 말이 겁쟁이인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입을 연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전 LXG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건배를 권하던 메이브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더니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초록빛 눈동자가 파충류의 것처럼 싸늘한 냉기를 담고 마트료나의 흑갈색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어째서지?”

참다못한 돌로리스가 일어나서 마트료나를 향해 다가갔다. 비록 키는 더 작았으나 무시무시한 기세에 위축되어 마트료나는 절로 몸을 움츠렸다.

“야, 너 미쳤어? 이런 기회를 거절하겠다니, 제정신이야? 모든 유학생들이 들어오고 싶어서 애원하고 매달리고 있는 거 몰라? 설마 너도 그 빈나련의 팬이야? 그게 아니라면 감히 신입생 따위가 LXG를 거스르려 할 리가 없는데.”

아니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아름답고 당당한 빈나련의 모습에 어느 정도 마음을 빼앗긴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나련과 메이브가 라이벌 관계라는 건 영화궁의 학생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메이브가 자신의 눈에 담긴 힘을 자신하며 사람을 예단하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트료나에게도 여자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메이브를 비롯하여 카밀리아, 돌로리스, 자신을 데리고 온 두 사람까지.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맞지 않는 느낌과 분위기가 있었다. 야심과 욕망, 독선과 우월감이 느껴졌다. 이들이 여왕이 되고 영화궁을 지배(자신들의 표현에 따르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생각해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LXG에 대한 소문은 퍼져 있었다. 유학생이 아닌 한국 학생들을 깔보고 얕잡아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골라서 집단 괴롭힘을 주도하고, 교사들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거물들의 딸임을 자랑하며 교칙을 무시하며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든지 하는 등등.

“흠…….”

메이브는 잠시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더 심지가 굳은 아이였다. 마침내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바막과 스웨터가 마트료나의 양팔을 붙잡았다.

“말 안 듣는 아이에겐 벌을 줘야지. 제법 자신이 있어 하는 모양인데, 얼마나 더 고집을 부릴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메이브는 손을 뻗어 마트료나의 파자마 위를 더듬었다. 마트료나의 얼굴빛이 붉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피부 위의 잔털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손가락이 상의의 단추를 풀고는 열어 젖혔다. 그리곤 하의를 단숨에 발목까지 내렸다. 학교에서 지급한 평범한 디자인의 연한 살구색 브래지어와 하얀색 팬티가 촛불의 빛을 받아 수줍게 드러났다.

으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움직였으나 양쪽에서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아무 소용없는 반항일 뿐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카밀리아가 손을 등으로 집어넣어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었고, 돌로리스가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메이브의 손가락은 배꼽 주위를 훑었다.

“아주 좋아. 날씬하고 군살이 없어. 돌로리스처럼 야위지도 않았고, 카밀리아처럼 단단한 근육질도 아니야. 손톱으로 긁으면 벗겨질 듯 부드러운 피부야.”

메이브는 찬탄의 말을 늘어놓으며 마트료나의 허리와 배를 더듬어갔다. 마침내 브래지어가 바닥에 떨어지며 감추었던 작은 비밀이 드러났다. 소녀의 작은 손에도 쏙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였다. 카밀리아가 히죽 웃었다.

“역시 동양인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가슴은 작은데? 그래도 롤리타보단 크군.”

짓궂은 마지막 말에 돌로리스가 금방 반응을 보였다.

“그 작은 가슴을 만지고 핥고 빠는 게 누구인데 그래?”
“그건…… 네가 제일 만만한 상대니까 그렇지!”
“흥! 내 테크닉이 최고라고 말했던 건 또 어디의 누구시더라?”

돌로리스가 심술궂게 받아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도 메이브의 거침없는 손가락은 이제 팬티의 양쪽 허리께를 붙잡고 있었다.

“자, 이 속은 어떨까?”
“그만둬요! 그만두…… 으읏!”

단호하게 말했으나 마트료나의 팬티는 무릎까지 내려가고 말았다. 완전히 나신이 된 것도 아니고, 강제로 벗겨진 추한 모습으로 마트료나는 다섯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폭우처럼 쏟아져 몸 곳곳을 파고드는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차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흐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영 아니군. 이제 우리 LXG에 반항하는 게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알겠지?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이것도 우리 환영식의 일부라고. 너도 곧 우리와 함께 즐기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내 이 손가락이 그리워서 찾아오게 될 거야. 후후.”

메이브의 자신만만하고 요염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카밀리아와 돌로리스의 손가락이 마트료나의 몸을 탐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메이브는 술을 입에 대었다.

“잘못했다고,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멈추지 마.”

메이브가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카밀리아는 말 안 해도 그럴 거라며 입맛을 다셨다. 마트료나는 신음소리 하나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찢어져 피가 쏟아져 나올 듯 연약한 입술이 파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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