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몸을 적신 물을 얼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격통이 밀려오자 금윤은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웅크렸다.
하다못해 버려진 길고양이라도 이렇게까지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을. 학생들은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다가도 그가 길금윤임을 알아보고는 즉시 고개를 돌리고 멀리 떨어지려 했다. 금윤이 갖고 있는 사악한 기운이 인플루엔자처럼 전염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묘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온몸이 얼어붙는 추위만이 육체와 영혼을 옥죄고 있어 억울함과 서글픔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두루뭉술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 친구를, 룸메이트를 잃은 슬픔도 컸지만, 하필 그의 죽은 모습을 발견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채 씻어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겪은 일련의 괴롭힘과 따돌림과 수모와 추위는 눈 위에 내리는 눈처럼 티도 나지 않는 듯 했다.

이대로 얼어붙어 동상처럼 굳어져 버릴 것만 같았을 때, 마음이 조금씩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망각만을 좇고 있을 무렵 몸 안에서 발신음이 났다. 하필이면 그때 울리는 소리는 금윤의 내면에서 외치는 내면의 외침과도 같이 들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어. 포기하고 싶지 않아.
금윤은 자문했다. 포기하다니, 무엇을? 그건 아마도 이 억울함을 해소하고 진실을 알아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인생 자체.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준다면…….

「여왕님입니다. 만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몸이 급격하게 떨렸다. 분명 얼어붙은 신체를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것이겠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진정하려 했으나 뜨거워진 눈시울만은 둘러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떨리는 손가락을 흔들고 입김으로 녹이며 타블렛 펜을 들어 답장을 적어 보냈다.
「만나자. 지금 어디에 있니?」

비로소 금윤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붙잡을 자신이 생긴 것이다.


* * * * * * * * * *


금윤은 여양, 마미, 체링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몸을 녹이고 젖은 옷을 세탁실에 맡긴 후 여양의 방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지란은 또 어디서 놀고 있는지 방에 없었다. 친구도 많고 놀기도 좋아하는 아이니까, 라면서 여양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지난 번 노혜와의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또 어딘가에서 다른 여자애랑 그런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건 질투라기보다는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아주 천천히 금윤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최대한 덤덤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막을 길이 없었다. 물벼락을 맞고 돌아오던 그 길,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물러서던 아이들을 떠올리자 눈물이 넘쳐흘렀다.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던 여양은 체링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중의 상처와 그걸 찍은 사진을 LXG가 어떻게 알았느냐가 문젠데. 그게 정말 사실이고 사진이 존재한다면, 역시 신문부로부터 알아낸 걸까?”

그때 금윤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돌로리스는 사진을 신문부로 넘긴다고 말했어. 신문부로부터 얻은 정보가 아닌 것 같아.”
“흠, 그럼 더 알 수가 없는데. 대체 누가 신문에도 안 실렸고 아무도 모르고 있는 정보를 유출한 거지? 아무래도 금윤 선배를 협박하기 위한 거짓 정보일 가능성도 생각해둘 필요가 있겠어.”
“그럴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엔 시체를 옮긴 경비 직원과 시신을 보관한 의사와 간호원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지 않았나 싶어요.”

체링의 말에 여양도 뭔가 짚이는 듯 턱을 괴고 생각을 거듭했다.

“과연. 금윤 선배는 커튼에 목을 맨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를 했어. 신문에 의하면 경비 직원이 와서 사진을 찍고 시신을 내렸다, 그 후에 의사가 와서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따라서 목의 상처를 보고 사진을 찍은 것은 직원이라는 얘기. 아무리 교내를 주름잡는 LXG라지만 어떻게 학생이 직원에게 그런 정보를 캐내었을까? 이사회에서 덮어두려는 걸로 봐서 직원들이 쉽사리 입을 열 리가 없을 텐데.”
“그건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죠.”

여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약간 연극적인 느낌으로 소리쳤다.

“그래! 여기서 모여 앉아 궁리해 봐도 답은 안 나와. 역시 직접 움직이고 찾아봐야 겠어!”

그러더니 금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선배, 나 결심했어요. 선배의 무죄를 내가 밝혀내고 말 거예요. 마미의 말대로, 금윤 선배는 나영 선배를 죽일 이유도 없고 죽였다는 증거 하나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벌써 선배를 보고 살인자라는 둥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잖아요. 더 이상은 이런 꼴을 못 보고 있겠어요. 선배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나라도 나서서 선배의 누명을 풀어줄 테니 두고 봐요.”

금윤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목이 메어서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왜 나를 위해서 그렇게,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니. 그런 의문만이 입 안을 맴돌다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그때 금윤의 손등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트료나가 자신의 손을 들어 금윤의 손을 살짝 쥐고 있었다. 솜털로 간지럽히는 듯 부드럽게 속삭이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선배, 나는 믿어요. 선배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영 선배가 자살 같은 걸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금윤 선배가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을 믿고 있어요. 이럴 때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난 왕님이처럼 용감하지도 않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잠깐, 마미! 왜 네가 울려고 하는 거야? 지금 여기선 웃어야 할 때야! 내가 금윤 선배의 무죄를 밝혀낼 거라고 지금 선언하고 있잖아! 다 같이 웃으면서 박수를 쳐야지!”

감동해서 듣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돌연 마트료나가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글썽이자 화들짝 놀란 여양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호령에 따라 체링을 시작으로 모두는 기운이 빠지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양팔을 살짝 벌리고 허공을 두드리는 듯한 거만한 손짓으로 박수를 가라앉힌 여양은 팔짱을 끼고 서서 다음 일을 궁리했다.

“말은 멋지게 했지만, 일단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 우선은 신문에 발표하지 않은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해. 신문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 다음엔 사진을 찍었다는 직원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물어봐야 겠어.”
“정보는 많을수록 좋아요. 현실은 추리소설처럼 단서를 착실하게 제공해주지 않으니까. 뭐가 중요한 힌트고 뭐가 맥거핀인지 알 수가 없으니 최대한 정보를 많이 확보할 필요가 있어요.”

“좋아, 체링 너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 근데 여기서 맥머핀 얘기는 왜 나와?”
“맥거핀이요. 추리물에서 독자를 속이기 위한 불필요한 정보를 말해요. 중요한 단서인 줄 알고 독자들을 집중하게 한 후 반전으로 놀래키기 위해 쓰이지요.”

여양은 체링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사실 확실히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수첩을 꺼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수사를 시작하겠어. 수사라니까 내가 수사반장이라도 된 것 같은데, 일단 신문부에 만나자고 연락을 해야지. 내가 아는 사람은 제갈승미 선배밖에 없으니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펜을 빼내어 액정 위를 휘갈겼다. 활자인식으로 입력된 문장이 화면에 출력이 되었다. 잘못 입력된 글자를 고쳐서 학년, 반, 이름을 입력하여 송신을 했다. 혼자 메시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겨우 끝났는지 수첩을 침대 위에 던지고는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우, 지겨워.”
“잘 안 되었니?”

마트료나가 걱정스레 물어보자 여양은 누운 채로 거꾸로 비치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나보고 여왕 선발전 출마 선언 인터뷰를 하면 전면 협력하겠대.”
“정말?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멋대로 정하려고 하고 있어.”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래서 마트료나의 반박도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그건 그렇지만…… 많은 학생들이 너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걸.”
“마미 너까지 내가 원하지도 않는 광대짓을 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광대라니. 절대로 그렇게 생각 안 해. 난 사실 조금 동경하고 있어.”
“진짜야?”

여양은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마트료나는 찰랑거리던 검은 머리카락과, 반짝이던 왕관 모양의 브로치를 떠올렸다.

‘이 왕관을 기억하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라기엔 너무나 또렷했다. 이 화원의 주인은 너야, 그때가 되면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의미도 알 수 없던 말들이 예언처럼 느껴졌다. 심장에 각인된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지금껏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있었다.

꿈꾸는 소녀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 그대로 마트료나는 그때 느꼈던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꽃이 만발하던 화원에서 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을 만났어. 그 사람이 분명 이 학교의 여왕 초월랑님……. 그곳에서, 그 분에게서 나는 꿈꾸고 동경하던 모든 것을 보았어. 내가 바라던 나의 미래가 거기 있는 것만 같았어…….”

여양은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여왕이 되는가. 여왕이라는 직위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그 해답의 일부분을 알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결심했다.”
“응? 뭐를?”
“그건 비밀. 나중에 알려줄게.”
“피.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지 어딨냐?”

웃으며 얼버무리는 여양을 보며 마트료나는 잠깐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따라서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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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4.

수업을 마치고 종례를 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학생이 2학년 5반 교실에 들어왔다. 압정을 치웠는데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을 맛봤던 금윤은 한시라도 빨리 이 교실을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에 종례가 마치자마자 달아나듯 뒷문으로 향했으나 두 사람이 더 빨랐다. 금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금발에 작은 몸집을 한 2학년생 돌로리스와 붉은 기가 도는 갈색 곱슬머리의 1학년생 아르진, 이들은 뭇 학생들의 선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고 있는 LXG의 멤버였다. 돌로리스는 선연한 색색의 줄무늬 양말에 새빨간 스웨터 차림이고 아르진은 소매나 치맛단에 프릴을 달아서 개조한 교복을 입고 옆머리엔 조화가 달린 머리핀을 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자석의 척력을 받는 듯 좌우로 물러났다.

“길금윤?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자리에 앉아봐.”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돌로리스가 말했다. LXG에 맞서거나 반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용기를 가진 학생은 학생회 멤버를 제외하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외가 있다면 밤중에 당당히 찾아와 붙잡혀 있던 친구를 데려간 아이 정도?

그러니 금윤은 불량배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떨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아이들은 좀 떨어진 곳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보였는지, 창문이 열리면서 옆 반 아이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길금윤, 단도 어쩌고로 물어보겠어.”

돌로리스가 물었다. 아르진은 단도직입이라는 말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네가 죽였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여우처럼 매혹적이지만 날카로운 미소를 보였다. 돌로리스의 미소와 질문의 뉘앙스는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윤은 굴욕감과 무력감을 곱씹으며 떨리는 몸을 고정하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허벅지를 눌렀다.

“대답하기도 싫다 이거니?”

돌로리스의 목소리에 험악한 기세가 섞여 들어갔다.

“내 추측을 말해줄게. 네가 출소한 날, 넌 원나영과 심한 말다툼을 했어. 그 내용이야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나이프 사건을 일으킨 무서운 아이와 같은 방을 쓰기 싫다든지 하는 식으로 너를 몰아세웠을 거야. 화가 나서 다투다가 어느 틈에 넌 걔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거지.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나영의 숨은 끊어져 있었던 거야.”

싸늘한 침묵이 주위를 배회했다. 형식상으로는 금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실은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어떤 수업에서도 느낄 수 없는 정숙과 집중이 지금 이 순간 있었다. 청중을 의식했는지 돌로리스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실어 말을 이었다.

“그 두렵고도 긴박한 순간 속에서도 너는 가능한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겠지. 여기서 자수를 해봤자 나이프 사건을 일으킨 너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는 거. 사람 목에 칼을 겨눴던 사람이니 목을 졸라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겠니? 우발적이었다든가, 실수였다든가 하면서 변명을 해봤자 먹히지도 않을 게 뻔해. 넌 살인죄로 잡혀 갈 것이고, 미성년자라고 해서 쉽게 용서받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넌 나름 머리를 쓴 거야. 커튼으로 고리를 만들어 목을 묶어놓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 자살한 룸메이트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를 했지. 물론 의심이야 받겠지만, 딱히 살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보이지도 않고 하니까 피곤해서 곤히 잠들어서 몰랐다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지.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버텨왔잖아. 내 말 틀렸니?”

주위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열린 창문 틈에 신문부 학생의 모습도 보였다. 특종 거리를 놓치지 않는 신속함은 평가할 만 했다.

“자, 여기까지는 좋았어.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지만 이사회는 학교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얼른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지. 이대로라면 그냥 자살 사건으로 묻혀지고 말 일이야. 하지만 난 어떤 사람으로부터 증언을 들었거든?”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일까, 돌로리스는 돌연 말을 멈췄다. 호기심이 고조된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그저 돌로리스와 금윤의 얼굴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금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그 창백한 얼굴은 마치 명탐정 앞에서 범행이 폭로된 범인의 것 자체였다.

“커튼을 푼 나영의 목에, 붉은 상처 자국이 있다고 말야. 두껍고 커다란 커튼으로는 절대로 낼 수 없는, 가늘고 깊이 파고 들어간 자국이!”

그 순간 아이들의 입에선 경탄과 공포의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고, 이래저래 떠돌던 온갖 뜬소문 중에서도 없었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중의 상처.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나영이 실제로 목을 졸려 죽은 것은 커튼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목을 조른 또 다른 끈이, 또 다른 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럴 만한 의심이 가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자, 어때? 비록 그 증인의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대신 우리 LXG의 힘으로 발견 당시 목을 찍은 사진을 입수하여 조만간 신문부에 넘길 생각이야. 그때가 오기 전에 네가 할 일은 하나 뿐이야. 교무실이나 경비실을 찾아가,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늦게나마 용서를 비는 일!”

금윤의 몸이 휘청거렸다. 돌로리스를 올려다보는 그 얼굴은 죽은 자의 것처럼 창백하고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르진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발치에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이걸 우짤꼬? 지금 울고 짜고 싶제? 내가 도와주께. 실~컷 울어삐라 마!”

갈색 머리의 백인 입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흘러나왔지만 주위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아르진은 양동이 가득 담긴 물을 금윤의 몸에 천천히 부었다. 금윤은 눈만 질끈 감았을 뿐 앉은 상태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물을 맞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돌로리스가 팔짱을 끼고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젠 마음껏 눈물을 흘리렴. 그리고 마음이 진정되면 우리 LXG를 찾아와. 널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네가 받을 처벌을 줄일 수 있는 길을 궁리하고 있거든. 고맙지 않니? 지금의 너에게 과연 누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것 같애? 학교의 평화를 바라는 우리 LXG밖에 없지. 자, 그럼, 기다릴게!”

돌로리스는 자기 할 말을 마치자 볼 일이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을 빠져나갔고, 아르진은 슬쩍 금윤의 물에 젖은 꼴을 우습다는 듯 흘겨보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극에 몰입한 관중처럼 적막에 잠겼던 주위에서 조금씩 이야기꽃이 싹을 틔웠다.
신문부원은 지금껏 속기로 받아 적었던 대화(거의 돌로리스의 일방적인 말이었지만)를 정리하며 부실로 황급히 돌아갔고, 다른 반 아이들은 도망가듯 그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 대부분이 피하듯 물러났고, 금윤은 찬 물을 뒤집어쓴 채로 몸을 떨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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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아침, 등교를 하여 자기 자리로 간 금윤은 순간 멈칫했다. 책상 위에는 몇 장의 포스트잇과 쪽지가 붙어 있었고, 책상 한 가운데에 굵은 매직펜 같은 걸로 커다랗게 써놓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살 인 자」

쪽지에는 온통 욕과 비난과 저주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네가 죽였지?’ 같은 추궁부터 시작하여 ‘나영이를 죽인 건 너야!’ 같은 단정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문체는 다양했으나 품고 있는 내용은 동일했고, 한 낱말로 압축한다면 바로 책상에 쓴 글자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해놨는지 의자 위엔 압정들이 날카로운 침을 뻣뻣하게 쳐들고 있었고, 의자의 등에는 「나는 친구를 죽인 년입니다」라고 적힌 종이가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금윤은 말없이 의자 등에 붙인 종이를 뜯어내고 의자를 살짝 들어 기울였다. 하지만 압정은 달라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본드로 붙여놓은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붙인지 오래 되지 않아 완전히 굳진 않았기에 볼펜을 꺼내어 밀어내듯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의자에 앉아 포스트잇이며 테이프로 붙인 쪽지들을 다 걷어내었지만 책상 위의 글자는 지울 수가 없어서 연습장을 올려놓았다.

그때까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책상의 위치가 조금 변한 듯이 느껴졌는데 자세히 보니 금윤의 자리를 중심으로 그 앞뒤좌우에 있던 책상들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 있었다. 마치 금윤의 주위 공간에 결계가 쳐져 근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 스스로가 멀어진 것이고 근접을 못하는 건 금윤 쪽이다.

사례 2.

담임선생님이 오시고 조회시간이 되어서야 반의 분위기가 이전과 흡사해졌다. 그 전까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무언가 수군대며 가끔 불길한 눈빛을 금윤을 향해 보내곤 했다. 나이프 사건으로 인한 고초를 겪고 돌아온 후에 자신을 미쳤다고 여기며 꺼리던 아이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반갑게 맞아준 친구들도 있었다. 그 대표자격인 사람이 바로 나영이었는데, 그는 이미 세상에 없고, 다른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돌변한 뒤였다.

어쩌면 이 글자와 압정을 준비한 건 그들일지도 몰랐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았고 금윤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그 근거가 떠도는 소문일 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현 상태에서 금윤은 용의자로 의심을 받을 뿐 아무런 정황도 증거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 이미 금윤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군중은 늘 희생양을, 먹잇감을 찾는 법이다. 자기들의 안전과 단결을 위해, 공고한 체제의 수호를 위해 기꺼이 제물을 단두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혼자라면 하지 못할 그런 생각과 행동이 모두 함께라는 이유도 너무나도 쉽고 강력하게 전파되고 실행된다. 눈사태처럼 한 번 일어난 이상 중간에 사그라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조회가 끝날 무렵 한 아이가 용감하게 손을 들고,

“선생님! 저 무서워서 수업 못 받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사람 죽인 살인자랑 함께 공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아이들은 맞아요, 맞아요 하고 너도나도 동의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담임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 역시 금윤을 확실하게 변호하지는 못했다. 그러긴커녕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원나영 학생에 대한 문제는 이사회에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발표가 있기 전까지 기다리세요.”

담임의 말은 학생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사회는 자살로 결론짓고 쉬쉬하며 덮어두려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부검이나 현장조사 같은 것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방은 다 치웠고 시신은 병원에 안치되어 부모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이사회의 미온적이고 무성의해 보이기까지 한 대처는 학생들의 의혹을 더 부풀려줄 뿐이었다.

학교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학교의 평판이 나빠진다. 영화궁 고등학교는 재벌가나 정치인 등의 자녀가 많이 다니고 있어 그들의 후원에 의지하고 있어 학교의 이미지를 좋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사회 측은 조사를 하지 않고 경찰도 부르지 않은 채 덮어두려는 것이다. 이것이 학생들의 추측이다.

결국 아이들은 말로만 그랬을 뿐 실제로 수업을 거부하거나 교실을 나가지는 않았다.

사례 3.

괴롭힘 다음은 따돌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이들은 교실 안에 마치 금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금윤이 앉아 있는 책상과 의자를 포함해서 그 주위의 원형 공간이 거대한 기둥 혹은 구멍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서 이동을 했고 자기들끼리만 웃고 떠들고 숙제를 베끼고 서로의 연습장에 낙서를 하면서 놀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들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교실을 빠져나갔고 금윤 혼자만이 남았다. 이미 밥을 먹을 생각도 들지 않던 금윤은 책상 위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묻었다. 뱃속은 허전했으나 식당에 가서 전교생에게 지금과 같은 취급을 받느니 굶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차가운 시선, 일부러 무시하는 태도, 등 뒤에 칼을 감춘 듯 도사린 악의.

교실 안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차 끓어 넘치는 냄비 속인 것만 같았다. 몸이 터져나갈 듯 답답하다. 하지만 금윤은 참고 또 참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오해가 깨끗이 풀어질 때가 곧 올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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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님아~! 우리 여양이 도서관에 있었쩌? 책 빌리려고?”

마트료나는 발을 구르며 경쾌하게 달려오더니 여양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아이를 얼르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여양의 기분은 거기에 맞춰줄 정도로 좋지를 않았다.

“으응. 오늘 나온 신문을 보려고.”

마트료나의 얼굴에도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자살 사건……?”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각해? 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상해. 우리 그 원나영 선배를 그날 저녁에 만났잖아? 그렇게 밝게 웃고 친구들이랑 얘기도 나누고 그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생각도 너랑 같아. 하지만 그게 바로 문제의 원인이야. 그 때문에 금윤 선배가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어.”

여양의 심각한 목소리에 마트료나의 얼굴도 따라서 굳어졌다. 마주보는 그의 눈동자는 차갑고 눈빛은 매서웠다. 마트료나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무, 무슨, 뜻이야?”
“사실은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 알 일이지만, 덕분에 금윤 선배는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 셈이야. 전혀 자살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살을 했다면, 같은 방에서 살고 있고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의심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너…… 너 그럼 설마 금윤 선배가…… 나영 선배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아직 그렇다고는 말 안 했어. 일단 직접 본인에게 물어볼 생각이야.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게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한 가득 믿음이 있거든.”
“하지만 금윤 선배가 그런 짓을 했다면 어째서 자기가 발견을 해서 신고를 하는 거야? 눈에 띄고 의심을 사는 일을 일부러 할 필요가 없잖아?”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갑자기 체링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느새인가 두 사람의 뒤에 와서 서있었다. 뜻밖에 놀라는 표정들을 보자 쑥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얼른 변명했다.

“화장실에 갔다 오는데 두 분이 보여서 말을 걸려고 했다가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아까 꺼낸 말의 뒤를 이었다.

“우리가 사는 기숙사의 방은 불완전하게나마 밀실이거든요. 방을 여는 열쇠는 안에 사는 두 사람의 학생수첩. 그러니 둘 다 방 안에 있으면 밖에서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죠. 하지만 경비실에는 비상용 마스터키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밀실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래도 경비직원분들은 경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니 일단 믿어야겠죠.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한정한다면, 방 안에서 일어난 사건인 이상 최초 발견자는 룸메이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네 말 대로야. 그러니 만약 룸메이트를 죽이고 싶다면 절대로 방 안에서 죽여선 안 되지.”

여양의 말에 체링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신문을 보면 금윤과 나영 선배의 방은 1층에 있어요. 창문으로 출입이 가능한 상태죠. 창문은 안에서 잠그도록 되어 있으니 그날 잠겨 있었는지 여부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우발적인 범행인 경우가 있죠. 여양이 말한 대로 계획된 범행이라면 절대로 방 안에서 살해할 리가 없지요.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자수를 하고 싶지 않아 자살로 위장하는 거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금윤 선배가 살해했다면 그건 사전에 벼르거나 계획했던 게 아니란 말이지. 하긴 아무리 어리석어도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 안에 둘만 있는 상태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짓을 할 리가…….”
“자살로 위장했다면 시체에 폭행 등의 흔적이 있을 거예요. 신문엔 검시나 부검을 했다는 이야기가 없어서 알 수가 없지만요.”
“요즘 분위기가 흉흉해. 이사회에서 그냥 덮어두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여양은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머리를 긁적이고 발로 바닥을 문질렀다.

“둘 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여양과 체링은 무심코 돌아보았다. 마트료나가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죽였니 안 죽였니, 어떻게 그런 험악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니? 금윤 선배가 나영 선배를 죽일 이유도 없고 증거도 없잖아. 그런데 벌써 범인이라도 된 것처럼 함부로 막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아니, 마미. 그게 아니고, 우린 그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보는 거야…….”
“변명은 듣기 싫어. 너희들도 죽은 사람을 놓고 뒷담화를 하는 애들이나 다를 바가 없어!”

마트료나는 고집을 부리는 아이처럼 등을 돌렸다. 여양은 어떻게 말해야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궁리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 금윤 선배를 직접 만나서 들어보자!”

여양은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금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만나자. 지금 어디에 있니?」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답장을 타블렛으로 적어 보냈다.

「도서관 앞이에요. 멀지 않으면 오세요.」
「내가 갈게.」

메신저로 대화하는 것처럼 답장이 금방금방 왔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석양을 등에 지고 한 소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몰골이라 불러야 할 금윤의 상태를 보고 토라졌던 마트료나마저 할 말을 잊어버렸다.
거기엔 온몸이 푹 젖은 채로, 당장이라도 쓰러질듯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인생에 지치고 영혼이 닳아버린 사람처럼 공허한 표정을 지은 길금윤의 모습이 있었다.

여양을 보자 희미한 미소를 띄웠지만, 당장이라도 혼이 빠져나갈 듯한 얼굴이었다. 여양이 달려나가자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세상에! 이게 무슨 꼴이에요?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거예요?”

금윤은 그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 앉아서 쉬고 싶은데, 안 될까?”

물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도서관 옆에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서 그들은 잠시 바다 저편으로 가라앉는 태양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바다와 하나가 되어 녹아드는 태양을 떠나보내는 동안, 이미 반대쪽에는 달이 어두워지는 하늘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공포와 죽음을 낳았던 밤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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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자신이 눈을 뜨고 있던 동안에 원나영은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이 멀쩡히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은 죽음을 선택했다니, 그것도 당장이라도 달려갈 수 있는 짧은 거리에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는 태어나고 동시에 누군가는 죽는다. 인간의 역사와 긴 시간상에서 봤을 때는 늘 일어나고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직접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죽음을 겪었을 때 느끼는 안타깝고 쓸쓸한 심정은 비할 데가 없었다. 그건 아마도 몇 번을 겪어도 쉽사리 무뎌지지 않으리라.

여양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나영과의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안경테의 붉은 색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고, 새침하게 웃는 얼굴과 살짝 들어간 보조개, 부끄러움을 타는 어린아이처럼 꼼지락거리던 손가락과 애교를 부리듯 앙증맞은 웃음소리가 또렷하게 재생될 정도로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것도 자기 룸메이트가 옆에서 잠에 든 사이에? 불과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곁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자살이라니, 그것도 방 안에서 자살이라니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전날 보았던 그의 모습은 죽음을 생각한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충동적인 자살 행위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커튼을 뜯어서 목에 묶고서 발이 땅에 닿는 낮은 자리에서 자살을 시도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칼로 손목을 긋는다면 모를까, 충동적으로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차라리 옥상에 올라가서 몸을 던지는 게 더 쉬울지도.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시간이 있고, 그 사이에 충분히 생각한다면 충동이나 흥분을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커튼을 뜯고, 이것을 매달아서 목에 묶고, 키보다 낮은 높이에서 몸을 늘어뜨려 목숨을 끊는다는 일련의 행위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번거로우며 ‘죽기조차’ 힘든 일이다. 최소한 갑작스럽게 일어나 즉시 목숨을 잃은 사건은 아닌 것이다. 또한 바로 옆에서 룸메이트가 자고 있다. 어지간한 소리만 나도 잠에서 깨어 자살을 하려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자살을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비단 여양 혼자만 한 것은 아니었고, 바로 그 이유로 금윤이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룸메이트가 코앞에서 자살을 했다니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에서 시작한 의혹은 이내 금윤이 나영을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한 게 아니냐는 의심으로 변해갔다.
신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더라는 식으로 짧게 언급만 해놨지만, 이미 이 생각은 전교에 빠른 속도로 퍼져 있은 후였다. 닭장 안의 닭들 사이에 조류 독감이 퍼지듯 소문은 학생들의 마음 속으로 급속히 전염되어 그런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여양은 나중에 더 자세히 읽어볼 생각으로 복사기로 가서 자살 관련 기사 부분만 복사를 했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어 금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만나고 싶은데, 어디에 있어요?」

아마도 금윤은 자기 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다짜고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행동은 예의도 아닐 뿐더러 지금처럼 초미의 관심사가 된 상황에선 부담스러워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신문부며 방송부며 학생회며 온갖 곳에서 그를 만나려고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 안에 얌전히 앉아서 불청객들을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체링과 잡담을 나누다 도서관을 나왔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나중에 연락을 하기로 하고 일단 금윤의 연락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메시지가 왔다는 글이 떠서 얼른 창을 띄었더니 뜬금없이 보드 게임부에서 놀다 간다는 지란의 글이어서 김이 빠졌다. 이런저런 특활부를 돌아다니더니 이제는 보드 게임인가. 여양은 그런 특활도 인정해주는 학교가 좋은 건지 무관심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일정 기준의 학생과 담당 교사만 있으면 클럽 개설은 가능하고 다른 학교와 다른 심사나 까다로운 조건 같은 게 없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이 학교에는 요리부, 다도부, 보드 게임부, 패션부에 인형 연구부와 서브컬처 연구부까지 존재하지 않던가.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이슬람교도인 무슬림부도 있다니까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마침 특활 생각을 하다 보니 아직 어느 특활부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딱히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전공이 있다보니 연극부에라도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수첩으로 검색을 했다.
학교의 조직도, 학생회 아래 특활부서 게시판. 학생 수는 적은 주제에 특활부는 무척 많은 편인데, 담당 교사만 섭외(?)하면 개설이 쉽기 때문에 한 명의 교사가 여러 클럽의 고문을 중복해서 맡은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부원의 숫자도 개설 기준인 다섯 명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었다. 대체 인형 연구부는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인형을 수집하는 건지, 만드는 것인지, 여양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인원수가 많은 부서는 학업과 관련이 있는 영어 회화, 수학, 화학, 생물, 문예, 역사 연구, 컴퓨터 등이 있고 취미 분야에서는 독서, 합창, 합주, 원예, 사육, 요리 등이 인기였다. 신문, 방송이나 운동 분야 클럽은 인지도는 높은 반면 힘들기 때문에 참여자가 적은 편이었다.

또 메시지 도착 공지가 떠서 들여다보니 마트료나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디냐고 물어봐서 도서관이고, 길금윤을 만나려 한다고 대답하자 같이 만나자는 답장이 왔다. 도서관 앞에 서서 잠시 기다리니 손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마트료나의 모습이 보였다.
홀가분한 모습과 가벼운 발걸음을 보자 숙제나 예복습을 위한 책 한두 권만 들고 다니면 되는 이곳 생활이 정말 편리함을 거듭 느낄 수 있었다. 자기 또래들은 지금도 무거운 책가방에, 급식이 안 되는 학교는 도시락에, 또 어떤 곳은 신발주머니나 체육복마저 싸들고 주로 높은 산 중턱에 있는 학교로 낑낑대며 등하교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자신의 행복한 처지에 감사해야 겠다는 마음이 든다. 여고생들의 굵은 다리는 학교의 입지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더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우스개로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최소한 이 학교에 널려 있는 날씬하고 예쁜 아이들을 보면 말이다.
보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여왕님 자신이 뚱뚱하고 못생긴 아이로 전락하는 이 아름다운 소녀들의 화원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게 아름다운 소녀를 마주보며 느끼는 이 감정은, 분명 나이와 성별마저 초월해서 와닿는 공통된 부분이 있으리라.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탐미, 가벼운 흥분과 설렘, 여기에 달라붙는 약간의 질투와 소유욕 같은 거친 잔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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