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메이브는 한참만에 입을 열고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가 과연 무엇을 알았는지는 마트료나를 제외한 모두 알고 있었다. 넋을 놓은 듯한 그 얼굴에 카밀리아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두 손이 메이브의 목덜미와 허리를 뱀처럼 슬며시 파고들었다.

“저 아이가 그렇게 맘에 들어?”
“후훗.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내가 단언하건데, 저 아이는 진짜야. 허영과 욕심에 물들지도, 질투와 아집에 찌들지도 않은, 천박함과 겉껍데기밖에는 없는 싸구려 인생들과는 전혀 달라.”
“저 애가 나보다 더 낫단 말이야?”

메이브는 아양을 떠는 듯한 카밀리아의 목소리를 무시하듯 여전히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을 비롯해 내가 지금껏 본 모든 여성들을 다 가짜요 쓰레기로 몰아붙인다고 해도, 이 아이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아.”

옆에서 가만히 있던 돌로리스가 뺨을 부풀렸다.

“치. 그 말은 뭐야, 우리가 다 쓰레기란 말이야? 이 신출내기 혼혈아보다 못하다고?”
“최소한 너보다는 나을 것 같구나, 롤리타.”
“또 나한테 싸움거려는 거야? 받아주지!”

자주 있는 일이지만 둘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메이브에게 있어 짜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거친 목소리로 저지했다.

“둘 다 닥쳐. 설마 내 눈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진 않겠지? 신이 내린 이 감식안에 오차나 오류 따윈 없어. 이 눈동자가 나에게 직접 말하고 있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소녀가 여기에 있다고. 거울이 백설공주를 비춰주듯 그렇게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어.”

에메랄드 아이(Emerald Eyed), 신이 내린 눈동자, 레이디 던세이니(Lady Dunsany), 요정왕국의 공주님. 아일랜드 민담에 나오는 요정 나라의 여왕에게서 따온 이름인 메이브에게 붙여진 숱한 이명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초록색의 눈동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 눈은 초능력으로 오인받을 정도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함을 갖추고 있다고 말해진다.

유서깊은 아일랜드의 귀족이자 마법사의 혈통인 던세이니 가문의 후예로, 여성으로는 드물게 정통 후계자의 자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기 자신마저 가짜며 쓰레기로 치부하면서까지 아름답다고 칭송하고 있는 이 소녀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잠깐, 메이브. 그렇다면 그 말은……?”

당황스러워 하는 카밀리아가 질문을 채 꺼내기도 전에 메이브는 예상하고 있다는 듯 답했다.

“바로 그거야. 여기에 있는 이 소녀야말로 가장 여왕에 걸맞는 재목이란 말이지.”

방 안에 있던 소녀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웨터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고 자기 목소리에 놀라 얼른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왓 더 헬(What the hell)?! 서, 설마, 메이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아이에게 여왕 자리를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이제 카밀리아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난 그러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럴 용의도 있어.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지?”

메이브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뒤에 서있던 바막과 스웨터가 마트료나에게로 다가갔다. 메이브는 혀로 입술을 핥고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

“마트료나, 우리들 LXG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the League of eXtraordinary Girls. 쉽게 말해 유학생들의 모임이야. 하지만 유학생이라고 다 받아주는 건 아니지. 오직 이 눈이 인정한 엘리트만이 LXG의 멤버가 될 수 있어.”
“엄청난 영광인 줄 알아! 지금 LXG는 여기 있는 다섯 명이 전부니까 말이지!”

옆에서 돌로리스가 특유의 하이톤으로 끼어들었다. 메이브는 살짝 흘겨보는 것으로 기를 죽이고는 말을 이었다.

“LXG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야. 성적이 우수하거나, 외모가 빼어나거나. 그걸 알기 위해선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입학한지 한 달밖에 안 된 신입생을 가입시키고자 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그런데 너, 클럽 활동은 하고 있어?”
“아뇨. 아무것도……”

마트료나는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메이브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어리딩 부에 들어오도록 해. 작년엔 내가 부장이었고, 올해엔 여기 카밀리아가 부장이니까.”
“오케이. 넌 키가 좀 작지만, 상관없어. 여기 롤리타도 치어리딩부거든.”
“그래, 내가 가장 키 작은 부원이다, 어쩔래! 하지만 유니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나라고.”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아무튼, 들어오겠다면 받아주겠어. 키는 몰라도, 얼굴 마담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마스코트적인 존재인 나를 제치고 쟤를 간판으로 내세우겠다는 말이야?”

또 말다툼으로 번질 것 같자 메이브가 사전에 차단했다.

“부의 문제는 부실(部室)에 가서 하고, 오늘은 마트료나의 LXG 입단 환영식을 위해 모였으니. 다같이 축배를 들까?”

어느새 마트료나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입단 환영식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대답은커녕 아직 마음도 정하지 못한 마트료나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바막이 방 구석으로 가더니 페트병과 종이컵을 가지고 왔다. 당연히 음료수일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여니 시큼한 냄새가 났다. 발효된 과일 냄새, 알콜의 자극적인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카밀리아가 당황한 마트료나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놀랐니? 이건 우리가 담근 특제 과실주야. 학생 신분인 우리가 술이나 알콜류를 갖고 들어오거나 살 수는 없지만, 알다시피 우린 고향에서 얼마든지 술을 마셨어. 난 프랑스 유학할 때 포도주를 물처럼 마셔댔지. 그래서 직접 만든 거야. 과일이야 식사 때도 나오지만 이 섬의 정원 곳곳에 있는 과일나무에게서 얻었지. 체리, 산딸기, 포도…… 특히 학생회관 뒤에 있는 제주 감귤 밭이 멋지지. 거기다 요리연구부에게서 얻어온 이스트와 설탕만 있으면 재료는 충분한 셈이야.”

카밀리아는 컵에 따른 액체의 향기를 음미하며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작년에 포도랑 산딸기를 섞어서 담근 거야. 조금 시지만 나름대로 마실 만 해.”

어느새 여섯 개의 종이컵에 술이 따라지고 모두에게 돌아갔다. 메이브가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자, 세계 최고의 학교에 모인 우리 유학생들이 영화궁을 지배하는 그 날을 위해 건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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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은 마치 레즈비언이라는 낱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대답했다.

“글쎄다. 난 특별히 남녀 관계의 대신이라고 생각해서 한 건 아닌데. 그냥 재미있는 장난이랄까?”
“장난이라니? 저 애는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 그게 장난이야?”
“아하, 넌 모르지? 사실 쟤도 즐기고 있었어.”

지란이 고개를 돌려 여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쟤 엄청 M이야. 마조히즘(Masochism)의 M. 이 놀이도, 뭐 내가 먼저 하자고 한 거지만, 쟤가 점점 더 해달라고 한 거야. 난 그냥 가슴만 만져보려고 했는데, 점점 손을 아래로 내려달라고 해서……”

그렇다면 레즈비언은 지란이 아니고 노혜였다는 말인가. 평소에 여자애들의 엉덩이며 가슴을 시도때도 없이 만지는 지란은 그저 장난꾸러기였을 뿐이고? 어쩌면 지란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동성애 지향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성애자라는 인식 하에 동성애에 흥미를 보이는 양성매념(兩性魅念)일 수도 있다.

아직 이렇다 할 대화도 못 나누어본 노혜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양은 자신이 느낀 죄책감과 미안함을 조금은 덜어도 된다는 이야기다. 아까 노혜가 말했던 ‘제발’이 제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함께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몰라. 나 빨리 샤워하고 잘래.”

여양은 그런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퉁명스레 말하곤 욕실 겸 화장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 지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만날 마미랑 붙어 다니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냐.”

농담조의 말투였지만 왠지 뼈가 있는 말 같았다. 흘려듣기에는 너무 딱딱했다.

“여양아, 너도 아까 꽤 흥분한 눈치던데…… 오늘 네 침대에서 같이 잘까?”
“아니. 유감스럽지만 룸메이트랑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싶진 않거든.”
“그거 아쉬운 말씀입니다. 난 더 좋은 관계가 될 것 같은데. 생각만 있음 언제든 말만 해.”
“그래, 외로우면 출장 서비스 부를게.”
“난 제법 비싸다고.”
“몸으로 때우지 뭐.”
“뭐야, 그럼 결국 공짜잖아?!”

투덜거리는 소리를 남겨놓고 히히, 웃으며 문을 닫았다.


* * * * * * * * * *


처음엔 잠을 쉬 이루지 못하게 만들던 바람과 파도의 소리도 이제는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가처럼 느껴진다. 아기처럼 입술을 살짝 벌리고 얕은 숨소리를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던 마트료나는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방금 전까지 꿈을 꾸고 있었음을 떠올렸으나 그 꿈의 내용만은 안개 속을 더듬는 것처럼 불투명했다. 꽃이 무성한 화원 속에 있었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색상의 꽃이 발치에서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던 잔영.
하지만 현실은 어두침침하고 검푸른 작은 방이었다. 룸메이트 나즐리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고, 다급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살짝 열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지급한 파자마를 입었고, 한 사람은 그 위에 바막이라 불리는 후드자켓을 입고 있고 다른 하나는 털실로 짠 스웨터를 덧입고 있었다.

바막이 턱짓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갈색 곱슬머리에 커다란 코, 콧잔등과 뺨에 가득한 여드름이 인상적인 유럽인의 얼굴이었다. 스웨터는 약간 중국이나 몽골 쪽 인상이었고, 입을 여니 북한말과 같은 억양이 흘러나왔다. 조선족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러시아 출신?

“억지로 끌고 가기 전에 제 발로 나와.”

마트료나는 그 말대로 했다. 영문도 모르는 갑작스러운 초대(사실 납치에 가깝지만)였으나 이들은 그저 심부름을 하는 역할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에게 묻거나 반항을 해봤자 허사일 것이다. 두 명이나 왔다는 것은 그럴 경우 강제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데리고 갈 것이라는 무언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마트료나가 방을 나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바막이 앞에, 스웨터가 뒤에 서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나와보는 한밤중의 복도는 드문드문 있는 조명등의 희미한 빛에만 의지하기엔 힘들 정도로 어두웠으나 두 사람은 익숙한 듯 태연했다.
까닭 모르게 피어나는 두려움을 마트료나는 두 사람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겨내었다.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올라 세 사람은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바막이 손등을 들어 짧게 두 번 노크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데려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황금빛 머리카락을 빛내며 카밀리아가 나와서 마트료나를 맞았다.

“웰 컴, 마트료나. 전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네. 난 카밀리아라고 해.”

그는 간단히 자기 이름만 말해주고 문을 열어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고, 스웨터가 문을 닫았다. 밖에서 불을 켜놓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불은 꺼놓은 상태로 스탠드와 몇 개의 촛불을 밝혀놓은 상태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촛불의 빛을 받아 일렁이는 그림자가 이 밀회에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안에는 카밀리아 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카밀리아가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여기 조그만 애는 내 룸메이트인 돌로리스고, 여기 이 분이 학생회 총무부장이자 차기 여왕에 도전하는 메이브 이졸트 던세이니.”

다리를 꼬고 한 손을 턱에 얹은 채 마트료나의 모습을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던 갈색머리의 아일랜드 소녀가 눈을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름다움을 뽐내듯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트료나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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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듣고 헤어졌지만 인상은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금발벽안의 소녀에게서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의도를 모르는 말을 잔뜩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차가운 몸만이 아니라 혼란스런 머릿속도 더운 물로 씻어내고파 얼른 방문으로 다가가며 주머니에서 학생수첩을 꺼내었다. 그리고 초인종 아래의 접속단자에 갖다 대려는데,

“아흑……”

문 저편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온몸이 햇볕 아래 놔둔 찰흙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살며시 귀를 문에 대자 야릇한 음성이 이어졌다. 하아……, 웃, 아흐으……, 어맛, 아힝…… 등등. 목소리를 작게 내려고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은 역력했으나 틀림없이 끈적한 신음과 거친 한숨의 향연이었다.
설마 지란이 애를 낳고 있을 리는 없고, 다쳐서 아파하는 소리라기엔 너무 음란하니, 어딘가에서 야한 잡지라도 주워서 자위를 하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목소리 톤이 지란과는 딴판이다. 다른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다.
호기심보다 두려운 마음에 수첩을 대고 문을 여니 방 안은 불을 꺼놓았는지 어두침침했다. 그리고 머리만 안으로 슬쩍 내밀며 안을 살펴보았더니,

“아악! 흐읏, 하아……”

책상 위의 스탠드만 켜놓아서 음침한 가운데, 농염한 음성을 꾸준히 토해내는 낯선 얼굴의 소녀가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를 반쯤 가리듯이 엎드려 있는 뒷모습의 주인공은 지란이었다. 지란의 왼손은 소녀의 사타구니에, 그리고 오른손은 왼쪽 가슴 위에 얹혀 있고 그 손가락들이 소금 뿌린 미꾸라지처럼 격렬하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양이 얼어붙은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지란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태연한 목소리로,

“어머나, 벌써 왔어? 난 한참 더 있어야 올 줄 알았지.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괜찮지?”

라고 말하는데 어디서부터 꾸짖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벗어 던져진 교복이 방 여기저기에 나동그라져 있고, 풀어 헤쳐진 타이를 보니 동급생인 모양인데, 왜 야심한 시각에, 여자애 둘이서, 그것도 자기 침대도 아니고 여양의 침대 위에서, 여자끼리 묘한 짓을 해서, 방 밖에까지 들리도록 야한 음성을 발산하고 있는 것인지.

일단 “야! 이게 무슨 짓이야!”라고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어 공기를 축적하려 했다. 그런데 지란이 몸을 슬쩍 일으키더니 자신이 갖고 놀던 동급생을 가리키며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얘는 우리 반 친구 왕노혜야. 예쁘지? 이 가슴 좀 봐. 그냥 한 눈에 뿅 갔다니까. 오늘 체육시간에 옆에서 옷 갈아입다가 처음 알았지 뭐야. 이렇게 크고 예쁜 가슴을 하고 말이야.”

그 말에 절로 시선이 왕노혜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러자 들이켰던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서 팽창하여 그대로 폐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만들 가치가, 분명 그의 가슴에는 있었다.

여양은 저토록 큰 가슴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 이모, 고모, 초중학교 선생님, 대중목욕탕에서 본 어른들…… 그 누구를 떠올려 봐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마찬가지고, 다만 가슴 크기로 유명해서 인터넷에서 봤던 외국 모델이라면 비교할 만은 할 것 같았다.

저 아이는,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허리가 구부러질 거야.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워 있는데도 봉긋이 솟아오른 둥글고 탐스러운 저 수밀도의 열매, 그리고 그 위에 케이크의 장식처럼 살짝 올려진, 작고 귀여운 비밀의 씨앗까지.
여양은 타인의 여체를 이토록 탐스럽고 욕망에 가득한 눈길로 쳐다본 적이 없음을 인식하면서도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모든 이성의 편린들은 저 풍성한 여신의 수확물에 파묻혀 녹아버렸다.

“어때, 어때? 너도 만져볼래?”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란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이토록 간사해 보일 수 있었던가. 늘 과자와 초컬릿을 오물거리던 저 입술이 지금은 치명적인 유혹을 설파했고, 초컬릿이 묻어나던 저 손가락이 풍요로운 언덕 위를 가로지른다. 여양은 저도 모르게 다가간다. 최면에 걸린 듯 몽롱했고,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맡겨놓은 정신은 사고작용을 포기했다.

“아흑, 제, 제발……”

소녀의 반쯤 울먹이는 소리가 여양의 정신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고 현재의 상황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무렵에는 이미 그 손이 극락을 움켜쥔 후였다. 좌여양 우지랄이라고 할까, 여양이 왼쪽을, 지란이 오른쪽 젖가슴을 탐닉하고 있었으니, 심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긴 했으나 너무 늦은 일이었다.

“어때? 최고지?”

지란의 입에서는 침이 한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간의 혐오감도 일었으나, 결국 자신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이상 그런 감정을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지란의 입에서 나온 가늘고 투명한 저 액체가 거미줄이 되어서 이 소녀와 자신의 몸을 옭아맬 것만 같이 느껴졌다.
여양은 일어나 불을 켜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서 말없이 건네주었다.

“왜, 더 놀자.”

지란이 칭얼거리듯 말했으나 여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건 노는 게 아니라 괴롭히는 것 같아. 오늘은 이만 하자.”

여양은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노혜가 옷을 다 입기를 기다렸다가 옆에 앉아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정말 미안해. 처음 만난 사이에 갑자기……”
“처음 같지 않은 걸. 지란이랑 애들에게 얘기 많이 들었거든.”

또 유명세다. 여양은 앞으로 친구 만들기는 참 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전교생에 교사들까지 보는 신문에 여왕 후보로 버젓이 올라서 아무런 활동도 없이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북도정을 지지율에서 앞서고 있는 것만 봐도, 얼마나 자신이 유명해져 있는지는 실감할 만 했다. 자기소개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편리하지 않은가.

노혜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니 두 갈래로 땋아서 리본을 단 귀여운 머리 모양이 드러났다.

“미안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와서 부끄러운…… 짓을 해서……”

고개를 떨구더니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내일 보자는 비슷한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지란은 자기 침대 위에 클 대(大) 자로 눕더니 히죽거리고 있었다.

“으흐, 흐흐, 한창 좋았는데. 내가 쟤 별명 붙였어. ‘탱이’라고, 젖탱이에서 앞자 떼서 탱이야, 히히.”
“야, 너…… 설마 진짜 그거야?”

“그거 뭐?”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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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어둠 속의 손길


찬바람을 많이 쐬어서 그런지 몸이 고단하고 손발이 차가웠다. 여양은 욕실에서 뜨거운 물로 얼른 샤워를 하고 따스한 이불 속에 파묻히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복도로 들어서니 방을 스무 걸음 정도 남겨두고 벽에 삐딱하게 등을 기댄 채 서있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와 블레이저 소매의 장식 색깔이 초록색인 것을 보면 2학년인데, 작은 키와 가냘픈 몸집이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로 아담했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날씬한 정도를 넘어서 야위다고 느껴질 정도여서, 여양은 초등학교 시절 수수깡 공작 시간을 떠올렸다. 마치 노란 수수깡으로 만든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연한 금발과 푸른 눈, 하얀 피부가 눈에 확 띄는 백인 소녀인데 머리에 선글라스를 얹어 놓았고 겨울임에도 아찔할 정도로 짧게 줄인 스커트에 무릎 아래로는 서너 가지 색의 줄무늬가 수놓아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입학할 때 엄격하게 소지품 검사를 했을 텐데 저런 것을 잘도 착용하고 있구나 싶었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올 때 몰래 갖고 왔지 싶은데, 아무래도 재학생에게 신입생과 같은 엄격한 검사를 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복장과 외모 때문에 복도 한 가운데 불량한 자세로 서있을 뿐인데도 왠지 잡지의 화보 촬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하루에 몇 명이나 보고 만나고 하지만 여전히 이색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녀는 가느다란 허리를 뽐내기라도 하듯 상체를 옆으로 꺾고 등을 벽에 기댄 채 한쪽 다리를 털듯이 떨고 있다가 여양을 보고는 허리를 젖히며 튕겨 나오듯 벽에서 몸을 떼고는 몸을 돌려서 정면으로 향했다.

“네가 여왕님이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하긴 TV방송으로 전교에 유명세를 떨쳤으니 무리도 아닌 모양이었다. 여양은 조금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 예쁜 얼굴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심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그런데요.”
“긴장할 거 없어.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뾰족한 송곳니를 살짝 보여주며 그렇게 말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다. 태연한 척 하려던 시도는 실패한 듯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한 마디를 더 보탠다.

“가만히 보니 너도 제법 맛있을 것 같은데. 통통한 게 부드러울 것 같아. 언제 한번 만날까? 후훗.”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설마 정말로 살을 뜯어 먹을 생각인가? 여양은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앳된 외모는 어쩌면 흡혈귀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도 유명하길래 어떤 앤가 직접 보고 싶어서 와봤어. 그 뿐이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라면 아, 그러세요,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하고 넉살좋게 받아넘길 법도 하건만 이 작지만 거대한 소녀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 러시아에서 온 애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뜬금없는 질문. 그게 어때서, 혹은 그걸 왜 물어보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법을 거는 듯한 요염한 눈빛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치 쥐를 바라보는 뱀과 같은,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 저 조그맣고 귀여운 외모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예, 그런데요…….”
“너희들 무슨 사이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 길금윤이 정학을 마치고 풀려났어. 너희 둘이서 같이 만났지? 그 나이프 사건을 되새겨보자면 길금윤의 인질은 그 러시아 아이였고, 넌 그 아이를 용감하게 구해내었어. 훌륭한 미담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었지?”

금윤에 대해서는 교내신문에서도 다루었으니 누구나 알겠지만 만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신문부 기자마저 따돌렸던 그들의 만남을. 수수께끼는 눈사태처럼 점점 거대해졌다.

“하지만 네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아이인지 몰라도 막 고등학교 입학하는 신출내기가 칼로 인질의 목을 겨눈 미친년을 제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우리가 너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특별히 운동이나 무술을 한 것도 아니고 뮤지컬 특기생이라고 하던데.”

우리? 그가 말하는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결국 이럴 때 가장 쉽게 써먹는 해결책은 사랑의 힘이란 거 아니겠어? 아직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내 생각엔 평범한 여자애가 무모해질 정도로 용감해지는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봤어. 어때?”

어떻냐니.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딩동댕, 정답입니다! 혹은 땡! 틀렸습니다. 같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문 여양의 얼굴을 쏘아보던 그는 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나름 고집도 있나보지? 그래봤자 곧 알게 될 거야. 빠르면 내일 당장이라도.”

뚱딴지 같은 말을 하더니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서 큭큭 웃는다. 여양에게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는 대화였다. 기실 대화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지만.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다 마쳤는지 작은 체구의 백인 선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별로 말해줄 생각이 없던 모양이라, 여양은 이름이라도 알아두고자 눈에 힘을 주고 그의 가슴팍을 노려보았다. 겨우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작은 가슴 위, 짙은 녹색 명찰에 하얗게 써있는 한글 이름과 그 아래 조금 작은 크기로 적힌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돌로리스 퀸 Dolores Quinn」

퀸? 여양은 순간 Queen으로 잘못 보았으나 다시 보니 Quinn이었다. 철자는 다르되 발음은 거의 같은 퀸. 순간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만 한 감정이 솟구쳤다. 분명 이 사람도 자신과 같은 놀림을 받으며 살아왔음이 틀림없다, 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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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인 걸. 특히 아랍 문화권에 대한 편견이…… 뭐 좋아, 그 얘기는 다음에 하고, 일단 여기는 유학생이 많은 국제고인데 이런 비인권적인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국제적 망신이 될지도 모른단 말이지. 이 제도를 만든 건 지금 이사회, 그러니까 영화궁 재단인데, 여기는 폐쇄된 곳이고 밖으로의 정보 유출이 차단되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방학이나 졸업 등으로 학생들이 외부로 나간 후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내가 다니는 학교가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게 기분 좋지는 않죠.”

“당연한 일이야. 문제는 학생의 인권만이 아니야. 이런 제도를 만든 이사회의 횡포도 횡포지만 그걸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교사들의 무력함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교장 자리에 어린애를 앉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봐. 이 학교의 선생들은 이사회에 비하면 애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지.”
“아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이 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 건 전부 이사회의 몫이고 교사들은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니까. 이곳이 누구의 돈으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선생들은 아무도 몰라. 막연히 태북그룹이 후원해서 학교가 돌아간다는 정도밖에는. 여기 수업료가 비싸다고 예전에 언론에서 한 번 비판을 했지만 이 섬의 건설과 학교 운영비를 생각하면 택도 없는 거 아닐까? 솔직히 나도 너처럼 장학생이야. 난 글짓기 대회에서 몇 번이나 입상을 한 덕분에 여기에서 공짜로 지내고 있어. 우리 같은 장학생들이 한둘이 아니고, 해외 유학생들의 입학금과 수업료는 한국 학생들의 절반도 안 되거든. 학생들이 낸 돈으로 이렇게 푸짐한 식사를 세 끼 먹으며 지낼 수 있을까?”

여양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품었던 의문이다. 고맙게도 장학생에 뽑혀서 삼 년간 무료로 먹고 자고 배울 수 있게 되었지만 황송할 정도로 좋은 이 학교의 운영비는 어디서 오는 걸까.
유학생이자 장학생인 체링은 졸업 후 자발적인 기부금을 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이런 귀족 학교를, 인공섬을 운영할 만한 자금이 모일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그런 식으로 하려 해. 수감 생활이나 다름없다는 징벌방에서의 생활을 자세하게 싣고,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학교의 부조리함, 그 학교를 쥐락펴락하는 이사회에 대한 비판, 아울러 이사회에 꼼짝 못하는 무력한 교사들까지. 이걸 계기로 학생들이 단체로 항의를 한다면 이 제도가 없어질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 사실 지금도 징벌방에 갇혀 있는 학우가 있어. 그를 풀어주는 계기가 된다면 더 좋겠지.”

과연 신문부의 수석기자, 라고 활어 선배가 말했던가. 여양은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승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그와의 만남은 입학식 날부터 있었다. 다짜고짜 인터뷰를 하자고 접근하길래 매몰차게 거절하고 도망만 다녔는데, 그 덕분에 여양에게 있어 그는 끈질기고 짜증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만 남아 있던 것이다.

이야기를 해보니 승미는 차분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취재 때문에 자주 같이 붙어 다녀서 활인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막무가내에 넉살 좋은 활인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속에 섞여서 지나가는 바람에 들을 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승미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학생이 사고를 당해서 그렇다는 것이며, 여양 자신이 장학생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신문부의 정보력이라는 것이 이토록 넓고 치밀했어나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자, 이젠 더 도망치진 않겠지? 그리고 참, 명심해. 난 아직 네 인터뷰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전 여왕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으니까 인터뷰를 할 이유도 없다고……”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그런 신비주의만 고집하다가는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벌써 북도정이 바짝 추격하고 있어.”
“…….”

여전히 여왕에 대해선 흥미가 없었으나, 북도정이 자신을 앞선다고 생각하면 왠지 분하고 싫었다. 북도정이 여왕이 되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빈나련이든 누구든 한 사람을 정해서 지지선언을 하고 선거를 돕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망설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이름이 주는 운명적인 느낌일까, 아니면 학생들이 자신에게 느끼고 자신에게서 바라는 어떤 기대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여왕의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일까.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승미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났다. 금윤과 나영과 친구들도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얼른 다가가 승미와 나눈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줄여서 전했다.

“고마워, 신경 써줘서. 인터뷰할게, 하겠어. 결심을 하니 편해지는 것 같아. 뭐랄까……, 한 달 동안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금윤은 정말로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양과 마트료나는 금윤 일행이 떠들썩하게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본 후 안도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의 사이에 섞여서 즐겁게 웃고 수다를 떠는 금윤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여자애일 뿐이었다. 부디 저 미소를 계속 볼 수 있기를. 여양은 작아지는 금윤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가자, 마미. 오늘도 힘든 하루였지?”
“그래도 무사히 잘 해결된 거 같아서 기분은 좋아.”
“그럼 우리 목욕탕에 가서 몸이나 담글까?”
“우리 여양은 정말 목욕을 좋아하네?”

“그냥 탕 속에 녹아들고 싶어. 하하하.”
“그런데 사실 나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빌려놨거든. 오늘은 안 되겠어. 지란이랑 가.”
“그럼 할 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지.”

둘은 손을 잡고 식당을 나섰다. 무사히 잘 끝난 기분 좋은 하루.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그것도 두 가지 사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제4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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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09-10-2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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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수록 작가진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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