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모두들 꺼림칙한 기색을 보이며 섣불리 나설 생각을 안 하자 결국 자신이 하겠다며 선지가 나섰다. 컴퓨터를 조작하여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CCTV의 영상을 불러내었다.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로 향한 상태로 여양에게 물었다.

“시간은 언제부터로 할까요?”
“모두 잠이 든 후에 이동했을 것이 분명해요. 밤 10시……? 아니면 12시 이후부터? 새벽엔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6시 이전에 나가는 경우는 없겠죠?”
“그렇다면 일단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로 하죠. 일단 한 네 배 정도로 빨리 돌려볼게요.”

밤 12시에는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제법 보였다. 그들은 모두 종종 걸음으로 둘셋씩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빨리 돌린 영상 속의 소녀들은 축지법을 쓰는 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1시쯤 되니까 로비와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로 회청색의 어둠에 덮여 있는 텅 빈 공간만이 보였다. 옅은 비상등의 빛만이 가장자리에서 푸른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화면 속 세상은 정지된 사진 같았다.

선지는 속도를 더 올려서 다섯 배, 여섯 배로 빠르게 돌렸다. 순간 시커먼 그림자 훌쩍 나타났다 사라져서 정지시키고 뒤로 돌려보니 손전등을 든 양복차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날의 당직 근무자였다. 키가 크고 긴 머리를 뒤로 묶어서 선지와는 전혀 달라보였다.

“전날 당직자의 모습이에요. 들어보니 이후로 잠을 잤다고 하네요. 저는 다음날 아침 6시에 교대를 했는데, 자고 있더군요. 아시겠지만, 원래 자면 안 되는데, 모두들 잠을 자요. 드나드는 학생도 없을 것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잠이 안 와서 돌아다니는 정도일 테니까 라고 가벼이 생각해왔던 거죠.”

약간 변명에 가깝긴 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은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이다. 안에 사는 사람은 학생과 교사, 교직원들뿐이다. 수상하거나 낯선 사람은 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만큼 이번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대로 대처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다는 과오를 남기기도 쉬울지 모른다.

“앗, 잠깐만요!”

멍하니 손에 턱을 괴고 반쯤 졸던 여양이 별안간 외쳤다. 오랫동안 정지 화면처럼 보였으나 아까처럼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뒤로 돌려서 속도를 줄여 재생하자 로비를 지나 출입문으로 향하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여양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파자마 위에 덧입은 코트 차림, 구불거리는 헤어스타일, 안경, 통통한 몸집.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원나영의 모습이었다.

선지도 여양 못지않게 놀랐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영상이긴 해도 죽은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신비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여양은 자신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모습을 가리켰다.

“나영 선배의 모습이에요.”
“나도 알아보겠어요. 방에서 발견 당시에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지만 틀림없어요. 그런데 어째서 건물 밖으로 나가는 거지? 시간은 새벽 1시……”

선지는 수첩을 꺼내어 시간을 기록했다. 여양은 속으로 외쳤다. 체링의 말이 맞았어, 역시 CCTV에 뭔가 있었던 거야! 오래 지나지 않아 그러한 확신을 더해주는 증거가 늘어났다. 약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또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찍힌 것이다. 이번엔 한 명도 아니고 두 사람이었다. 작은 키와 훤칠한 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금발.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여양 자신이 마트료나를 LXG의 손아귀에서 데리고 나온 직후로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숙사에 설치된 CCTV는 이것 하나뿐이다. 건물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함과 조급함으로 다시 빨리 돌려봤지만 화면은 무심하게도 텅 빈 입구만을 비추고 있었다. 10분 정도 지나니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만이지만 어느 정도 신원 파악은 가능했다.
선지가 조심스레 누군지 알아보겠냐고 물어봐서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복이 아닌 사제 코트를 입은 키가 훤칠한 쪽은 분명 카밀리아고 작은 쪽은 돌로리스일 것이다. 이후로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다른 사람은 들어올 줄을 몰랐다.
어느덧 6시가 되어 화면이 조금씩 밝아지고 작은 키에 단발머리를 한 선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후에 일찍 일어난 학생 몇 명이 체육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LXG의 다른 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왜 돌아오지 않은 걸까. 6시까지 모두 본 후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특별히 부탁하여 6시 이후의 기록도 보기로 했다. 이후에도 기숙사로 들어오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운동을 했던 체육복 차림의 뒷모습이 보일 뿐. 그때 혼자서 들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교복 차림이었고,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거의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여양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일단 화면을 멈추고 프린터로 출력해달라고 부탁했다. 밤중에 나간 적이 없는데도 지금 들어왔다는 것은 밤 12시 이전에 기숙사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 사건과 연관이 없다고 해도 그냥 놔둘 수 없는 문제기 때문이다.

“뒷모습밖에 없어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징벌감이에요. 기숙사에서 잠을 안 자고 다른 곳에 있었다니.”

선지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지만, 여양은 왠지 이 소녀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밤중에 기숙사를 나간 후 돌아오지 않은 원나영은 자신의 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그 뒤를 따라 나온 LXG 다섯 명 중에서 둘만 들어오고 셋은 오리무중이다.
그렇지만 뒤엉킨 실타래와 같은 상태에서 한쪽 끝은 붙잡은 느낌이었다. 이제 살살 잡아당겨서, 묶이거나 끊어지지 않도록 풀어나가면 분명 풀려나오리라. 여양은 저 수수께끼 같은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긴 창문, 바닥에 떨어진 안경, 목에 난 이중의 상처, 밤중에 기숙사를 나온 나영와 그 뒤를 따른 LXG 멤버들. 되돌아온 것은 총 여섯 명 중에서 단 둘. 그리고 정체모를 한 명.

그리고 잠에서 깨지 않은 금윤, 증거 사진을 손에 넣은 LXG. 이 둘을 잇는 해결의 실마리는…… 마법? 에메랄드 아이의 마법!

“일단 기록해두는 것이 좋겠어요.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까 정지한 화면과 함께 출력해주세요.”

선지가 프린터를 만지고 A4지에 컬러로 뽑은 사진을 건네주자 여양은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고 덧붙이듯 물었다.

“저기,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있어요. LXG의 메이브와 만난 적이 있다고 하셨죠?”

선지는 질문의 의도를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양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답변을 해주었다. 이걸로 재료는 모두 모은 셈이었다. 이제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요리하는 과정만 남은 셈.

여양은 나영과 LXG가 나가는 모습, 두 멤버와 누군지 모르는 뒷모습이 찍힌 장면을 출력받고 경비실을 나왔다. 이제 준비는 끝났고 한 가지 증명해야만 할 가정만이 남았다. 그것은 바로 에메랄드 아이, 본인에게 확인해야만 했다.

어느새 시간은 12시가 넘어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무거운 몸과 달리 정신만은 멀쩡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기쁨과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가벼운 흥분이 온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고백을 앞둔 설레는 기분과 흡사했다.


(제7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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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란이 지적한 대로 금윤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은 자고 있어서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크지도 않은 방에서 룸메이트가 몰래 자살을 했다면 몰라도 누군가 들어와 옆에서 자던 사람의 목을 조르고 커튼에 매다는 일을 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을까. 보통은 저항을 하거나 비명을 지르느라 큰 소리가 날 것이고 그 서슬에 깨어나는 것이 정상이다. 여양은 얼른 변명거리를 생각해보았다.

“만에 하나 말야, 범인이 이런 범죄의 경험이 있거나 해서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고 있는 나영 선배의 목에 끈을 두른 후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목을 졸랐다면……? 그런 다음에 금윤 선배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시신을 들어 커튼에 목을 묶어 자살로 위장한 다음에 창문을 닫아 잠그고 방으로 나갔다. 어때?”
“야, 이 학교에 무슨 암살의 전문가라도 있다는 거야?”

지란은 여전히 누운 채로 툴툴거렸다. 물론 여양 자신도 만화 같은 소리란 것은 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금윤이 범인이라는 가장 쉽고 편한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럼 어쩌라고? 넌 무슨 뾰족한 생각이라도 있어?”
“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기자 불러다가 학교 신문에 대문짝하게 내지. 사실 진상은 이렇다! 하고 말야.”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다, 그래.”

여양은 지란의 종아리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골똘히 생각하던 금윤이 말했다.

“정말 미안해. 어째서 나는 그날 밤에 깨어나지 않았던 건지, 꿈도 안 꾸고 그저 깊이 잠들었던 기억밖에는 없어. 왜 그랬을까?”
“그건 마법의 힘 때문일 거예요.”

돌연 체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뜬금없이 마법이라니? 궁금함이 넘쳐흐를 듯한 모두의 얼굴을 보며 체링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원래 탐정은 진상을 알아도 미리 말을 하지 않아요. 이야기의 재미가 없어지니까요. 하지만 저야 뭐 명탐정도 아니고, 제 생각이 반드시 맞다는 보증도 없으니 미리 말씀드릴게요. 일단 CCTV에 무언가 있음은 확실해요.”
“그럼 마법이라는 건 뭐야? 설마 누군가 마법으로 나영 선배를……?”

세상 모든 밀실 살인을 허무하게 해결하는 그야말로 마법 같은 해결책이 과연 존재한다는 것일까. 방 밖에서 저주나 마법의 힘으로 방 안의 사람을 죽인다든지? 하지만 체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신이 내린 눈동자, 에메랄드 아이의 마법이죠.”

이어진 체링의 말은 여양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 듯 했다. 어둡고 흐린 영상이 돌연 밝아졌다. 누군가 커튼을 젖혀 막혀 있던 빛의 흐름을 방 안으로 끌어들이기라도 한 듯이.

“좋았어! 지금 당장 CCTV를 확인하러 가겠어!”

여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났다. 미쳤냐, 9시가 다 되었어, 하는 지란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일은 시간을 끌수록 금윤에 대한 의심만 커질 뿐이다. 한시바삐 해결해야 한다. 그런 생각만이 가득했으니, 시간이 문제될 리가 없는 것이다.

모두들, 심지어 금윤마저도 내일 가라고 했으나 여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교장의 문서만 챙겨서 방을 나섰다. 마미와 금윤이 뒤따라오며 같이 가겠다고 말했지만 애써 거절했다.

“여럿이서 몰려가면 되레 역효과가 날 것 같아요. 이 문서를 지닌 제가 교장의 대리인으로서 비밀스럽게 행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상대방도 부담이 덜할 거예요. 보통은 CCTV의 영상을 학생에게 보여주거나 하진 않잖아요?”

금윤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미는 추울 거라며 자신이 입던 스웨터를 입혀 주며 조심하라는 말을 더했다. 여양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자신감을 표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마트료나의 걱정스런 눈빛이 그의 뒤를 조심스레 좇았다.


* * * * * * * * * *


어느 정도의 예상은 했지만, 경비 직원들은 난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퇴근을 하고 당직 근무자를 포함하여 서너 명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긴 했으나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교무주임에게 연락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분량이 너무 많아서 보기가 힘들다며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여양은 단호했다.

“제가 밤을 새서라도 확인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학생을 여기에 밤새 붙잡아두는 것도 그들에겐 곤란한 일이었다. 원칙적으로 밤 10시 이후엔 기숙사 밖을 나가는 것은 물론 방밖을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정문의 유리문은 10시에 직원이 잠그지만, 직원들이 밤늦게 퇴근하거나 순찰을 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놔두고 있고, 문 옆의 경비실에 직원 한 사람이 상주하도록 되어 있으나 대부분 10시가 넘으면 숙직실로 들어가 잠을 잔다. 아이들은 10시가 넘어도 태연히 밖을 드나들고 로비에서 자판기 음료를 뽑아 마시고 잡담을 나누곤 했다.

CCTV 영상을 확인한다는 것은 그런 잘못된 관행을 겉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직원들이 흔쾌히 보여주고 싶을 리가 없던 것이다. 그들의 고민을 깬 것은 손선지의 결단이었다.

“할 수 없어요. 이건 중대한 문제이고, 살인 사건일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지금 이 사건 때문에 지금 누명을 쓰고 의심을 받고 있는 학생이 있다고요! 교장 선생님도 진실을 규명해서 학생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싶어 하셔서 저에게 대리인의 권한을 주신 거라고요! 저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교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요구를 하러 온 겁니다.”

여양이 그렇게 쐐기를 박으니 직원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더 막는다면 살인 사건의 해결을 방해하는 것이며, 교장의 대리인에 협조하지 않는, 즉 교장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 되는 셈이니까.
아무리 교장이 어린 아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비서인 교무주임이 교장과 함께 행동하며 의사결정에 개입하고 있으니까 대리인 역할을 맡는 데에는 그의 승인도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실제로는 교무주임 몰래 받은 직인이지만). 그러니 교직원 중에서 사실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교무주임을 거스를 수 없는 경비 직원들은 그 말에 따라야만 하는 입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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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밥을 먹고 TV 앞에 모여서 쇼 프로그램을 본 후 방에 돌아오니 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TV를 더 보고 오겠다는 지란을 놔두고 마미와 함께 방으로 돌아오니 체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에 등을 기대고 쭈그리고 앉아 작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선물 상자 비슷한 게 세 개 그려진 약간 낡은 책이었다.

“체링아, 벌써 왔니?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얼마나 기다렸어?”

그들이 오는 줄도 몰랐던 듯 책에만 시선을 집중하던 체링은 여양이 말을 걸자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얼굴을 돌렸다. 늘 그렇듯 약간 졸린 듯한 부드러운 눈매와 옅은 미소는 여양에게 있어 인자한 할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시간은 모르겠어요. 시계를 안 봐서.”
“진짜 미안해. 널 부르는 걸 깜박 잊었어. 저녁은 먹었니?”
“저녁……?”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손을 턱으로 가져가며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자 여양이 학생수첩을 꺼내어 휘저으며 말했다.

“알았어! 진~짜 진짜 미안해. 좀 있으면 지란이가 먹을 거 사갖고 올 테니 그거 같이 먹자. 오늘밤엔 좀 긴 회의를 해야 될 거 같아.”

체링은 여양이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깡마른 몸이 부실하게 휘청거리자 여양의 통통한 팔뚝이 휘어잡듯 가슴께를 감으며 안았다. 다른 손으로 문을 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으로 들어갔다.

“너 진짜 많이 먹어야겠다. 뼈에 가죽만 둘러놓은 것 같아. 하긴 너 같은 애가 나보단 인기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말야.”

체링은 대답 대신 피식 웃기만 했다. 따라 들어오던 마미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인터뷰는 잘 되었나요?”

체링의 질문에 여양은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라니, 그 정도는 아니야. 내가 무슨 신문부 기자도 아니고. 그냥 우리가 함께 궁리했던 질문을 모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그래도 사실 수확도 제법 있었어. 사진을 몇 장 얻어 왔거든. 근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들 모이면 하자. 나 내일까지 외워야 되는 게 있어.”

그렇게 하여 잠시간 숙제 시간이 이어졌다. 마미도 지란의 책상에 앉아 미리 갖고 온 숙제를 하고 문제집을 풀었고, 체링은 원목 무늬 장판이 깔린 기숙사 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서 책을 읽었다.
뒤늦게 방에 들어선 지란이 보고 놀라서 체링을 반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기숙사의 설비는 꽤 좋은 편이지만 3월에 바닥 난방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시스템 에어컨의 사용시간이나 강도에는 제한이 없어서 뜨끈한 공기가 방 안을 빵빵하게 채우고 있었다.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금윤이, 조금 더 있다가 지란이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여양이 경과 보고라는 이름하에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있었는데 지란은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다며 투덜대었다. 그리고는 쇼프로에 나온 인기 연예인이며 드라마 내용을 전해주는 등 자기가 주인공이기라도 한 듯 열렬히 수다를 떨면서 모두의 이목을 모으는 바람에 이야기는 잠시 본론과 멀어졌다.

마침내 수다의 소재가 다 떨어졌는지 아니면 입이 지쳤는지 지란이 침대에 벌렁 드러눕자 방 안으로 들어온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체링이 입을 열었다.

“이제 재료는 거의 다 모였군요. 하나만 더 있으면 되겠어요.”

멍하니 있던 여양은 목캔디를 먹은 목처럼 귀가 확 트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하나만 더?”
“네. 기숙사 입구에 있는 CCTV를 돌려봐요. 나영 선배가 숨지기 전날 밤 기록을요. 운이 좋으면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최소한 범인의 윤곽은 알 수 있겠죠.”
“정말? 어째서? 범인이 그날 밤에 기숙사 밖으로 나갔단 말이야?”

여양은 무릎으로 기다시피 해서 체링에게로 다가갔다. 금윤도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방이 1층이니까 범인은 창문으로 들어갔다 나간 것일까? 수첩이 없이는 방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가능하니까……”

여양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무언가 자신 나름대로 그날 밤의 진상이 드러나는 듯 했다. 희미하고 흐릿한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두서없이 말로 표현해보았다.

“그렇다면 범인은 밤에 기숙사 밖으로 나가서 창문을 통해 금윤 선배의 방으로 들어가 미리 갖고 있던 가느다란 끈으로 나영 선배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커튼으로 목을 매어 자살로 위장하고 밀실을 만들기 위해 창문을 닫고 잠근 후 그대로 방을 나갔다, 라는 이야기가 되나?”

얼핏 들어보면 그럴싸했다. 여양은 금윤에게 다시금 미진한 부분을 재확인했다.

“선배는 창문을 최소한 이틀 정도는 연 적이 없다고 했죠? 잠갔는지 여부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고요.”
“응.”
“그렇다면 창문은 닫기만 하고 잠그지 않았다고 봐도 될 거예요. 그럼 창문의 유리에 지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경비실에 알려서 지문을 채취하라고 해야겠네요.”

여양은 마치 문제를 해결한 탐정처럼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던 지란이 반쯤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말야. 여전히 이상하지 않아? 창문을 열고 닫고 사람 목을 조르고 그 소동이 일어났는데 금윤 선배는 계속 자고 있었다며.”

윽, 여양은 목에 뭔가 걸린 듯한 소리를 내었다. 차마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미심쩍은 부분이며, 금윤 범인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창문을 잠근 것은 금윤에게 유리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했다. 금윤이 범인이라면 창문을 잠글 리가 없다. 방 안엔 두 사람뿐인데 밀실 상태를 만들고 한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남은 사람이 범인이 되니까, 범인이 왔다 갔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창문이나 방문을 열어놔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반면 범인은 그런 불리한 상태를 만들어놓을 리가 없으므로 금윤이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다만 그럴 경우 범인이 어떻게 그 밀실에 들어갔다 나갔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인데, 범행이 벌어지기 전날 창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밀실은 밀실이 아니게 된다. 다만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금윤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애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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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혹시, LXG라고 아시나요?”
“유학생들의 사교 모임 아닌가요? 이름만이라면 들어봤는데.”
“그 LXG 아이들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워낙 매일같이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서……. 누가 LXG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아, 대표라는 메이브 학생은 잘 알아요. 안다고 해도 가끔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정도지만.”

“혹시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요?”
“그것도 글쎄요. 메이브와 함께 다니는 유학생들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긴 했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 마음대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죠. 이렇게 교장 선생님의 대리인이라는 자격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여양은 속으로 한송이 교장 만세를 외치곤 질문을 이었다.

“당시의 일은 기억하고 계시죠? 가령 시신의 얼굴이라든가……”
“얼굴, 이요? 그리 끄집어내고 싶은 기억은 아니지만, 쉽게 잊을 수는 없겠죠.”
“얼굴이 붉었나요? 충혈되어 있었던가요?”

처음 얼굴이란 낱말을 입에 담았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찌푸린 표정을 지었으나 금방 생각을 정리하며 얼굴을 폈다. 눈만 살짝 치켜뜬 자세로 잠시 생각하던 선지는 다시 마주보면서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확실히 그랬네요. 목 주위도 그렇고, 얼굴과 감긴 눈가에 피가 고여서 붉었어요.”

이 부분은 의사의 증언과 일치했다. 더 캐물을 필요도 없었다.

“옷이 찢어지거나 손에 상처 같은 건 없던가요? 나영 선배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경은 어디에 있었죠?”
“파자마 차림이었는데 특별히 심하게 구겨지거나 찢어지진 않았어요. 안경은…… 안경은 발치에 떨어져 있었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길 때 누가 밟을까봐 내가 책상 위에 올려놨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밤새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갔다 나갔는지 알 수 없을까요?”
“사실은 알 수가 없어요. 기숙사의 CCTV는 출입구와 옥상에만 설치되어 있어서 내부는 볼 수가 없죠. 처음엔 내부에도 설치하려고 했는데 학생들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어서 취소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렇군요……. 발견 당시 창문 상태는 어땠나요?”
“나도 방이 1층이라 외부인의 침입 여부가 신경이 쓰였는데, 확실히 잠겨 있었어요. 크래들에 꽂혀 있는 학생수첩도 확인을 했으니까, 침입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겠죠?”

여양의 어깨가 늘어졌다. 점점 기운도 의욕도 얼음처럼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새로운 증거, 의혹을 풀어줄 새로운 사실은 드러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것 아닐까. 나영이 살해되었다면 범인은 바로 옆에 있는 금윤 밖에는 생각할 사람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수학 주관식 문제의 답은 0과 1 같이 단순명료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답이 0.74235와 같이 나왔다면 계산 과정에서 뭔가 잘못하지 않았나 살펴봐야 하지 않은가. 여양은 지금 자신이 명확한 정답을 외면하고서 대신 복잡하고 어려운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보 같고 미련하다. 스스로에 대한 욕설을 퍼부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써본다.

“아! 사진하니까 생각이 났어요!”

선지가 돌연 손뼉을 치면서 소리를 쳤다.

“그게, 처음에 이사회에서 사진을 요구하길래 출력을 해서 주었어요. 전 당연히 뽑아서 준 것인데, 어제 카메라를 통째로 달라고 해서 줬지요. 디지털 카메라니까, 메모리 안에 사진은 저장되어 있던 거예요.”
“그렇다면, 설마 저장된 사진이……?”
“제가 출력하려고 PC로 데이터를 옮겼는데, 그게 아직 저장되어 있어요. 즉 사진을 갖고 있다는 얘기죠.”

가만히 듣기만 하던 승미는 수첩에 조그맣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건 사실 그림으로, 눈에서 별처럼 과장된 빛을 반짝이는 여양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여양의 눈에선 정말로 빛이 번뜩이는 듯 했다.

그 다음엔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무리 교장의 대리인이라고 해도 고등학생에게 목을 맨 교우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선지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필요하다는 여양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유연해 보이면서도 실은 완고함을 잃지 않는 원칙주의자 선지의 승리였다. 보여는 주되 출력은 할 수 없다, 시신이 찍히지 않은 발견 당시 방의 풍경이 담긴 사진은 출력해주겠다, 라는 합의를 도출하고 세 사람은 경비실로 향했다.

기다리던 확실한 물증을 보고 손에 넣게 되어 두근두근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말로만 들었던 증언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었다. 사진으로도 창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무가치한 일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지민과 선지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음은 분명하지만, 혹시나 착오를 일으켜서 잘못된 증언을 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했다. 사진은 모두 아홉 장으로 방문에서 본 목을 맨 시신의 모습에서, 늘어진 발이 바닥에 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진, 바닥에 눕힌 시신, 잠긴 창문 등을 증거로 남겨놓았다.

그 중에서 여양은 시신을 병원으로 이송한 후 찍은 빈 방의 모습이 담긴 세 장의 사진을 받아서 경비실을 나왔다.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승미가 입을 열었다.

“어때? 뭔가 알 것 같아?”

여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죠. 제가 무슨 명탐정도 아니고, 저 혼자 궁리해봤자 나오는 것도 없어요. 지난번처럼 친구들이랑 상의해보려고요. 좋은 힌트나 단서를 얻거든요.”
“확실히 브레인 스토밍을 하면 혼자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여양은 브레인 스토밍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발길은 자연스레 식당으로 향했고 마침 저녁 배식이 시작되고 있던 참이어서 곧바로 밥을 먹기로 했다. 여양은 수첩을 꺼내 지란과 마미, 금윤에게 밥을 같이 먹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생선 굽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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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에는 금윤을 비롯해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자기 방으로 불러 모아 자신의 성과를 자랑스레 들려주었다. 뻐기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멋진 수확이었고, 당연히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게 있었다.
예상대로 지란과 마트료나는 장하다고 추켜세워 주었고, 금윤도 겉으로 지나치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억누르고 있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자제하고는 있으나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던 체링은 모두의 말이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 후 입을 열었다.

“결국 새로이 밝혀낸 것은 별로 없군요.”
“뭐?”

여양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상치도 못한 말이기 때문에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고 입이 열린 것이다.

“LXG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은 감지민 선생님의 증언으로 뒷받침이 되었지만, 범인을 추측할 만한 단서는 나오질 않았잖아요.”

확실히 그랬다. 아직 금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도,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만한 단서도 얻어낸 것은 없다.

“그리고요, 그 말을 들으니 원나영 선배의 죽음은 타살임이 확실해졌어요.”
“어째서? 역시 이중의 상처가 문제인가?”
“물론 그것도 있죠. 정황상 가느다란 끈으로 목을 맨 후 그것을 풀고 커튼으로 묶어서 위장했을 거예요. 현장에 끈이 남지 않았나, 나중에 방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경비직원을 만나서 물어보세요. 그리고 울혈로 얼굴이 붉어졌다면 그건 교살, 타인이 목을 매서 살해했다는 증거예요. 자살이라면 얼굴에 핏기가 없이 창백한 상태여야 해요.”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체링은 고개를 잠시 갸우뚱거렸다.

“모르겠어요. 책에서 읽은 것 같아요. 아마도 추리소설이겠죠.”

체링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냥 희소식이라고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나영이 타살되었음이 밝혀졌음은 현재로썬 오히려 금윤에게 불리한 상황인 것이다. 차라리 나영의 죽음이 자살임이 확실하다면 금윤의 혐의는 없어지는 셈이니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여양은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이 일에 뛰어든 이유는 두 가지 아니던가. 나영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살이라면 금윤은 범인이 아니다, 라는. 여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직은 기뻐할 때가 아니에요. 이 학교는 섬 안에 갇혀 있으니, 일종의 거대한 클로즈드 서클인 셈이에요. 그렇지만 학생과 교사에 직원까지 합하면 천 명은 되는 용의자가 있지요. 소설처럼 간단하게 범인 후보들이 등장하지는 않는다구요. 그러니 전에도 말했지만 정보는 많을수록 좋아요. 무엇이 중요한지 골라내는 게 힘들지만요.”
“하지만 넌 지금 바로 하나를 찾아내었잖아. 얼굴에 피가 모여 붉었다는 증언을 듣고 타살이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린 현장사진도 없고, 발견 당시 정황도 상세히 모르니까요.”
“알았어. 내일은 내가 최초 발견자를 만나볼게. 물론 금윤 선배가 가장 먼저 보긴 했지만 놀라고 충격을 받아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모양이니까, 선배의 연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경비 직원, 그 사람을 만나야 겠어.”
“어…… 나 그 사람 이름 기억해.”

멍하니 듣고 있던 금윤이 무심코 말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금윤의 얼굴로 쏠렸다. 여양은 코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물었다.

“정말요? 그럼 진작 말씀을 하시지! 누군데요?”

조금 당황한 듯 했으나 금윤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에 만난 적이 있거든. 마침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 데리고 나온 사람이어서. 손선지라고……”

윽, 하고 여양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여양도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직원이었던 것이다. 얼굴만 아는 사람이라면 식당과 매점의 아줌마들도 있었지만 이름과 얼굴을 다 아는 교직원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소에 만난 일이 없는 경비 직원 중에서 아는 사람은 오직 손선지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선지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여양을 알아보았다. 서로 대충이나마 아는 사이이니 대화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일런지. 역시나 여양은 직접 부딪쳐보고 판단하기로 마음 먹었다.


* * * * * * * * * *


손선지와의 만남은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오후에 이루어졌다. 매점 바깥에는 카페테리아처럼 커다란 파라솔이 한가운데 꽂혀 있는 통나무 테이블과 등나무로 짠 의자들이 잔디밭 위에 펼쳐져 있었다. 여양은 승미를 대동하여 선지와 마주보고 앉았다.
이미 전날 저녁에 전화를 통해 간단한 용건을 말해두었기 때문에 만나게 된 이유부터 시작하는 번거로운 사전 질의는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상황판단이 빠른 선지는 여양이 교장의 대리인이 맞는지만을 확인하고(즉 교장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으로는 신문에 실려 있는 내용과 차이는 없지만, 그것만이라면 구태여 만나자고 할 이유는 없겠죠.”

과연 이해가 빨랐다. 여양은 고개를 끄덕이곤 연습장을 펼쳐서 조심스레 밤늦게 궁리하며 적어놓은 질문을 확인했다.

“나영 선배의 시신에 처음으로 손을 댄 사람이 맞으시죠?”
“네, 맞아요. 금윤 학생이 몰래 건드리지 않는 한에는.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딱히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요.”
“신문에 따르면 사진을 찍은 후 목에 감긴 커튼을 풀고 그, 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잠깐 말을 더듬고 좀 더 완곡한 혹은 정중한 표현인 숨이 끊어졌다고 바꿔야만 했다. 여양은 등에서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옆에 교내신문 기자가 있는데 왜 자기가 이런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승미를 원망했다.
순전히 초조하고 긴장되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심리에서 비롯한 마음이었지만. 제갈승미는 처음 공언한 대로 방관자와도 같은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진을 갖고 계신가요?”
“그때 찍은 사진은 카메라 째로 이사회에 제출했어요. 그쪽에서 넘기라고 해서요.”

여양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사진이 무엇보다 필요한 데 말이다. 하지만 사진이 유출되었다면 그럴 만한 사람은 선지밖에는 없을 것이다. 메이브와 LXG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여왕이 아닌 이상 이사회와 접촉할 수는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본론으로 가야만 했다. 여양은 가장 중요한 의문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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