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왠지 효범의 방에 찾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들어오라는 마트료나의 목소리가 들려서 안을 들여다보니 침대에 앉아 있는 마트료나와 그의 옆에 서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드나무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서있는, 교내의 과열된 인기로 인해 반쯤은 우상화된 그 인물은 바로 학생회장 빈나련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를 보러 왔던 여양과 지란은 졸지에 두 사람의 기세에 압도당해 학생회실에 불려나온 것처럼 인사를 꾸벅하고 한쪽 구석에 뻘쭘하게 서있어야만 했다. 나련은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 안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냥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어떤 용건인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여양의 대담한 질문에 효범이 한 마디 하려고 나섰으나 나련이 손을 살짝 내밀어 저지했다. 훈련이 잘 된 동물처럼 효범은 즉시 물러났다.

“이 아이가 전임 여왕이신 월랑님을 만났다고 주장해서,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지 물어보고 있었을 뿐이야.”
“저에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어요.”
“네 말대로야.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아.”
“그렇다면 저에게 물어보시죠. 정신을 잃고 있던 마트료나를 발견한 건 저니까요.”
“그게 정말이야?”

침착하고 당당하던 나련의 얼굴과 목소리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는 여양의 앞으로 다가갔다. 과연 카리스마 학생회장, 뿜어 나오는 힘에 압도당하는 듯 했다. 안광에 쏘여 몸이 간지러운 것만 같았다.

“네가 여왕님?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너에 대해선 알고 있어.”
“그 동영상을 보셨군요. 좀 부끄러운데…….”
“넌 용감하고 훌륭했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선생님이나 교직원을 부르길 바란다.”
“그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그게 어디였지?”
“북도에 있는 큰 정원이었어요. 원래 북도엔 함부로 가면 안 되는 거지만 저는 그날 여기에 막 도착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북도라면……”
“사계절 화원 말이구나.”

효범이 끼어들었다. 1학년 세 사람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그에게로 향했다. 효범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학교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이상한 정원이지. 꽃과 열매가 사계절 내내 피고 열리는 곳이야. 지금 같은 한겨울에도 봄에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할 것이 없이 모두 만개해 있지. 제주도니까 따뜻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더운 한여름에도 사과며 체리가 열려 있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세상에, 말 그대로 사계절 내내 꽃이 핀 화원이란 말이죠?”

지란의 감탄을 들으며 여양은 그때 일을 되새겼다. 확실히 수벽과 회양목이 울타리처럼 둘러쳐 있어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진 못했지만 안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가 가득함을 본 기억이 난다.

그에 덧붙여 마트료나는 마치 백일몽과도 같았던 월랑과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말했다. 물론 자신의 비밀스러운 첫키스 이야기는 쏙 빼놓은 채였지만, 처음 그의 눈에 띄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곤돌라와 함께 사라진 일은 기억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말했다.

“모퉁이를 도니 사라졌다……라.”

효범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들 다섯은 어느새 방 가운데에 둘러앉아 지란이 사온 다과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효범의 의문에 마트료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하의 왼쪽은 수벽으로 막혔고 오른쪽은 화원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도록 탁 트여 있었어요. 가까이엔 나무 한 그루 없었고요.”
“확실히 그 큰 곤돌라를 숨기기엔 무리야. 자신의 몸이라면 수풀 사이에 엎드리거나 잠수라도 해도 숨을 수는 있겠지만.”

나련도 그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지란은 혼자 열심히 버석대며 과자를 먹고 있었고, 다른 네 사람은 골똘히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나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있었네. 너의 룸메이트는 언제 오는 거니? 벌써 시간이 꽤 늦었는데.”

마트료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보며 말했다.

“올 때가 되었어요. 아, 지금쯤 기도할 시간인 것 같은데……”
“기도?”

마치 효범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라는 듯 부리나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자 들어선 사람은 히잡을 두른 소녀, 마트료나의 룸메이트 나즐리였다. 외국 유학생이 많은 학교의 특성상 최대한 출신이 같은 유학생들끼리 방을 함께 쓰도록 유도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금년의 유학생 중에서 러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온 학생은 이들 둘 뿐. 그래서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가톨릭인 마트료나와 무슬림인 나즐리는 종교적인 면에서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생각보다 금세 친해진 사이였다.

여양과 지란은 이미 만나서 인사를 나눈 사이지만 나련과 효범은 처음 보기에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즐리는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숙이고는 얼른 들어가 자기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나침반이었다.

“나 바보야, 나침반 잊었어.”

스스로를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마트료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나즐리, 시간은?”
“괜찮아.”

나즐리의 한국어는 아직 능숙하지 않은지 짧았고 발음도 어색했다. 한국인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수준인 마트료나나 억양은 어색해도 낱말과 문법은 완벽한 체링에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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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real florist 2009-11-1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