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종이조각 하나라도 엄청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 여양은 조금이나마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 듯한 심정을 느꼈다. 그것은 딱히 양식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정성들여 손으로 쓴 위임장이라는 제목의 짧은 문서였는데, 적힌 글자는 모서리가 동그란 것이 귀엽고 예쁜 어린 소녀의 글씨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뒷면에 두드러진 글자의 자국을 보면 제법 힘과 정성을 들여서 썼음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글의 가장 아래 부분에 서명과 함께 찍혀 있는 교장의 직인이 이 종이를 권한이 담긴 공식적인 문서로 둔갑시켜주는 징표가 되어주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종이 쪼가리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펼쳤던 모험담을 여양은 굳이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때 생각 없이 보여줬더니 지란은 ”로리 교장에게 쳐들어갔단 말야? 멋져! 대단해! 훌륭해! 쌈박하다고!”라며 호들갑을 떨어대었다. 쌈박이 뭐냐, 고 면박을 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위임장을 조금만 보자며 매달리는 통에 이야기를 꺼낸 스스로를 속으로 탓하며 마지못해 꺼내긴 했으나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금주법 시대의 폭력 형사가 경찰 배지를 보여주듯 슬쩍 시늉만 했을 뿐이다.
더 보자고 떼를 써도 손때가 탄다, 구겨진다는 둥 하며 파리 쫓듯 손을 내저으니 또 자기가 싫어졌냐며 우는 척까지 하며 관심을 끌어보려 했으나 그 역시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여양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한 채로 저녁으로 가져온 돈까스를 썰면서 오늘 일어난 일을 곰곰히 되짚어 보았다.

신문부의 제갈승미를 만났으나 냉엄한 현실의 벽을 깨달았다. 신문부라고 모든 정보를 입수한 것은 아니었고 일개 학생의 처지로는 조사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LXG가 어떻게 신문부도 모르는 증거를 갖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인 상태였지만. 이어서 찾아간 학생회에서는 처음 실망감을 느꼈다. 그들은 사건에 대해 무관심해 보였고 해결의 의지도 없었으며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무작정 교장실 앞으로 찾아갔으나 교장실은 기업 중역의 사무실처럼 이중으로 꾸며져 있었다. 문이 커다란 교장실 안에 비서가 앉는 자리가 있고 진짜 교장실이라 할 수 있는 집무실은 그 안에 별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 즉 방 안에 방이 있는 구조였는데 집무실에는 비서이자 교무주임 관채향이 있었다.
영화궁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 학교에서 근무했던 교사지만 이곳에서는 교무 관련 업무와 교장의 비서 역할을 전담하고 있어 현재로는 교사라기보다 교직원에 더 가까운 위치였기 때문에 교무실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교장실에 가면 교장을 만날 거라는 순진할 정도로 단순한 생각만 품고 무작정 찾아온 여양은 적잖이 당황했다. 상대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삼십대의 노련한 교사이자 행정가인 것이다.

여양은 직구로 승부하자는 생각에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으나 간단하게 거절당했다. 학생들의 고민상담 같은 것은 투고함에 편지를 넣거나 내부 게시판에 글을 쓰면 된다는 형식적인 답변만을 내세운 채로. 학생들을 공포와 무력감에 짓눌리게 만드는 데 있어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관채향의 앞에선 여양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무력감만을 곱씹으며 낙담한 채로 교장실을 나선 여양과 승미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떤 사람을 만났다. 복고풍인가 싶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 깨끗한 피부가 도드라져 보이는 훤히 드러난 이마, 주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교복 차림. 큰 키와 날씬한 몸매. 언젠가 한 번 마주친 듯한 기억이 남은 그는 바로 학예부장 진영아였다. 바로 여양을 여왕으로 만들자는 기고문을 신문에 실어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아까 학생회실에서 구석 자리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 의문에 답을 하듯 영아는 여양을 돕기 위해 왔다며 자신이 채향을 따돌리는 사이에 집무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의 도움으로 여양은 교장과 독대를 하는 데 성공한다. 처음엔 두려워하며 채향을 호출하려 했던 한송이 교장도 의심과 괴롭힘을 받는 학생의 구명을 위해 도움을 달라는 여양의 설득에 감화된다. 사실상 교장의 업무라는 것은 채향이 시키는 대로만 해왔던 한송이도 느낀 바가 있는지, 교장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신과 믿음을 재확인하고 싶었는지 결국엔 직접 위임장을 쓰고 직인까지 찍어서 주었다.
내용이야 위 사람은 교장의 대리인이니 교직원 및 학생들은 적극 협조해달라는 상투적인 문구였으나 바로 그 직인이 이 종이 조각에 무시 못 할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표창장 등의 공식 문서에만 날인하는 교장의 직인이 찍힌 이상 채향이라고 해도 쉽게 여양의 조사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여양이 교장실을 나오자 망을 보고 있던 승미가 손가락으로 OK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유유히 사라진 한참 후에야 채향과 영아가 돌아왔다. 이런저런 구실로 교장실에서 끌어내어 시간을 끌어주었던 것이다. 결국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싱거운 결과만 갖고 돌아온 채향은 자신이 없는 동안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길로 여양은 영화궁의 양호실장이자 학생들의 주치의인 감지민을 찾아가 검시 결과를 물었다. 일개 학생이라면 몰라도 교장의 대리인은 무시할 수 없었다.

“사인은 질식사. 목이 졸려서 죽은 건 확실해. 얼굴에 울혈이 나타나 있고…… 피가 고여 있단 말이지. 발견 당시에도 얼굴이 시뻘건 상태였어. 그리고 또 뭐가 알고 싶은 거지?”
“목에 난 상처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직접 시신을 확인했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사진이라도 볼 수 없을까요?”
“흐음. 그게 말이지,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역시 목의 자국이 이상한 거죠?”

지민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얕잡아보고 있다가 크게 당한 기분이었다.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사실 정말 이상해. 아침에 발견했을 때는 커튼으로 목을 맨 상태인데, 목에는 더 작고 깊숙이 들어간 자국이 남아 있어. 대략 3 센티미터 정도 되는 너비에, 단단하면서 어느 정도 탄력성이 있는 끈으로 추정돼.”

그럴 생각이 없었던 지민도 상대방이 이미 상당량의 정보를 갖고 있음을 알고는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확실히 커튼의 두껍고 투박한 매듭으로는 만들 수 없는 가느다란 자국이 목을 거의 한 바퀴 휘감듯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 기숙사의 커튼으로 목을 매어 질식하기란 어렵지 않나요?”
“맞아. 더구나 커튼이 매달린 높이를 생각해도 그렇지. 창문 자체가 그리 높지 않게 만들어져 있어 커튼으로 매듭을 만들어봤자 몸을 공중에 띄울 수도 없으니까. 발견 당시 시신의 발등이 땅에 닿은 상태였어. 사람이 아무리 죽고 싶어 목을 매었어도 목을 졸리고 숨이 막히면 발버둥을 치게 마련이야. 이 높이라면 얼마든지 땅을 밟고 살아날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로 죽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걸까나.”

여양이 가장 납득하지 못했던 부분도 그 점이었다. 나영은 누구보다 밝고 행복해 보였던 사람이다. 나영이 그토록 힘들고 불편하게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중의 자국이 있다는 LXG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병원을 나섰다. 처음 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확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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