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과 학생들은 오전에 학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각자의 전공과목 실기 수업을 받는다. 미술 특기자는 미술실로, 음악 특기자는 음악실로. 여양은 무용, 연기 특기자들과 함께 탈의실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무용 연습실로 이동했다.
이 학교의 명성대로 같이 배우는 아이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공모전이나 콩쿨 입상자, 아역 탤런트, 유명 연예인의 딸, 학생복 모델, 해외 명문 학교 유학생 등 화려한 전적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이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음악 선생님의 말만 듣고 겁도 없이 나갔던 전국 초중고 무용·연기 콩쿨에서 뮤지컬 부문 대상을 덜컥 받아버린 여양에 비하면 모두들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고 실력을 쌓은 엘리트들일 것이다.
반면 연습기간도 짧았고 자신도 없었기에 수상은 본인은 물론 주위 가족들도 예상을 못했던 일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오직 혼자 기대하고 있던 음악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냈고 콩쿨 수상 실적을 내세워서 영화궁 고등학교 3년 장학생에 선정되었던 것이다.
어지간한 대학교에 맞먹는 입학금 및 수업료를 완전 면제받아 꿈같은 귀족 학교에서의 생활이 이로써 시작되나 싶었지만, 그의 앞에는 불행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또렷하게 기억이 남아 있진 않으나 비극적 사건으로 가족들은 목숨을 잃고 자신은 살아남았으나 일 년 가까이 의식불명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간신히 회복되긴 했지만 이미 이 년이나 학교를 못 가 그만큼 늦게 졸업을 한 상태. 다행히도 영화궁 측은 이 년 전에 부여한 입학 자격을 취소하지 않아서 가족도 잃고 병원비로 무일푼이 된 여양은 삼 년간 지낼 곳과 학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사건에서 여양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금윤에게 털어놓았던, 가족들이 자신의 몸에 뿌렸던 피보라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의사들은 그에게 그저 교통사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에서 도피하고자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교통사고로 아버지의 목이 잘리며 피를 뿜어내는 일이 벌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수수께끼에 싸인 상태지만, 지금은 그저 의식의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그 기억을, 여양은 언젠가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리라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끔찍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고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 해도, 한 번은 직면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걸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그는 평생 그때의 고통과 호기심,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늘 보이지 않은 쇠창살로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공연히 슬픈 과거 일을 생각하다가 정신만 어수선해졌다. 그 바람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은 여양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1학년 4반 교실 앞으로 달려가 지란과 만났다.
교실 안을 슬쩍 살펴보니 도정은 친위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두기로 했다.
“체링도 데려갈까? 걔 2반이었지?”
“걔는 만나기가 힘들어. 점심시간이랑 수업 끝나기만 하면 도서관에서 가서 아주 산다나. 가끔 수업도 빼먹는다는데. 그냥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
“잘도 아네. 본인이 그래?”
“직접 들은 것도 있고, 워낙 내가 발이 넓어서. 이미 각 반에 친한 애들이 하나 이상씩은 있거든. 6반엔 아직 너밖에 없지만 말야.”
“그래. 지랄이보단 마당발이라고 불러주랴?”
“됐어, 됐어. 난 지랄이 편해. 빨리 매점에나 가자.”
지란은 여양의 팔짱을 끼고 잡아당겼다. 둘이는 머리를 맞대고 수업 중에 일어난 재미있는 일을 들려주거나 유행가를 함께 부르기도 하면서 매점을 경유하여 기숙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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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란의 말대로 놀랄 일은 비데나 사각휴지만이 아니었다. 영화궁 고등학교의 최신시설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더욱 놀랄 만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가령 학교 건물이 있는 서도와 기숙사가 있는 동도 사이를 잇는 다리는 승개교(Lift Bridge)라고 하는, 다리의 중간 부분이 통째로 들어 올려져서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리이다. 비록 배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다리는 야간 취침시간이 되면 학생들의 통행을 막기 위해 중간부분이 솟아오르고, 신입생들은 종종 기숙사 창문에서 혹은 현관으로 나와서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아직 실물을 본 학생은 없다지만 다섯 개의 섬이 꽃잎처럼 배치된 한 가운데 부분엔 해저 수족관이 건설중이고 북도에서 유리로 둘러싸인 터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학생회관 입구에 세워진 완공 예상도만 보면 충분히 환상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기대를 모을 만 했다.
그 외에 유일하게 고풍스럽게 만들어진 건물이라 할 수 있는 기숙사를 제외하고 도서관, 학생회관, 편의시설 등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밖에 설치된 자판에 올라갈 층수를 누르면 해당되는 엘리베이터의 번호가 찍히면서 문이 열려 그것에 타면 되는 방식이다.
이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신입생들은 멋모르고 무조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탔다가 아무런 버튼도 없는 걸 알고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같은 경험을 되풀이한 여양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양 자신이 어린 교장, 해저 수족관과 더불어 학교의 7대 불가사의로 부르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접했음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여양과 지란이 마트료나의 방에 왔을 때 거기엔 이미 방문객이 와 있었다. 노크를 하려고 손등을 문 쪽으로 하며 팔을 들었을 때 안에서 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하진 않았으나 두 사람이 있는 듯 했다. 가볍게 두드리자 물음이나 대답도 없이 문이 바로 열렸는데, 마트료나가 아니었다.
“너는…… 여왕님?”
그가 물었다. 키가 훤칠하고 가슴이 커서 어디서든 눈에 확 띌 만한 사람이었다. 교복의 타이와 명찰의 색깔이 주황색이기 때문에 3학년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학생회 부회장 포효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