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장에는 유람선처럼 보이는 배 한 척과 비슷한 정도 크기의 작은 화물선이 한 대 정박해 있었다. 화물선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화물을 내리고 지게차로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남자들이지만 선착장에서 화물을 내리는 사람은 전원 여자라는 점이었다. 나이는 노인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섬쪽의 인원은 지게차 운전수까지 모두 여성이었다. 남자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화물을 건네주기만 하고, 여자는 화물을 받아서 지게차로 싣는 등 자유로이 배와 섬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남자는 섬에 발조차 디딜 수 없는 것 같았고, 모두들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렴풋이 들은, ‘영화궁 고등학교는 금남구역’이라는 말이 피부로 와닿는 장면이었다.

“영화궁인지 아방궁인지 모르겠지만, 교사부터 청소하는 사람까지 전부 여자라더니 사실인 모양이네.”

멀미인지 속이 메슥거린다며 잠시 늘어져 있던 지란이 어느새 기운을 차리고 다시 불평스러운 목소리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배를 탄 적이 한 번도 없다던 지란은 여기 제주도에 올 때도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처음 경험한 뱃길을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여겼다. 10분 정도에 불과한 뱃길에 멀미를 느낀 것도 어쩌면 그런 심리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왕님은 손을 꼭 잡아주고 등을 쓸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그렇게 과자를 먹어대니까 속이 안 좋지 라고 장난스럽게 면박을 주며 기운을 내도록 애썼다.

“그런데 학교 이름부터 안내문에도 여고라는 말이 없는데 교직원까지 전부 여자라니, 교장은 무슨 생각으로 여자만 모아놓으려는 걸까?”
“그게 말이지, 이 학교 설립자가 외국인인데 레즈비언이라는 소문도 있어. 아무튼 학교는 교장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란다. 무슨 재단인가가 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이사회 멤버가 전부 여자로만 이루어져 있대. 직원 모집 공고에도 여자만 뽑는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잖아.”
“그런 일도 있었나?”

문득 다시 안내 책자를 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방 안에 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제주공항에서 펼쳐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에 선명한데, 거기서 이제 쓸모없겠다 싶어서 버렸는지 갖고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지란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듯 팔짱을 끼고 약간 으스대며 말했다.

“너야 모르겠지. 우리 집에선 이 학교 만든다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거든. 처음엔 이상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여기가 완전히 외딴 섬이잖아. 남녀를 모아놓으면 좀 위험하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여자만 뽑는다는 얘기야.”

어느새 지란의 이야기에 주위에 있는 아이들도 주목하고 있었다. 곧 걔들끼리도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가장 많이 도마에 올려 놓은 화제거리는 과도한 소지품 검사 및 물품 압수였다.

“여기가 무슨 스파르타식 입시 학원인가? 그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 하진 않겠다. 거기서도 휴대폰 압수는 안 하지 않냐?”
“입시 학원에 가봤어?”
“당연히 안 가봤지. 스파르타 어쩌고 하는 기숙학원들은 다 재수학원이니까. 근데 우리는 뭐니. 이제 막 고등학교 들어가는데 바로 재수생 취급이야? 겉으로는 무슨 외국 유학생들이 줄을 서서 들어오니, 전국 석차 1%에 들어가야 입학할 수 있다니 하면서 바람을 불어넣더니 사실은 섬에 가둬놓고 공부만 시키려는 속셈이야.”
“어른들 하는 게 다 그렇지. 우리 엄마는 나보고 삼 년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내래. 죽은 사람이 공부를 한다니?”
“내 생각엔 죽어서 지옥에 가라는 소리 같아. 공부만 하는 공부 지옥.”

아이들은 그래 그래,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한 마음으로 똘똘 뭉치고 있었다. 아이들 특유의 또래 심리와 학교에 대한 반발심이 하나로 융합되어 작은 수상 버스는 어느새 학생의 자율과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궐기 모임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배에 두 사람의 교직원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있는 듯 했다. 그 한 사람은 배를 조종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그 옆 조수석에 앉아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손자의 재롱을 즐기는 할머니 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여왕님은 배를 내린 화물선이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공부 지옥에는 발끝도 딛기 싫다는 듯 바삐 사라지는 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귓가를 간지럽히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로 흥분을 달래었다. 자연이 만든 장엄한 경관을 대하는 심정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설렘이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며 웅장한 큰북 소리가 되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 * * * * * * * * *


배에서 내리자 차가운 겨울의 바닷바람이 과격한 환영인사처럼 소녀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마구 흔들었다. 배에서완 달리 직접 섬에 발을 딛자 겪어보지 못한 이질적인 환경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눈높이에서 시선을 움직이면 한쪽에 희미한 제주도의 원경이, 구름에 감싸인 하얀 한라산이 보인다. 다른쪽에는 건물과 나무의 모습이, 고저가 없는 인공섬의 토지 위에 늘어선 건물들이 보인다. 그 외에는 온통 푸른 바다와 옅은 하늘, 흩뿌려진 구름 뿐이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신비로운 세계였다. 바다 위에 뜬 신기루처럼 아련하고 환상적인 세상.

승합차에 타고 내릴 때와 마찬가지로 손선지가 선두에 서서 양손을 벌리고 손짓을 하며 아까처럼 두 줄로 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은 잔뜩 늘어놓았던 불평과 불만을 접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관광객 모드로 돌아가서 독특한 풍경에 순수한 감탄을 보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팻말만 하나 들면 여지없이 관광 가이드로 보일 법한 선지의 안내가 이어졌다.

“우리 학교는 특별히 교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선착장을 지나면 바로 학교 내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안내 책자를 봐서 아시겠지만 우리 학교는 다섯 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활짝 핀 꽃을 이미지로 만들었어요. 사실 위에서 보면 꽃보다 별 같기도 하지만 말예요. 그래서 정식 이름은 아니지만 별꽃이나 별꽃섬이라고 부르죠. 사실은 하나가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아서 완전한 꽃 모양은 아니지만, 꽃잎 한 장이 벌레 먹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리얼한 모습이라고 할까요.”

몇몇 아이들이 킥킥 웃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꽃 모양의 섬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벌레 먹은 모습으로 찌그러진 꽃을 말이다. 덕분에 지나치게 인공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던 섬이 조금은 푸근하고 가깝게 느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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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red 2009-11-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