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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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땅도 바다도 아닌, 생명이 사는 제 사의 터전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는 버려진 공간으로, 저 깊은 땅 속, 빛과 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좁고 어두운 구역이었다.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황폐하고 척박한 그 지저세계에도 주인은 있었다. 오랜 옛날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에게 버림받아 추방된 자들이, 세상의 정화를 위해 쓸어낸 오물과 함께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긴 세월이 상처를 아물게 해주었고, 고통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밥을 먹고 잠을 사며 자식을 낳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벼린 증오의 칼날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듭난 담금질로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워졌으니, 그 검을 손에 쥐고 복수를 맹세한 왕의 등장에 지저인(地底人)들은 모두 환호했다. 그들은 태고 이래 처음으로 나라란 걸 세웠고 왕을 영접했다. 왕의 명령 하에 위로 향하는 긴 굴을 파고 탑을 쌓았다.

왕은 그들이 곧 이 탑을 통해 저 지상으로 올라가게 되리라고 설파했다. 그리 되면 지상은 곧 자기네들의 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기둥을 통해 하늘지붕으로 올라가서 세상 위의 낙토까지 다 자신들의 영토로 만드리라고 약속했다. 그 원대한 야망 앞에 지저인들은 무릎을 꿇고 복종과 충성을 맹세했고, 그들의 탑은 한낱 지상이 아니라 저 하늘지붕을 향해서 뻗어나가고 있었다. 거침없이, 그리고 탐욕스럽게.

긴 다리를 휘저으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자가 있다. 비틀거리고 발을 헛디뎌 넘어질 듯 하면서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지저인의 왕궁이자 하늘로 오르는 탑으로 들어갔다. 그가 몸에 두른 천의 끝이 깃발처럼 나부끼자 그걸 알아본 문지기들이 아무 말 없이 성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 깃발은 왕의 전령임을 알리는 징표였다.
길고 긴 계단을 올라 전령은 마침내 어전에 도달하고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팔이 없는 대신 길고 튼튼한 다리를 지닌 지저인은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다는 달성감과 왕의 위엄에 압도되어 느끼는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었다.

옥좌에 앉아 있던 덩치 큰 건장한 사내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전령의 뒤에 서있는 상반신만 부풀린 듯 건장한 모습의 병사가 말했다.

“보고하라!”
“하, 하, 네, 네, 왕이시여, 헉, 헉, 저는, 제, 이, 두, 눈으로, 하, 하, 후, 후, 또, 또혹, 혹, 똑, 히, 휴, 휴…….”

거칠게 숨을 내쉬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왕의 앞이라 긴장이 되기도 해서 나름대로 빨리 보고를 하려고 했으나 미처 호흡을 가라앉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말을 하려다보니 말은 더 헛나오고 숨은 더 거칠어졌다. 병사들이 채근하려는데 왕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바로 옆에 웅크리고 있던 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조금만 기다리시옵소서. 제가 직접 알아내겠나이다.”

그는 여덟 쌍의 가늘고 뾰족한 다리로 얼른 전령에게 다가가 사마귀처럼 날카로운 앞발을 들었다. 낫처럼 뾰족한 끝이 여러 장으로 갈라지며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변했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전령의 두무뭉술하고 시커먼 얼굴이며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자, 생각을 해라. 네가 보고 느낀 걸 떠올리기만 하렴. 내게 있어 네 생각을 읽는 것 쯤이야 식은 죽 먹기와 같으니까…….”

물론 그에 따르는 끔찍한 대가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전령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며 거부반응을 나타내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두건에 감싸여 휑휑한 두 눈 외에는 보이지 않는 네크로사이드의 얼굴과 마주친 순간 전령은 죽음의 얼굴이 무언인지 실감했다. 그리고 그에게 혼의 일부를 보여준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병사 둘이 다가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전령의 시체를 질질 끌고 물러나는 동안 네크로사이드는 왕의 곁으로 돌아와 그가 훔쳐본 전령의 기억을 전했다.

“폐하, 저 자 그리고 저 자와 함께 있던 염탐꾼들이 유각인을 찾았다고 하옵니다.”
“지상으로 빠져나가 우리의 애를 태우게 했던 그 녀석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그 조그맣고 생쥐 같이 영리한 놈이 용케도 우리를 따돌리고 세상 위로 달아났나 싶었는데, 역시 멀리 가지는 못했나봅니다. 어느 숲에 있다고 하옵니다. 인간에게 쫓겨난 고대 종족의 후예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숲이옵지요.”
“당장에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왕이 양손으로 자루 끝을 짚고 있던, 위엄과 권력의 상징인 장검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려 네크로사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거미줄 위를 넘어다니는 거미의 발처럼 쉴새 없이 춤을 추었다. 그의 신체 중에서 눈에 띄게 움직이는 건 오직 그 가느다란 손가락 뿐이었다.

“폐하, 서두를 필요 없사옵니다. 지저인들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태양 아래에선 마치 물을 잃은 고기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법이지요. 지금 조금씩 훈련을 통해 지상에 익숙해지고 있는 병사들이 있으니, 그들이 완전하게 빛과 바람을 극복하게 되면 즉시 행동에 나서겠사옵니다. 지금은 위치를 놓치지 않고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조급하게 굴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문이 있고, 문의 열쇠도 찾은 셈이옵니다. 모든 것은 열 밤도 지나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문을 여는 것, 그것이 그들 여행의 종착역이며 임무의 완수이고 소망의 성취라면 이제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거꾸로 파는 개미굴처럼 그들이 위를 향해 파는 긴 동굴이 이제 끝을 보려 하고 있었다. 한없이 쌓던 탑은 여력이 다해서 어느 순간부터 굴의 벽에 긴 계단을 닦는 것으로 대신했고, 그 마저도 사다리로, 이제는 아예 벽에 손과 발을 넣을 흠을 파는 정도로 간략해지긴 했으나 땅에 가로로 눕히다면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이르기 힘들 엄청난 길이의 굴이 땅 속에서 하늘기둥을 거쳐 하늘지붕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어, 왕이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하늘에 구멍을 뚫고 그 위로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으로 가는 길은 마련했으되 아직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지저인의 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시간은 큰 방해거리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아이로 태어나 땅 밑으로 버려진 기구한 존재인 그에게 네크로사이드가 다가온 것은 그가 아직 세상의 이치를 채 깨닫지도 못한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까지 지저인은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개념이 없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들짐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겉모습만큼이나 사는 모양도 제멋대로였고 일정치 못한 태고의 혼돈 자체였으니, 네크로사이드가 그 아이를 왕으로 추대한 건 '지저인이 아닌 존재만이 지저인을 다스릴 수 있다'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예언 비슷한 격언 때문이었다.

용이 하늘과 바다를 누비던 시절부터 살았더라는 소문만 돌던 수수께끼의 인물 네크로사이드의 가르침으로 어린 아이는 용감무쌍한 전사가 되었고 그의 주술 덕분에 나이를 먹지 않는 불로의 육체를 손에 넣어 마침내 지저세계를 휘어잡은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 기다림은 그저 무료할 뿐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지저인의 왕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새로운 전령과 유각인의 위치를 쫓아갈 병사들을 새로 뽑아서 보내라고 일렀다. 곧 걸어서 혹은 기어서 혹은 굴러서 혹은 걷가다 기면서 혹은 다른 방법으로 몇 명의 지저인들이 와서 왕의 머리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 중 다리 네 개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자를 전령, 목이 길어서 주위를 잘 볼 수 있는 자를 감시원, 몸이 납작하여 들키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는 자를 미행 담당으로 임명했다.
그 외에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이들은 그냥 그들을 도와주거나 보초를 서는 역할을 맡겼다. 그들 모두 왕에게 감사를 표하고 존경의 말을 읊은 후 물러갔다. 반복된 훈련으로 만들어진 생기 없는 언행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지저인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왕과 그의 유일무이한 스승이자 조언자인 네크로사이드는 신하와 백성들을 한 번 쓰고 버려도 되는 일회용품 취급을 했지만 불평불만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의 지능이 그만큼 뛰어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왕의 공포정치에 억눌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지저인들 대부분은 머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기관의 모양과 위치가 일정하지 않았고, 그 빛깔 역시 그림자와 같은 색밖에는 없었으니, 세상이 버린 그림자들이 뭉치고 쪼개지며 만들어진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대로 놔두었다면, 그들은 태곳적 이래로 그랬듯 앞으로도 무지하고 미개한 채로 살고 있었으리라. 왕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건국과 통치를 정당화시켰다. 지금 그들은 무질서와 혼란에서 벗어나 질서와 체계가 잡힌 신세계로 나아가고 있고, 이제 지상을 향해 복수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곧 하늘 위의 낙원을 지배할 날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네크로사이드가 속삭인 청사진을 통해 왕이 가슴에 품은 포부에 의하면 그랬다. 그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이상, 서두를 필요 따윈 없었다. 시간은 빛에 의지하며 사는 지상세계의 무력한 인간들에게완 달리, 걸림돌이 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둠이란 시간의 흐름에도 색이 바래거나 변하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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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까지 오는 수풀을 넘어 한적한 공터로 나오자 주위 나뭇가지 위에, 잎사귀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존재들에게로 시선이 갔다. 아까 흥흥이에게 속수무책으로 잡아 먹히던 작은 이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이 소녀의 발치로 다가왔다. 멀리서보면 흡사 저절로 움직이는 나무 열매와 나무 조각처럼 느껴지겠지만, 가까이에 오면 작고 동그란 생물들이 제각기 열매 껍질이나 속이 빈 나뭇가지를 뒤집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나름대로 숲에서 모습을 숨기고 살기 위한 방책인 듯 싶었다. 소녀는 그들을 마주 대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는 헤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위험에서 구해준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다.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대화 내용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주어 익히는 것도,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영감 같은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자연이라는 말 그대로, 그저 존재하는 사물을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마음 자체로.
소녀는 그럴 때면 이마에 솟은 뿔이 어떤 통로처럼 세상에 흘러 넘치는 감정과 지혜를 빨아들여 자신에게로 전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순간 소녀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세상 그 자체였다.
세상과 하나로 호흡하고 같은 감정을 느낀다. 산의 침묵과, 들판의 열정과, 구름의 설렘을 배운다. 달의 슬픔과, 바다의 분노와, 바람의 근면을 배운다. 그리고 소녀는 하늘지붕 너머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무심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 그들은 소녀가 원하는 바를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들은 누군가를 찾고 싶어하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걸 도와줄 수 있겠냐는 간절한 바람을 들었다. 그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답하자, 소녀가 충분히 기쁘고 고마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숲 속으로 흩어졌고, 몇몇만이 소녀와 함께 남아 있었다.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찾고자 하는 상대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가깝고 쉬운 곳에 있었으니까. 곧 몇몇 무리가 나타나 소녀에게 찾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소녀보다 조금 더 작은 키, 검은 머리카락, 구부러진 등에 달린 커다란 혹, 생기있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바라보고 과일을 맛있게 먹는 아이, 지금은 자기들의 보금자리 구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아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소녀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깊고 깊은 숲 속의 속의 속.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에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공터가 하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이미 나무로서 생을 마친 그 나무는 숲의 주민들을 위한 보금자리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그 아래에 수많은 방과 통로들이 저마다의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음이다.

작은 이들의 안내를 받아 소녀는 뿌리의 틈을 통해 입구로 들어갔다. 가장 처음 나오는 널찍한 공간 구석에서 아이는 입에서 한 줄기 침을 늘어뜨리며 자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가갔지만 너무나 달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 굳이 깨우고 싶진 않았다. 그저 무사한 것만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마침 밤새 숲을 헤매느라 시장한 터라 곁에 놓여 있던 과일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고 있는데 옆 통로로 향하는, 유일하게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작은 이들과 함께 이 안에 살고 있는 유일한 다른 존재인 그는 주름진 긴 몸을 가진 늙은 애벌레였다.
인간의 것을 닮은 투명한 눈망울과 짙은 빛의 눈동자는 그가 긴 세월 속에서 얻은 무수한 지식과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이들이 그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몸 위에 앉아 있고, 반딧불이들이 주위를 날아다니며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반딧불 덕분에 밤중의 땅 속임에도 주위의 사물들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아르르, 그르르. 늙은 애벌레는 입 속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한 소리를 내었다. 말라버린 깊은 우물의 바닥을 긁는 듯한 울림이었다. 잠시 목을 가다듬는 듯 하더니 그의 벌어진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 아. 큼큼. 정말, 오랜만에 인간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군."

그는 스스로가 놀랍거나 대견하다는 듯 혼잣말로 운을 띄었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느끼곤 그를 향해 자신의 큰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압니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이일 텐데도……. 그러니까, 당신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지요."
"나 역시. 당신과 여기 이 작은 이들의 마음을 느낍니다. 난 당신들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지요.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이전에 당신들은 이 땅의 주인이었지요. 바다에는 용이 살고, 산과 들에는 씨앗[種人]들이 살던 때……."

"그리고 하늘, 하늘지붕에는 뿔난이[有角人]들이 살고 있었지요. 숲에는 우리들의 선조들이 살던 그 풍요롭고 안온하던 시절 말입니다. 하늘지붕과 대지를 새와 나비들이 왕래하던 그 좋았던 옛 시대. 전 제 선조들로부터 전승된 기억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습니다. 풍요의 시대는 사라지고, 하늘지붕은 그 문을 닫고, 뿔난 이들도 용들도 자취를 감추었죠. 대신 땅 위를 차지한 건 인간들이었습니다. 씨앗들은 대부분 저 차갑고 어두운 땅 속으로 숨어 들어갔지요. 일부는 이렇게 숲 속에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남기도 했지만요."
"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이 모여 있는 걸 처음 보았답니다."

"그렇겠지요. 이 땅 위에 씨앗을 뿌리고 비옥한 땅과 울창한 숲을 일구었던 이들은 이제 인간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이렇게 멸종의 위기에 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완전히 멸족한 걸로 알던 뿔이 난 사람을 만난 것이 훨씬 놀라운 일입니다."

소녀는 말없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기들을 이끌고 보살피는 지도자, 촌락의 장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늙은 애벌레가 직접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였는지 수많은 작은 이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조잘대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추측하며 떠들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만으로도 대충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뿔난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날개 달린 이들과 함께 말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긴 세월을 이겨내고…… 망각의 강을 건너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인지요……."
"용들은 아직 바다에서 소수나마 살아 남았고, 여기 숲의 아이들도 이렇게 살아 있지 않나요.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런지요.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는 기억치 못합니다. 분명 그건 하늘이 무너지던 시절의 이야기겠지요. 하늘과 땅과 바다가 완전히 나뉘어지지 않던 무렵의."

애벌레는 동의의 눈빛을 보내며 마음 속 깊이에 새겨진 먼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서고 깊숙이에 박혀 있던 책을 꺼내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한 장 한 장 펼쳐 읽는 것처럼 신중하고도 그리운 마음으로 되새긴 기억들.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선조의 선조의 선조로부터 이어진 기억 속의 세상을 떠올렸다.
하늘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땅 속과 바다 밑이 온전히 구별되지 않던 혼란스럽던 세상에, 뿔이 난 이들이 나타나 평화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습을 빚어 낼 큰 짐승을 만들었고,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용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 땅을 다스릴 인간을 만들었고, 하늘과 땅을 이어줄 날개 달린 인간을 만들었다.
그 후 세상은 오래도록 번영했으나 뿔이 난 사람들, 세상을 다스리는 선민들의 낙토, 코뉴코피아라 불리던 세상 위의 세상, 그 하늘지붕이 무너져 하늘과 땅이 동시에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지금 하늘지붕의 반은 바다에 떨어져 사라졌고 반은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선민이 사라진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으나 대신 풍요로움을 잃어갔다. 땅 속에선 세월의 흐름에서 낙오된 생명들이 모여 세상의 정화를 위해 버려진 오물 속에서 증오의 탑을 쌓고 있었다. 언젠가 그 끝이 땅 위로 솟아오르게 될 날, 세상은 두 번째의 위기를 맞을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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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물에 발을 담근 채 자신의 손을 쥔 소녀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조그맣고,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육체가 해거름의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가까이에서 보자 아이는 소녀가 자신이 함께 살던 아이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덩치는 비슷하건만 소녀의 몸에는 작은 상처도 울퉁불퉁한 곳도 없이 매끄럽고 깨끗했다. 대신 온몸에 난 하얀 잔털이 바람을 타고 하늘거렸다. 손가락으로 집으면 툭 끊어질 듯한 가느다란 솜털이 팔뚝이며 가슴, 허벅지 등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길다란 머리카락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그런 모습은 아이에게 나비를 탔을 때 내려다 보았던 숲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조밀하게 모여 있던 나무의 모습, 풍성하게 자라 들판을 뒤덮은 풀의 모습. 소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거칠고 메마른 존재인 이마의 뿔은 황량한 바위산을 연상시켰다. 뿔은 풀 한 포기 없이 긴 세월에 조금씩 풍화되는 바위산의 빛깔과 모습을 닮았다. 이마 한 가운데에서 솟아나 약간 위를 향해 굽어진 가느다란 뿔.
소녀의 몸에서 굵고 투박한 건 하나도 없이 오직 섬세하고 가느다란 아름다움만이 가득했다. 반면 아이는 시커멓고 상처 투성이에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등에 있는 커다란 혹이 몸을 짓눌러, 날개가 떨어진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흉측한 자신의 육체를.

"자, 어서."

소녀가 다정하게 아이를 채근했다. 마침내 차가운 물에 발을 집어넣고,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물살 속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는 데 성공했다. 소녀는 머리만 빼놓고 온몸을 물에 담갔다 일어선 후 아이도 똑같이 하려고 했다.
하지만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아이에겐 힘든 일이었다. 차갑다고, 싫다고 몇 번이나 나가려고 하는 걸 간신히 붙잡아 놓은 후, 소녀는 물가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돌멩이를 몇 개나 손에 쥐었다가 도로 내려놓기를 반복한 후 마침내 원하는 걸 발견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물가에 앉아서 한숨을 돌리던 아이가 호기심에 다가왔다.

"그게 뭔가요?"

아이가 보기에는 그냥 돌인데.

"표면이 거친 걸 찾았단다. 네 몸의 때가 하도 많아서 그냥 흐르는 물에는 다 씻기지 않거든."
"그, 그걸로 어, 어쩌실 건가요?"
"이렇게 하련다!"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아이를 앉히고 돌로 팔이며 등, 다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프다고 싫다고 악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몇 번이나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으나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붙잡혀 시냇물에 던져졌다.
겨우 물살을 헤치고 나오면 또 때밀기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소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놔주었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물에 씻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자, 어서 몸을 말리자꾸나. 물을 다 안 말리면 밤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 게야."

소녀는 바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모아두었던 나뭇가지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간혹 아궁이의 불이 꺼질 때면 크게 화를 내며 호통을 치던, 부딧돌로 힘겹게 불을 켜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자 아이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억지로 눈물을 참고 소녀의 옆에 앉았다. 소녀는 부싯돌도 무엇도 없는 맨손이었지만, 쓰다듬는 듯한 손길만으로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조그마한 모닥불로 변했다. 자연스러운 탄성이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야아! 대단해요! 고마워요, 마법사님!"
"내가 아니라 불을 빌려준 바람에게 감사하렴."

둘이는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불을 쪼이며 몸을 말리고 옷을 입었다. 아이는 소녀의 망토를 몸에 두르고 옆으로 누웠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니 거기에는 수많은 별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가득 매달려 있었다.

"와아, 저게 다 뭐예요? 저건……?"
"별 말이니? 너는 별을……"

별을 본 적이 없냐고 물으려다가 소녀는 말을 멈추었다. 하늘지붕 아래에서 자란 아이는 별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하늘지붕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니까. 아이는 분명 이제까지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으리라.

"정말 예뻐요. 별이란 게 저렇게 많았나요? 아버지가 해주던 옛날 이야기에 별님이 나오고 별나라가 나왔지만 그게 저렇게 작고 저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저 하나하나가 다 별인가요?"

아이는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재잘거렸다. 그러다가 피곤에 겨워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소녀에게는 그 모습이 계속 별을 보고 싶은 마음과 잠을 자고 싶은 몸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먼 길을 왔으니 그만 자거라. 별은 내일 밤에 또 볼 수 있단다."
"그러는 마법사님은 왜 안 주무세요?"

소녀는 눕지 않고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난 네가 잠들고 나면 자련다. 오랫동안 혼자 있는 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옆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구나."
"그렇구나……. 전 거꾸로인데요. 아이들이랑 뒤엉켜서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혼자 자려니까 좀 그래요."
"내가 자장가라도 하나 불러주련?"
"네! 좋아요. 불러주세요."
"그런데 이를 어쩐다. 막상 부르려니까 잘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내가 자장가를 불러본 기억이 없으니……. 그래. 대신에 다른 걸 불러줄게. 마침 별 하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구나. 조용하니 잠들기에는 좋은 노래일 게야."

아이는 이미 눈을 감고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벌써 잠이 든 건지도. 어찌 되었든, 소녀는 스스로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하프를 꺼내어 조그맣게, 행여나 자는 아이가 깰세라 살짝 튕겨 보곤 목소리를 낮추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득히 깊은 물 속에서 불빛이 반짝이네
    오로라처럼 반짝이는 별들의 향연
    내게 지느러미 있다면 깊이 내려가
    이 손 안에 빛을 가득 담을 텐데

    언젠가 꿈 속에서 느꼈던 아늑함, 잃어버렸던 따스한 미소
    그곳 어딘가 전부 있을 것 같아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데

    내 손 안에 가질 수는 없다고 해도
    눈 감으면 다시 떠오르는
    빛방울들은 내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어

    멀고 먼 밤하늘 저편에 별빛이 반짝이네
    심해에서 솟아나는 물거품처럼
    내게 날개라도 있다면 높이 올라가
    이 품 안에 빛을 가득 안을 텐데

    닿을 수 없는 목표를 바라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중요한 것을 놔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데

    소중한 건 멀리 있는 것만이 아냐
    눈을 감고서 헤아려보면
    아름다운 빛 내 가슴 속에서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어

    이제는 알았어 내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음을


(제1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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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자, 마법사님. 고개를 젖혀 보세요. 제가 물을 드릴게요."
"네가……?"
"전 종종 땅에 고인 물을 떠먹곤 해요.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해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기가 힘들거든요. 자, 여기 이렇게, 네, 그렇게요."

소녀는 아이가 이끄는 대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이가 움푹 패인 땅에 고인 물을 양손으로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

"입으로 후후 불고 드세요. 흙이 섞여 있거든요. 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그러면 손가락 사이로 물이 다 도망가버려요."
"넌 늘 이렇게 흙이 섞인 물을 마셨구나."
"저야 예전부터 그랬으니 괜찮아요. 자, 후후 불고 드세요."

소녀는 아이가 떠다주는 물을 받아서 마셨다. 적은 양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훨 나았다. 네 번을 받아먹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듯이 느껴졌다.

"이젠 너도 목을 좀 축이렴."
"네? 전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척이나 목이 말랐던 건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얼른 손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아이의 흙묻은 얼굴과 마주치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그만 고개를 돌렸다.

"왜요? 물 더 드시고 싶으세요? 죄송하지만 드리고 싶어도 이젠 안 되겠어요."
"괜찮다, 작은 아이야."
"하늘우물이 너무 빨리 닫혀서 그래요. 땅에 물이 많이 고이질 않아서……. 다음에 또 비가 오면 그땐 더 많이 드릴게요, 마법사님."
"날 마법사라고 부르지 마렴."
"왜요?"
"난 마법사가 아니란다."
"하지만 전 본 걸요. 마법사님이 하늘우물에서 비가 내리도록 했잖아요. 그리고 하늘우물을 닫았고요."
"아니, 그건 내 힘으로 한 게 아니야."

고개를 젓다가 그만 두건이 벗겨지고 말았다. 아이의 힘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연한 초록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풀잎처럼, 햇살을 반사하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이마 한 가운데에 솟아난 뿔은 뽀얀 소녀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낡고 거칠게 보였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보며 아름다움을, 투박하고 거친 뿔을 보며 꺼림칙함을 동시에 느끼며 아이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자신과 아이들의 시커멓고 뻣뻣한 머리카락과 짙은 피부색을 떠올렸고,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뿔이 주는 이질적인 인상이 더해져서 상대의 신비로움은 배가되었다.
소녀는 말없이 두 손으로 두건을 도로 덮어써서 머리와 얼굴 대부분을 가렸다. 아이는 두건이 머리 위로 솟은 것처럼 보였던 이유를 알았지만 두건과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두건을 쓴 후 일어서서 겉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낸 후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셈이로구나. 목이 마른 내게 생명수를 나눠주었으니……. 내가 너에게 무얼 주면 좋을까?"

자기자신도 알 수가 없는 물음이다. 무엇을 줘야 할지. 그 이전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조차. 어쩌면 자신이 여기로 온 것도, 이 아이를 만난 것도 무언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의 고통을 어떻게 달래고 무엇으로 보상받으랴.

"날이 늦었어요. 마법사님도 오늘은 여기서 주무세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구나. 이곳은 너무 어둡고 차가워. 바닥엔 몸을 누일 마른 땅도 풀 한 포기도 보이질 않는구나."
"제 잠자리를 드릴게요.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았으니 괜찮을 거예요. 전 널따란 바위 위에서 자면 돼요."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여기 오래 있을 운명이 아닌 것 같구나."
"그러면…… 도로 그 바위 속으로 가실 건가요?"
"그것도 아니란다. 난 그 안에서 나오느라 긴 세월을 보냈어."

길고 긴 나날이었다. 어둠과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이곳까지 걸어왔다. 출구라고 생각했던 곳은 아마도 세상의 맨 구석자리. 올 곳도 갈 곳도 없는 아이들만이 살고 있는 빛깔 없는 장소.

"저 안엔 뭐가 있는데요?"
"그래! 얼른 말을 해! 저 안에 바깥 세상으로 가는 길이 있는 거야?"

돌연 불룩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자 꼽등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불룩이와 몇몇 아이들이 둘의 곁으로 다가왔다.

"너희들 하는 말 들었어. 네가 마법사라고? 여기서 떠난다고? 설마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무슨 마법인지 몰라도 우리가 다 덤비면 너 하나쯤 혼내주는 건 문제도 아닐 거야. 그러니까 얼른 말해."

불룩이가 으름장을 놓자 아이들은 그 말이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손을 넣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아주 작은 하프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줄을 한두 번 튕겨본 후, 아직도 불룩이를 겁내며 떨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커다란 왕국이 있어서
    풍요로운 대지 위에 행복의 노래 가득했죠
    하지만 욕심 많은 임금님은 커다란 성 안에
    세상의 금은보화 다 쌓아두고 싶었죠
    이웃나라를 공격했지만
    전쟁에 지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왕궁 문을 꼭 닫은 채
    임금님만 텅 빈 나라에서 살았죠
    세월이 흐르고 또 다시 흘러 호기심 가득한
    여행자 한 사람이 성벽을 넘어 들어갔죠
    하지만 거기엔 금은보화는 없고
    시간이 쌓은 먼지만이 가득 있었죠
    성에 들어온 사람도 갇혀
    켜켜이 쌓인 먼지의 일부가 되고
    결국에는 성 마저도
    땅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져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으니
    욕심이란 이렇듯 먼지처럼 허망한 것

노래가 끝났지만 박수도 반응도 아무 것도 없었다. 소녀는 당혹감과 어리둥절로 가득한 주위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고, 역시나 대표자로 자리잡은 불룩이의 불평이 박수를 대신했다.

"뭐야 그게? 갑자기 웬 노래야? 할 말이 없으니까 노래나 부르겠다는 거야?"
"이 노래는 그저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이 이야기가 사실을 전하고 있음을."
"사실? 그 노래 내용이 실제 있던 일이라고?"
"너희들이 딛고 있는 이 땅은 예전에는 훨씬 더 크고 넓었단다. 그 시절 여기엔 커다란 궁전과 수많은 집들과 긴 성벽이 있었지. 허나 그 모든 건 땅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단다…… 그래도 그 일부는 아직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게야."

소녀는 류트를 품 안에 넣고 지팡이를 들어서 주위의 바위산을 가리켰다.

"동그랗고, 뾰족한 이 바위들…… 바위처럼 보였던 이것들은 모두 그 왕궁의 첨탑이란다. 세월의 더께가 씌여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난 오랫동안 이 땅 밑에 있었단다. 사람도 빛도 없는 버려진 나라와 궁전을 헤매며 밖으로 나갈 길을 찾아왔어. 이제 오늘 이렇게 난 하늘지붕 아래에 다시 서게 된 게야……."

아이들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비쭉비쭉 솟아 있던 바위산들이 모두 사람이 만든 건축물의 일부였다는 사실, 그런 성이 땅 밑으로 가라앉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 그리고 그 땅 밑에서 올라온 소녀의 존재. 그 모든 놀랍고 복잡한 일들이 단순하고 변화 없는 삶을 살던 아이들의 머릿속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정리는 커녕 감당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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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여긴 너희들밖에 없는 거니? 아버지란 분은 어디에 계시고?"

아버지에 대한 말이 입밖에 나오자 불룩이는 화가 났다. 네가 아버지에 대해 뭘 안다고.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있을 때는 모든 게 좋았다. 짚으로 깐 아늑한 잠자리, 물을 모아놓은 샘, 그런데 지금은……. 심술이 나자 일부러 거친 목소리로 퉁명스레 답했다.

"아버진 죽었어! 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어느날 그랬어. 이제 자긴 잠들면 다시는 안 일어난다고. 그게 죽는 거래. 정말 아버지는 안 일어났어. 몸에서 냄새가 나고 날벌레들이 달라붙을 때까지도 안 일어났단 말야!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미리 시킨 대로 땅에다 묻고 돌을 쌓아줬어. 저기 보이는 저거야."

그가 가리킨 손 끝에 작은 돌무덤이 있었다. 소녀는 물끄러미 돌무덤을 바라보더니 지팡이를 뽑아들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소녀는 말없이 작고 조악한 돌무덤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뿐. 불룩이와 아이들은 소녀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그저 무덤을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싫증을 잘 내는 어린아이들이 날벌레를 잡으려고 손을 휘젓거나 끼리끼리 장난질을 치고 있을 무렵 소녀가 입을 열었다.

"사오 년 정도 전에, 한 사내가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단다. 원래의 배의 일부분이었을 널판지 위에 매달려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절망의 항해를 이어가고 있었지."

소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는 큰 배의 선원이었다. 배가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 풍랑 속에서 뒤집어지기 전까지 그의 인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간신히 널판지를 붙잡고 목숨을 건졌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망대해에 자신 혼자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같은 난파선의 생존자를 만났다. 배가 가라앉을 때 아이들을 먼저 태워 피신시켰던 작은 쪽배였다.
그 배 안에는 어린아이들 십여 명과 성인으로는 여인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사내는 배에 올라 물과 음식을 얻어먹고 겨우 기운을 차렸으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육지는 보일 기미가 없고 아이들은 너무 많은데 음식은 조금밖에 남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후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둘이서만 가자고. 육지에 오르면 결혼해서 함께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여인은 자신이 이미 결혼한 몸이며 이 아이들은 자기 자식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화가 단단히 난 사내는 다음날 먹을 것을 적게 준다며 다투다가 반은 실수로 또 반은 일부러 여인을 바다에 빠트린다. 허우적대는 여인을 뒤로 하고 힘껏 노를 젓던 그의 앞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이제 아이들도 다 내던지고 혼자서 물과 음식을 취하면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 해류의 영향이었는지 배는 빠른 속도로 육지로 향했고 사내와 아이들은 드디어 뭍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고 가파른 바위산에 가로막힌 조그만 개펄에 불과했다. 물과 음식도 떨어진지 오래, 지금 다시 떠나도 언제 육지에 다다를 수 있을런지. 사내는 절망에 빠져 식음을 잊고 그저 슬피 울며 찾아올 죽음만 기다렸는데, 어느새 그를 믿고 따르던 아이들이 저마다 조개니 민달팽이니 하는 걸 잡아다 주면서 사내를 보살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는 깨달은 바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언젠가 육지로 돌아갈 때가지 이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아이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이곳에서 변함 없이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긴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걸 끝맺을 무렵에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지금 처음 만난 소녀가 어떻게 아버지와 자기들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를 알았냐는 의문이었다. 쉭쉭이와 다른 아이들이 불룩이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주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불룩이가 대표로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설마, 그거 우리 이야기? 우리가 여기로 와서 살게 된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난 희미하게 기억이 나. 조그만 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 그때 우릴 돌봐주던 사람이 있었어. 내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차갑고 보드라운 손이 기억 나."
"나도 기억 나! 날 안고 노래 불러줬어!"
"나도! 나도!"

조금 덩치가 큰 아이들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서로 지지 않으려고 소리쳤다. 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자기들을 돌봐준 그 누군가를 만났던 그 작은 배에서의 일들을.

"근데 말이야,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불룩이의 질문은 아이들의 환호성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가까이에서 하늘우물이 그 하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성과 함께 우물 아래로 몰려들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라도 더. 축복의 생명수를 입 안에 넣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크게 벌리고 혀를 쭉 내민다. 불룩이도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아 힘없는 애들을 밀치고 양손과 입으로 물을 받았다.

소녀도 천천히 따라갔으나 아이들의 아수라장 속에는 그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밀치고 당기고 하는 틈에 그만 축축한 개펄에 넘어졌다.

"물을 다오. 내게……"

소녀의 조그만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으나, 그 마음만은 하늘우물에 가닿으리라.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고, 하늘우물이 잿빛 하늘 속으로 얼굴을 감춘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해갈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비가 그치자 아이들은 투덜대며 흩어졌다. 불룩이는 소녀에게 싫증이 났는지 그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말했다.

"우린 밥 먹을 거야. 너도 우리랑 같이 먹고 싶으면 네가 아는 걸 가르쳐줘야 돼. 바깥 세상으로 가는 방법 말야. 아니면 너도 우리처럼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든가."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주저앉은 채로 반쯤 엎드렸다. 갈증과 피로로 이미 일어날 힘도 없어보였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뭉치며 자기들의 소굴인 고둥 모양 바위산 밑으로 모였다.

하아. 숨을 내쉬자 연한 입김이 피어났다. 어느새 주위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공기도 땅도 차갑고 눅눅했다. 소녀는 돌무덤을 돌아보며 그곳에 누운 이가 자신에게 전해준 삶의 기억과 그 절망과 슬픔, 그리고 아이들에게 남긴 희망의 편린을 되새겼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과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영원히 이어지려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자식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서만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건 아닐 텐데.
소녀는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을 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잿빛 하늘과 땅, 검푸른 바다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채 영원히 세상과 유리된 이 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저기, 저기요. 마법사님?"

소녀는 떨리면서도 똘망똘망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고 무덤쪽을 향했던 얼굴을 제자리로 돌렸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바위산 위에서 보았던, 등에 커다란 혹을 짊어진 아이였다.

"마법사님이시죠?"

다짐을 구하려는 듯 아이는 재차 물었다. 힘들게 달려왔는지 연신을 숨을 헐떡인다. 소녀의 시선이 아이를 처음 보았던 바위산 꼭대기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분명 꼽추 아이가 내려오기에는 힘들었으리라.

"혼자 힘으로 내려왔나보구나."
"흙이 무너진 쪽으로 내려와서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어요. 벽이 울퉁불퉁해서 미끄럽지도 않고 붙잡을 곳도 있었거든요. 저 네 발로 바위산 오르내리는 건 자신있어요."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발이라. 비유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 소녀의 마음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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