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자, 마법사님. 고개를 젖혀 보세요. 제가 물을 드릴게요."
"네가……?"
"전 종종 땅에 고인 물을 떠먹곤 해요.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해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기가 힘들거든요. 자, 여기 이렇게, 네, 그렇게요."

소녀는 아이가 이끄는 대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이가 움푹 패인 땅에 고인 물을 양손으로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

"입으로 후후 불고 드세요. 흙이 섞여 있거든요. 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그러면 손가락 사이로 물이 다 도망가버려요."
"넌 늘 이렇게 흙이 섞인 물을 마셨구나."
"저야 예전부터 그랬으니 괜찮아요. 자, 후후 불고 드세요."

소녀는 아이가 떠다주는 물을 받아서 마셨다. 적은 양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훨 나았다. 네 번을 받아먹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듯이 느껴졌다.

"이젠 너도 목을 좀 축이렴."
"네? 전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척이나 목이 말랐던 건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얼른 손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아이의 흙묻은 얼굴과 마주치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그만 고개를 돌렸다.

"왜요? 물 더 드시고 싶으세요? 죄송하지만 드리고 싶어도 이젠 안 되겠어요."
"괜찮다, 작은 아이야."
"하늘우물이 너무 빨리 닫혀서 그래요. 땅에 물이 많이 고이질 않아서……. 다음에 또 비가 오면 그땐 더 많이 드릴게요, 마법사님."
"날 마법사라고 부르지 마렴."
"왜요?"
"난 마법사가 아니란다."
"하지만 전 본 걸요. 마법사님이 하늘우물에서 비가 내리도록 했잖아요. 그리고 하늘우물을 닫았고요."
"아니, 그건 내 힘으로 한 게 아니야."

고개를 젓다가 그만 두건이 벗겨지고 말았다. 아이의 힘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연한 초록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풀잎처럼, 햇살을 반사하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이마 한 가운데에 솟아난 뿔은 뽀얀 소녀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낡고 거칠게 보였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보며 아름다움을, 투박하고 거친 뿔을 보며 꺼림칙함을 동시에 느끼며 아이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자신과 아이들의 시커멓고 뻣뻣한 머리카락과 짙은 피부색을 떠올렸고,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뿔이 주는 이질적인 인상이 더해져서 상대의 신비로움은 배가되었다.
소녀는 말없이 두 손으로 두건을 도로 덮어써서 머리와 얼굴 대부분을 가렸다. 아이는 두건이 머리 위로 솟은 것처럼 보였던 이유를 알았지만 두건과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두건을 쓴 후 일어서서 겉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낸 후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셈이로구나. 목이 마른 내게 생명수를 나눠주었으니……. 내가 너에게 무얼 주면 좋을까?"

자기자신도 알 수가 없는 물음이다. 무엇을 줘야 할지. 그 이전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조차. 어쩌면 자신이 여기로 온 것도, 이 아이를 만난 것도 무언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의 고통을 어떻게 달래고 무엇으로 보상받으랴.

"날이 늦었어요. 마법사님도 오늘은 여기서 주무세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구나. 이곳은 너무 어둡고 차가워. 바닥엔 몸을 누일 마른 땅도 풀 한 포기도 보이질 않는구나."
"제 잠자리를 드릴게요.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았으니 괜찮을 거예요. 전 널따란 바위 위에서 자면 돼요."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여기 오래 있을 운명이 아닌 것 같구나."
"그러면…… 도로 그 바위 속으로 가실 건가요?"
"그것도 아니란다. 난 그 안에서 나오느라 긴 세월을 보냈어."

길고 긴 나날이었다. 어둠과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이곳까지 걸어왔다. 출구라고 생각했던 곳은 아마도 세상의 맨 구석자리. 올 곳도 갈 곳도 없는 아이들만이 살고 있는 빛깔 없는 장소.

"저 안엔 뭐가 있는데요?"
"그래! 얼른 말을 해! 저 안에 바깥 세상으로 가는 길이 있는 거야?"

돌연 불룩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자 꼽등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불룩이와 몇몇 아이들이 둘의 곁으로 다가왔다.

"너희들 하는 말 들었어. 네가 마법사라고? 여기서 떠난다고? 설마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무슨 마법인지 몰라도 우리가 다 덤비면 너 하나쯤 혼내주는 건 문제도 아닐 거야. 그러니까 얼른 말해."

불룩이가 으름장을 놓자 아이들은 그 말이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손을 넣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아주 작은 하프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줄을 한두 번 튕겨본 후, 아직도 불룩이를 겁내며 떨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커다란 왕국이 있어서
    풍요로운 대지 위에 행복의 노래 가득했죠
    하지만 욕심 많은 임금님은 커다란 성 안에
    세상의 금은보화 다 쌓아두고 싶었죠
    이웃나라를 공격했지만
    전쟁에 지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왕궁 문을 꼭 닫은 채
    임금님만 텅 빈 나라에서 살았죠
    세월이 흐르고 또 다시 흘러 호기심 가득한
    여행자 한 사람이 성벽을 넘어 들어갔죠
    하지만 거기엔 금은보화는 없고
    시간이 쌓은 먼지만이 가득 있었죠
    성에 들어온 사람도 갇혀
    켜켜이 쌓인 먼지의 일부가 되고
    결국에는 성 마저도
    땅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져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으니
    욕심이란 이렇듯 먼지처럼 허망한 것

노래가 끝났지만 박수도 반응도 아무 것도 없었다. 소녀는 당혹감과 어리둥절로 가득한 주위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고, 역시나 대표자로 자리잡은 불룩이의 불평이 박수를 대신했다.

"뭐야 그게? 갑자기 웬 노래야? 할 말이 없으니까 노래나 부르겠다는 거야?"
"이 노래는 그저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이 이야기가 사실을 전하고 있음을."
"사실? 그 노래 내용이 실제 있던 일이라고?"
"너희들이 딛고 있는 이 땅은 예전에는 훨씬 더 크고 넓었단다. 그 시절 여기엔 커다란 궁전과 수많은 집들과 긴 성벽이 있었지. 허나 그 모든 건 땅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단다…… 그래도 그 일부는 아직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게야."

소녀는 류트를 품 안에 넣고 지팡이를 들어서 주위의 바위산을 가리켰다.

"동그랗고, 뾰족한 이 바위들…… 바위처럼 보였던 이것들은 모두 그 왕궁의 첨탑이란다. 세월의 더께가 씌여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난 오랫동안 이 땅 밑에 있었단다. 사람도 빛도 없는 버려진 나라와 궁전을 헤매며 밖으로 나갈 길을 찾아왔어. 이제 오늘 이렇게 난 하늘지붕 아래에 다시 서게 된 게야……."

아이들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비쭉비쭉 솟아 있던 바위산들이 모두 사람이 만든 건축물의 일부였다는 사실, 그런 성이 땅 밑으로 가라앉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 그리고 그 땅 밑에서 올라온 소녀의 존재. 그 모든 놀랍고 복잡한 일들이 단순하고 변화 없는 삶을 살던 아이들의 머릿속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정리는 커녕 감당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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