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여긴 너희들밖에 없는 거니? 아버지란 분은 어디에 계시고?"
아버지에 대한 말이 입밖에 나오자 불룩이는 화가 났다. 네가 아버지에 대해 뭘 안다고.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있을 때는 모든 게 좋았다. 짚으로 깐 아늑한 잠자리, 물을 모아놓은 샘, 그런데 지금은……. 심술이 나자 일부러 거친 목소리로 퉁명스레 답했다.
"아버진 죽었어! 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어느날 그랬어. 이제 자긴 잠들면 다시는 안 일어난다고. 그게 죽는 거래. 정말 아버지는 안 일어났어. 몸에서 냄새가 나고 날벌레들이 달라붙을 때까지도 안 일어났단 말야!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미리 시킨 대로 땅에다 묻고 돌을 쌓아줬어. 저기 보이는 저거야."
그가 가리킨 손 끝에 작은 돌무덤이 있었다. 소녀는 물끄러미 돌무덤을 바라보더니 지팡이를 뽑아들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소녀는 말없이 작고 조악한 돌무덤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뿐. 불룩이와 아이들은 소녀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그저 무덤을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싫증을 잘 내는 어린아이들이 날벌레를 잡으려고 손을 휘젓거나 끼리끼리 장난질을 치고 있을 무렵 소녀가 입을 열었다.
"사오 년 정도 전에, 한 사내가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단다. 원래의 배의 일부분이었을 널판지 위에 매달려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절망의 항해를 이어가고 있었지."
소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는 큰 배의 선원이었다. 배가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 풍랑 속에서 뒤집어지기 전까지 그의 인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간신히 널판지를 붙잡고 목숨을 건졌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망대해에 자신 혼자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같은 난파선의 생존자를 만났다. 배가 가라앉을 때 아이들을 먼저 태워 피신시켰던 작은 쪽배였다.
그 배 안에는 어린아이들 십여 명과 성인으로는 여인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사내는 배에 올라 물과 음식을 얻어먹고 겨우 기운을 차렸으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육지는 보일 기미가 없고 아이들은 너무 많은데 음식은 조금밖에 남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후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둘이서만 가자고. 육지에 오르면 결혼해서 함께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여인은 자신이 이미 결혼한 몸이며 이 아이들은 자기 자식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화가 단단히 난 사내는 다음날 먹을 것을 적게 준다며 다투다가 반은 실수로 또 반은 일부러 여인을 바다에 빠트린다. 허우적대는 여인을 뒤로 하고 힘껏 노를 젓던 그의 앞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이제 아이들도 다 내던지고 혼자서 물과 음식을 취하면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 해류의 영향이었는지 배는 빠른 속도로 육지로 향했고 사내와 아이들은 드디어 뭍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고 가파른 바위산에 가로막힌 조그만 개펄에 불과했다. 물과 음식도 떨어진지 오래, 지금 다시 떠나도 언제 육지에 다다를 수 있을런지. 사내는 절망에 빠져 식음을 잊고 그저 슬피 울며 찾아올 죽음만 기다렸는데, 어느새 그를 믿고 따르던 아이들이 저마다 조개니 민달팽이니 하는 걸 잡아다 주면서 사내를 보살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는 깨달은 바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언젠가 육지로 돌아갈 때가지 이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아이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이곳에서 변함 없이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긴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걸 끝맺을 무렵에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지금 처음 만난 소녀가 어떻게 아버지와 자기들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를 알았냐는 의문이었다. 쉭쉭이와 다른 아이들이 불룩이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주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불룩이가 대표로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설마, 그거 우리 이야기? 우리가 여기로 와서 살게 된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난 희미하게 기억이 나. 조그만 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 그때 우릴 돌봐주던 사람이 있었어. 내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차갑고 보드라운 손이 기억 나."
"나도 기억 나! 날 안고 노래 불러줬어!"
"나도! 나도!"
조금 덩치가 큰 아이들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서로 지지 않으려고 소리쳤다. 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자기들을 돌봐준 그 누군가를 만났던 그 작은 배에서의 일들을.
"근데 말이야,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불룩이의 질문은 아이들의 환호성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가까이에서 하늘우물이 그 하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성과 함께 우물 아래로 몰려들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라도 더. 축복의 생명수를 입 안에 넣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크게 벌리고 혀를 쭉 내민다. 불룩이도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아 힘없는 애들을 밀치고 양손과 입으로 물을 받았다.
소녀도 천천히 따라갔으나 아이들의 아수라장 속에는 그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밀치고 당기고 하는 틈에 그만 축축한 개펄에 넘어졌다.
"물을 다오. 내게……"
소녀의 조그만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으나, 그 마음만은 하늘우물에 가닿으리라.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고, 하늘우물이 잿빛 하늘 속으로 얼굴을 감춘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해갈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비가 그치자 아이들은 투덜대며 흩어졌다. 불룩이는 소녀에게 싫증이 났는지 그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말했다.
"우린 밥 먹을 거야. 너도 우리랑 같이 먹고 싶으면 네가 아는 걸 가르쳐줘야 돼. 바깥 세상으로 가는 방법 말야. 아니면 너도 우리처럼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든가."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주저앉은 채로 반쯤 엎드렸다. 갈증과 피로로 이미 일어날 힘도 없어보였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뭉치며 자기들의 소굴인 고둥 모양 바위산 밑으로 모였다.
하아. 숨을 내쉬자 연한 입김이 피어났다. 어느새 주위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공기도 땅도 차갑고 눅눅했다. 소녀는 돌무덤을 돌아보며 그곳에 누운 이가 자신에게 전해준 삶의 기억과 그 절망과 슬픔, 그리고 아이들에게 남긴 희망의 편린을 되새겼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과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영원히 이어지려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자식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서만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건 아닐 텐데.
소녀는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을 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잿빛 하늘과 땅, 검푸른 바다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채 영원히 세상과 유리된 이 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저기, 저기요. 마법사님?"
소녀는 떨리면서도 똘망똘망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고 무덤쪽을 향했던 얼굴을 제자리로 돌렸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바위산 위에서 보았던, 등에 커다란 혹을 짊어진 아이였다.
"마법사님이시죠?"
다짐을 구하려는 듯 아이는 재차 물었다. 힘들게 달려왔는지 연신을 숨을 헐떡인다. 소녀의 시선이 아이를 처음 보았던 바위산 꼭대기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분명 꼽추 아이가 내려오기에는 힘들었으리라.
"혼자 힘으로 내려왔나보구나."
"흙이 무너진 쪽으로 내려와서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어요. 벽이 울퉁불퉁해서 미끄럽지도 않고 붙잡을 곳도 있었거든요. 저 네 발로 바위산 오르내리는 건 자신있어요."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발이라. 비유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 소녀의 마음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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