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 자세한 정보는 공식 사이트를 봐주세요. http://www.pilza2.com/novel/cornu.html


허리까지 오는 수풀을 넘어 한적한 공터로 나오자 주위 나뭇가지 위에, 잎사귀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존재들에게로 시선이 갔다. 아까 흥흥이에게 속수무책으로 잡아 먹히던 작은 이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이 소녀의 발치로 다가왔다. 멀리서보면 흡사 저절로 움직이는 나무 열매와 나무 조각처럼 느껴지겠지만, 가까이에 오면 작고 동그란 생물들이 제각기 열매 껍질이나 속이 빈 나뭇가지를 뒤집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나름대로 숲에서 모습을 숨기고 살기 위한 방책인 듯 싶었다. 소녀는 그들을 마주 대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는 헤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위험에서 구해준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다.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대화 내용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주어 익히는 것도,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영감 같은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자연이라는 말 그대로, 그저 존재하는 사물을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마음 자체로.
소녀는 그럴 때면 이마에 솟은 뿔이 어떤 통로처럼 세상에 흘러 넘치는 감정과 지혜를 빨아들여 자신에게로 전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순간 소녀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세상 그 자체였다.
세상과 하나로 호흡하고 같은 감정을 느낀다. 산의 침묵과, 들판의 열정과, 구름의 설렘을 배운다. 달의 슬픔과, 바다의 분노와, 바람의 근면을 배운다. 그리고 소녀는 하늘지붕 너머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무심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 그들은 소녀가 원하는 바를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들은 누군가를 찾고 싶어하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걸 도와줄 수 있겠냐는 간절한 바람을 들었다. 그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답하자, 소녀가 충분히 기쁘고 고마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숲 속으로 흩어졌고, 몇몇만이 소녀와 함께 남아 있었다.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찾고자 하는 상대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가깝고 쉬운 곳에 있었으니까. 곧 몇몇 무리가 나타나 소녀에게 찾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소녀보다 조금 더 작은 키, 검은 머리카락, 구부러진 등에 달린 커다란 혹, 생기있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바라보고 과일을 맛있게 먹는 아이, 지금은 자기들의 보금자리 구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아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소녀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깊고 깊은 숲 속의 속의 속.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에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공터가 하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이미 나무로서 생을 마친 그 나무는 숲의 주민들을 위한 보금자리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그 아래에 수많은 방과 통로들이 저마다의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음이다.

작은 이들의 안내를 받아 소녀는 뿌리의 틈을 통해 입구로 들어갔다. 가장 처음 나오는 널찍한 공간 구석에서 아이는 입에서 한 줄기 침을 늘어뜨리며 자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가갔지만 너무나 달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 굳이 깨우고 싶진 않았다. 그저 무사한 것만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마침 밤새 숲을 헤매느라 시장한 터라 곁에 놓여 있던 과일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고 있는데 옆 통로로 향하는, 유일하게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작은 이들과 함께 이 안에 살고 있는 유일한 다른 존재인 그는 주름진 긴 몸을 가진 늙은 애벌레였다.
인간의 것을 닮은 투명한 눈망울과 짙은 빛의 눈동자는 그가 긴 세월 속에서 얻은 무수한 지식과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이들이 그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몸 위에 앉아 있고, 반딧불이들이 주위를 날아다니며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반딧불 덕분에 밤중의 땅 속임에도 주위의 사물들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아르르, 그르르. 늙은 애벌레는 입 속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한 소리를 내었다. 말라버린 깊은 우물의 바닥을 긁는 듯한 울림이었다. 잠시 목을 가다듬는 듯 하더니 그의 벌어진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 아. 큼큼. 정말, 오랜만에 인간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군."

그는 스스로가 놀랍거나 대견하다는 듯 혼잣말로 운을 띄었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느끼곤 그를 향해 자신의 큰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압니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이일 텐데도……. 그러니까, 당신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지요."
"나 역시. 당신과 여기 이 작은 이들의 마음을 느낍니다. 난 당신들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지요.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이전에 당신들은 이 땅의 주인이었지요. 바다에는 용이 살고, 산과 들에는 씨앗[種人]들이 살던 때……."

"그리고 하늘, 하늘지붕에는 뿔난이[有角人]들이 살고 있었지요. 숲에는 우리들의 선조들이 살던 그 풍요롭고 안온하던 시절 말입니다. 하늘지붕과 대지를 새와 나비들이 왕래하던 그 좋았던 옛 시대. 전 제 선조들로부터 전승된 기억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습니다. 풍요의 시대는 사라지고, 하늘지붕은 그 문을 닫고, 뿔난 이들도 용들도 자취를 감추었죠. 대신 땅 위를 차지한 건 인간들이었습니다. 씨앗들은 대부분 저 차갑고 어두운 땅 속으로 숨어 들어갔지요. 일부는 이렇게 숲 속에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남기도 했지만요."
"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이 모여 있는 걸 처음 보았답니다."

"그렇겠지요. 이 땅 위에 씨앗을 뿌리고 비옥한 땅과 울창한 숲을 일구었던 이들은 이제 인간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이렇게 멸종의 위기에 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완전히 멸족한 걸로 알던 뿔이 난 사람을 만난 것이 훨씬 놀라운 일입니다."

소녀는 말없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기들을 이끌고 보살피는 지도자, 촌락의 장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늙은 애벌레가 직접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였는지 수많은 작은 이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조잘대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추측하며 떠들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만으로도 대충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뿔난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날개 달린 이들과 함께 말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긴 세월을 이겨내고…… 망각의 강을 건너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인지요……."
"용들은 아직 바다에서 소수나마 살아 남았고, 여기 숲의 아이들도 이렇게 살아 있지 않나요.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런지요.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는 기억치 못합니다. 분명 그건 하늘이 무너지던 시절의 이야기겠지요. 하늘과 땅과 바다가 완전히 나뉘어지지 않던 무렵의."

애벌레는 동의의 눈빛을 보내며 마음 속 깊이에 새겨진 먼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서고 깊숙이에 박혀 있던 책을 꺼내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한 장 한 장 펼쳐 읽는 것처럼 신중하고도 그리운 마음으로 되새긴 기억들.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선조의 선조의 선조로부터 이어진 기억 속의 세상을 떠올렸다.
하늘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땅 속과 바다 밑이 온전히 구별되지 않던 혼란스럽던 세상에, 뿔이 난 이들이 나타나 평화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습을 빚어 낼 큰 짐승을 만들었고,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용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 땅을 다스릴 인간을 만들었고, 하늘과 땅을 이어줄 날개 달린 인간을 만들었다.
그 후 세상은 오래도록 번영했으나 뿔이 난 사람들, 세상을 다스리는 선민들의 낙토, 코뉴코피아라 불리던 세상 위의 세상, 그 하늘지붕이 무너져 하늘과 땅이 동시에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지금 하늘지붕의 반은 바다에 떨어져 사라졌고 반은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선민이 사라진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으나 대신 풍요로움을 잃어갔다. 땅 속에선 세월의 흐름에서 낙오된 생명들이 모여 세상의 정화를 위해 버려진 오물 속에서 증오의 탑을 쌓고 있었다. 언젠가 그 끝이 땅 위로 솟아오르게 될 날, 세상은 두 번째의 위기를 맞을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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