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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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땅도 바다도 아닌, 생명이 사는 제 사의 터전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는 버려진 공간으로, 저 깊은 땅 속, 빛과 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좁고 어두운 구역이었다.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황폐하고 척박한 그 지저세계에도 주인은 있었다. 오랜 옛날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에게 버림받아 추방된 자들이, 세상의 정화를 위해 쓸어낸 오물과 함께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긴 세월이 상처를 아물게 해주었고, 고통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밥을 먹고 잠을 사며 자식을 낳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벼린 증오의 칼날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듭난 담금질로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워졌으니, 그 검을 손에 쥐고 복수를 맹세한 왕의 등장에 지저인(地底人)들은 모두 환호했다. 그들은 태고 이래 처음으로 나라란 걸 세웠고 왕을 영접했다. 왕의 명령 하에 위로 향하는 긴 굴을 파고 탑을 쌓았다.

왕은 그들이 곧 이 탑을 통해 저 지상으로 올라가게 되리라고 설파했다. 그리 되면 지상은 곧 자기네들의 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기둥을 통해 하늘지붕으로 올라가서 세상 위의 낙토까지 다 자신들의 영토로 만드리라고 약속했다. 그 원대한 야망 앞에 지저인들은 무릎을 꿇고 복종과 충성을 맹세했고, 그들의 탑은 한낱 지상이 아니라 저 하늘지붕을 향해서 뻗어나가고 있었다. 거침없이, 그리고 탐욕스럽게.

긴 다리를 휘저으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자가 있다. 비틀거리고 발을 헛디뎌 넘어질 듯 하면서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지저인의 왕궁이자 하늘로 오르는 탑으로 들어갔다. 그가 몸에 두른 천의 끝이 깃발처럼 나부끼자 그걸 알아본 문지기들이 아무 말 없이 성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 깃발은 왕의 전령임을 알리는 징표였다.
길고 긴 계단을 올라 전령은 마침내 어전에 도달하고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팔이 없는 대신 길고 튼튼한 다리를 지닌 지저인은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다는 달성감과 왕의 위엄에 압도되어 느끼는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었다.

옥좌에 앉아 있던 덩치 큰 건장한 사내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전령의 뒤에 서있는 상반신만 부풀린 듯 건장한 모습의 병사가 말했다.

“보고하라!”
“하, 하, 네, 네, 왕이시여, 헉, 헉, 저는, 제, 이, 두, 눈으로, 하, 하, 후, 후, 또, 또혹, 혹, 똑, 히, 휴, 휴…….”

거칠게 숨을 내쉬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왕의 앞이라 긴장이 되기도 해서 나름대로 빨리 보고를 하려고 했으나 미처 호흡을 가라앉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말을 하려다보니 말은 더 헛나오고 숨은 더 거칠어졌다. 병사들이 채근하려는데 왕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바로 옆에 웅크리고 있던 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조금만 기다리시옵소서. 제가 직접 알아내겠나이다.”

그는 여덟 쌍의 가늘고 뾰족한 다리로 얼른 전령에게 다가가 사마귀처럼 날카로운 앞발을 들었다. 낫처럼 뾰족한 끝이 여러 장으로 갈라지며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변했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전령의 두무뭉술하고 시커먼 얼굴이며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자, 생각을 해라. 네가 보고 느낀 걸 떠올리기만 하렴. 내게 있어 네 생각을 읽는 것 쯤이야 식은 죽 먹기와 같으니까…….”

물론 그에 따르는 끔찍한 대가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전령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며 거부반응을 나타내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두건에 감싸여 휑휑한 두 눈 외에는 보이지 않는 네크로사이드의 얼굴과 마주친 순간 전령은 죽음의 얼굴이 무언인지 실감했다. 그리고 그에게 혼의 일부를 보여준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병사 둘이 다가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전령의 시체를 질질 끌고 물러나는 동안 네크로사이드는 왕의 곁으로 돌아와 그가 훔쳐본 전령의 기억을 전했다.

“폐하, 저 자 그리고 저 자와 함께 있던 염탐꾼들이 유각인을 찾았다고 하옵니다.”
“지상으로 빠져나가 우리의 애를 태우게 했던 그 녀석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그 조그맣고 생쥐 같이 영리한 놈이 용케도 우리를 따돌리고 세상 위로 달아났나 싶었는데, 역시 멀리 가지는 못했나봅니다. 어느 숲에 있다고 하옵니다. 인간에게 쫓겨난 고대 종족의 후예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숲이옵지요.”
“당장에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왕이 양손으로 자루 끝을 짚고 있던, 위엄과 권력의 상징인 장검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려 네크로사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거미줄 위를 넘어다니는 거미의 발처럼 쉴새 없이 춤을 추었다. 그의 신체 중에서 눈에 띄게 움직이는 건 오직 그 가느다란 손가락 뿐이었다.

“폐하, 서두를 필요 없사옵니다. 지저인들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태양 아래에선 마치 물을 잃은 고기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법이지요. 지금 조금씩 훈련을 통해 지상에 익숙해지고 있는 병사들이 있으니, 그들이 완전하게 빛과 바람을 극복하게 되면 즉시 행동에 나서겠사옵니다. 지금은 위치를 놓치지 않고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조급하게 굴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문이 있고, 문의 열쇠도 찾은 셈이옵니다. 모든 것은 열 밤도 지나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문을 여는 것, 그것이 그들 여행의 종착역이며 임무의 완수이고 소망의 성취라면 이제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거꾸로 파는 개미굴처럼 그들이 위를 향해 파는 긴 동굴이 이제 끝을 보려 하고 있었다. 한없이 쌓던 탑은 여력이 다해서 어느 순간부터 굴의 벽에 긴 계단을 닦는 것으로 대신했고, 그 마저도 사다리로, 이제는 아예 벽에 손과 발을 넣을 흠을 파는 정도로 간략해지긴 했으나 땅에 가로로 눕히다면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이르기 힘들 엄청난 길이의 굴이 땅 속에서 하늘기둥을 거쳐 하늘지붕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어, 왕이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하늘에 구멍을 뚫고 그 위로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으로 가는 길은 마련했으되 아직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지저인의 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시간은 큰 방해거리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아이로 태어나 땅 밑으로 버려진 기구한 존재인 그에게 네크로사이드가 다가온 것은 그가 아직 세상의 이치를 채 깨닫지도 못한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까지 지저인은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개념이 없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들짐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겉모습만큼이나 사는 모양도 제멋대로였고 일정치 못한 태고의 혼돈 자체였으니, 네크로사이드가 그 아이를 왕으로 추대한 건 '지저인이 아닌 존재만이 지저인을 다스릴 수 있다'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예언 비슷한 격언 때문이었다.

용이 하늘과 바다를 누비던 시절부터 살았더라는 소문만 돌던 수수께끼의 인물 네크로사이드의 가르침으로 어린 아이는 용감무쌍한 전사가 되었고 그의 주술 덕분에 나이를 먹지 않는 불로의 육체를 손에 넣어 마침내 지저세계를 휘어잡은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 기다림은 그저 무료할 뿐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지저인의 왕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새로운 전령과 유각인의 위치를 쫓아갈 병사들을 새로 뽑아서 보내라고 일렀다. 곧 걸어서 혹은 기어서 혹은 굴러서 혹은 걷가다 기면서 혹은 다른 방법으로 몇 명의 지저인들이 와서 왕의 머리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 중 다리 네 개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자를 전령, 목이 길어서 주위를 잘 볼 수 있는 자를 감시원, 몸이 납작하여 들키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는 자를 미행 담당으로 임명했다.
그 외에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이들은 그냥 그들을 도와주거나 보초를 서는 역할을 맡겼다. 그들 모두 왕에게 감사를 표하고 존경의 말을 읊은 후 물러갔다. 반복된 훈련으로 만들어진 생기 없는 언행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지저인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왕과 그의 유일무이한 스승이자 조언자인 네크로사이드는 신하와 백성들을 한 번 쓰고 버려도 되는 일회용품 취급을 했지만 불평불만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의 지능이 그만큼 뛰어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왕의 공포정치에 억눌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지저인들 대부분은 머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기관의 모양과 위치가 일정하지 않았고, 그 빛깔 역시 그림자와 같은 색밖에는 없었으니, 세상이 버린 그림자들이 뭉치고 쪼개지며 만들어진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대로 놔두었다면, 그들은 태곳적 이래로 그랬듯 앞으로도 무지하고 미개한 채로 살고 있었으리라. 왕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건국과 통치를 정당화시켰다. 지금 그들은 무질서와 혼란에서 벗어나 질서와 체계가 잡힌 신세계로 나아가고 있고, 이제 지상을 향해 복수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곧 하늘 위의 낙원을 지배할 날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네크로사이드가 속삭인 청사진을 통해 왕이 가슴에 품은 포부에 의하면 그랬다. 그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이상, 서두를 필요 따윈 없었다. 시간은 빛에 의지하며 사는 지상세계의 무력한 인간들에게완 달리, 걸림돌이 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둠이란 시간의 흐름에도 색이 바래거나 변하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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