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 자세한 정보는 공식 사이트를 봐주세요. http://www.pilza2.com/novel/cornu.html


아이는 물에 발을 담근 채 자신의 손을 쥔 소녀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조그맣고,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육체가 해거름의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가까이에서 보자 아이는 소녀가 자신이 함께 살던 아이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덩치는 비슷하건만 소녀의 몸에는 작은 상처도 울퉁불퉁한 곳도 없이 매끄럽고 깨끗했다. 대신 온몸에 난 하얀 잔털이 바람을 타고 하늘거렸다. 손가락으로 집으면 툭 끊어질 듯한 가느다란 솜털이 팔뚝이며 가슴, 허벅지 등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길다란 머리카락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그런 모습은 아이에게 나비를 탔을 때 내려다 보았던 숲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조밀하게 모여 있던 나무의 모습, 풍성하게 자라 들판을 뒤덮은 풀의 모습. 소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거칠고 메마른 존재인 이마의 뿔은 황량한 바위산을 연상시켰다. 뿔은 풀 한 포기 없이 긴 세월에 조금씩 풍화되는 바위산의 빛깔과 모습을 닮았다. 이마 한 가운데에서 솟아나 약간 위를 향해 굽어진 가느다란 뿔.
소녀의 몸에서 굵고 투박한 건 하나도 없이 오직 섬세하고 가느다란 아름다움만이 가득했다. 반면 아이는 시커멓고 상처 투성이에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등에 있는 커다란 혹이 몸을 짓눌러, 날개가 떨어진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흉측한 자신의 육체를.

"자, 어서."

소녀가 다정하게 아이를 채근했다. 마침내 차가운 물에 발을 집어넣고,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물살 속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는 데 성공했다. 소녀는 머리만 빼놓고 온몸을 물에 담갔다 일어선 후 아이도 똑같이 하려고 했다.
하지만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아이에겐 힘든 일이었다. 차갑다고, 싫다고 몇 번이나 나가려고 하는 걸 간신히 붙잡아 놓은 후, 소녀는 물가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돌멩이를 몇 개나 손에 쥐었다가 도로 내려놓기를 반복한 후 마침내 원하는 걸 발견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물가에 앉아서 한숨을 돌리던 아이가 호기심에 다가왔다.

"그게 뭔가요?"

아이가 보기에는 그냥 돌인데.

"표면이 거친 걸 찾았단다. 네 몸의 때가 하도 많아서 그냥 흐르는 물에는 다 씻기지 않거든."
"그, 그걸로 어, 어쩌실 건가요?"
"이렇게 하련다!"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아이를 앉히고 돌로 팔이며 등, 다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프다고 싫다고 악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몇 번이나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으나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붙잡혀 시냇물에 던져졌다.
겨우 물살을 헤치고 나오면 또 때밀기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소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놔주었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물에 씻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자, 어서 몸을 말리자꾸나. 물을 다 안 말리면 밤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 게야."

소녀는 바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모아두었던 나뭇가지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간혹 아궁이의 불이 꺼질 때면 크게 화를 내며 호통을 치던, 부딧돌로 힘겹게 불을 켜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자 아이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억지로 눈물을 참고 소녀의 옆에 앉았다. 소녀는 부싯돌도 무엇도 없는 맨손이었지만, 쓰다듬는 듯한 손길만으로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조그마한 모닥불로 변했다. 자연스러운 탄성이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야아! 대단해요! 고마워요, 마법사님!"
"내가 아니라 불을 빌려준 바람에게 감사하렴."

둘이는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불을 쪼이며 몸을 말리고 옷을 입었다. 아이는 소녀의 망토를 몸에 두르고 옆으로 누웠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니 거기에는 수많은 별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가득 매달려 있었다.

"와아, 저게 다 뭐예요? 저건……?"
"별 말이니? 너는 별을……"

별을 본 적이 없냐고 물으려다가 소녀는 말을 멈추었다. 하늘지붕 아래에서 자란 아이는 별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하늘지붕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니까. 아이는 분명 이제까지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으리라.

"정말 예뻐요. 별이란 게 저렇게 많았나요? 아버지가 해주던 옛날 이야기에 별님이 나오고 별나라가 나왔지만 그게 저렇게 작고 저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저 하나하나가 다 별인가요?"

아이는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재잘거렸다. 그러다가 피곤에 겨워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소녀에게는 그 모습이 계속 별을 보고 싶은 마음과 잠을 자고 싶은 몸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먼 길을 왔으니 그만 자거라. 별은 내일 밤에 또 볼 수 있단다."
"그러는 마법사님은 왜 안 주무세요?"

소녀는 눕지 않고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난 네가 잠들고 나면 자련다. 오랫동안 혼자 있는 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옆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구나."
"그렇구나……. 전 거꾸로인데요. 아이들이랑 뒤엉켜서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혼자 자려니까 좀 그래요."
"내가 자장가라도 하나 불러주련?"
"네! 좋아요. 불러주세요."
"그런데 이를 어쩐다. 막상 부르려니까 잘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내가 자장가를 불러본 기억이 없으니……. 그래. 대신에 다른 걸 불러줄게. 마침 별 하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구나. 조용하니 잠들기에는 좋은 노래일 게야."

아이는 이미 눈을 감고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벌써 잠이 든 건지도. 어찌 되었든, 소녀는 스스로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하프를 꺼내어 조그맣게, 행여나 자는 아이가 깰세라 살짝 튕겨 보곤 목소리를 낮추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득히 깊은 물 속에서 불빛이 반짝이네
    오로라처럼 반짝이는 별들의 향연
    내게 지느러미 있다면 깊이 내려가
    이 손 안에 빛을 가득 담을 텐데

    언젠가 꿈 속에서 느꼈던 아늑함, 잃어버렸던 따스한 미소
    그곳 어딘가 전부 있을 것 같아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데

    내 손 안에 가질 수는 없다고 해도
    눈 감으면 다시 떠오르는
    빛방울들은 내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어

    멀고 먼 밤하늘 저편에 별빛이 반짝이네
    심해에서 솟아나는 물거품처럼
    내게 날개라도 있다면 높이 올라가
    이 품 안에 빛을 가득 안을 텐데

    닿을 수 없는 목표를 바라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중요한 것을 놔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데

    소중한 건 멀리 있는 것만이 아냐
    눈을 감고서 헤아려보면
    아름다운 빛 내 가슴 속에서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어

    이제는 알았어 내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음을


(제1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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