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하나 쓰는 동안 방문자수가 60명이 되었다. 어떻게 된건지 몰겠다. 누가 날 스토킹 하고 있나 보다. 예전에 용호가 나를 기쁘게 해준다며 나 몰래 내 싸이 방문자수를 300여명 가까이로 만든적이 있었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100번 정도 해서 그렇게 했다던데.. 이것도 용호가 하는 짓인가? 근데 글을 수정하는 10여초 사이에 30여명이 늘고 다시 무엇을 검색하다 새로고침 해서 30여명이 방문한걸 보면 용호 혼자만의 소행은 아닌 것 같다. 뭐지.. 그나저나 방학이 끝나간다. 나는 담주엔 제주도로 놀러간다. 남들은 취업 공부한다고 하루에 12시간씩 공부한다는데 나는 취업에 관련된 공부는 한달에 12시간씩 하는 것 같다. 이번달 들어 전공책을 펼쳐 보지 않았으므로 8월 한달간 만은 그럴법 하다.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은 안들지만 너무 안일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 2년 동안 영어 공부를 바짝한 이후로 영어 공부도 거의 안하고 있다. 오늘 네이버 보니까 영어 실력이 소득 격차와 연관이 있다던데.. 영어 공부를 안한게 아마 수능때 영어 셤을 망친 이후로 잘 안한 것 같다. 만점자가 수두룩 할때 상위 10프로 안에도 못드는 성적이 나온이후로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발작하는게 아닐까 한다. 교내 영어 경시대회에서 1등도 하고 텝스 성적도 800점 가까이 나오던 시절이라서 영어는 다 맞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난 셤 운이 없는 것 같다. 모의고사에서 하나만 틀려도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시절에 그렇게 셤을 망쳤다는 건 정말 운이 없는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영어 공부를 하루에 한시간 씩만 했어도 영화대사를 거진 다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영화 대사를 알아듣기는 정말 어렵다. 예전에 굿모닝 팝스 들었을때는 안들려서 대사를 다 외우곤 했는데 요즘은 그러기도 귀찮다~ 어이야 뒤야~~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띵가띵가 거리고 놀고 있는건 그래도 프리토킹까지는 가능한 영어 실력과 잡다한 것에 대한 지식과 글빨과 더불어 혼자 자랑스레 생각하는 내 센스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들 공부하라고 그러는데.. 난 놀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회나가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영혼의 피폐함은 부의 증식을 낳고 육체적 쇠락을 낳을 터인데.. 돈되는 공부를 정녕 해야하나.. 몰겠다. 케익 먹은게 이제 소화된 것 같다. 이제 잘 수 있겠다.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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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Ludwig Van Beethoven - Piano Sonatas Nos.30,31 & 32 / Rudolf Serkin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Rudolf Serkin 연주 / 소니뮤직(SonyMusic)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일본 작가 하루키는 그의 에세이집에서 루돌프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을 비교한 적이 있다. 하루키의 평에 따르면 제르킨은 진지하고 심각한 느낌을 주는 인생을 살았으며 그러한 삶이 그의 피아노 음색에 묻어 난다 하였다. 물론 루빈스타인은 그와 반대되는 대척점의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라 서술하고 있다. 제르킨의 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앨범은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보기 전에 산 것이다.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에서 풍기는 조금은 진지한 아름다움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유명 연주자들의 베토벤 후기 피아노 소나타 녹음을 몇개 사들였었다. 처음 들었던 연주는 폴리니와 박하우스의 연주 였는데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는 연주였다. 연주 시간도 많이 다른 두 앨범은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조금 더 매력적으로 들리게 하였고 그 후에도 빌헤름 켐프의 연주와 굴다의 32번 연주를 사서 듣곤 하였다. 그리고 이 제르킨의 연주는 거의 마지막에 산것 같다.

 기실 연주자의 개성이 뚜렷하지 않는 한 음악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아름다움은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제르킨의 진지함과 수도자적 삶이 묻어난다는 이 피아노 연주 또한 내겐 오히려 유쾌하게 들렸다. 한음한음 진지하지만 곡 자체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아름다움과 맞물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묵직함 보다는 발랄함으로 느껴졌다. 특히 32번 2악장의 중간의 푸가부분(맞는지 몰겠다)이 시작되는 그 변화점에서의 발랄함은 혼자만의 싸움을 하였던 베토벤이라는 사람의 얼굴에도 귀엽다는 말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느낌도 주었다. 진지하기에 유쾌한 이 음반은 그래서 꽤나 들을만 하다. 그리고 점점 동곡에 대한 여러 음반을 구매하는 것은 그리 좋은 취미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거늘 연주자의 개성에 신경 쓰고 음색에 신경쓰다 보면 작곡가가 들려주는 본질적 아름다움의 명료함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뭐든지 비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점에서 나또한 그런 비평가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머리 아픈 일이다. 음악을 분석하는 일은 연주자들이나 평론가들이 할 몫.. 나같은 감상자들은 그냥 향유하면 될터이다. 이 음반은 자켓도 예쁘고 연주도 좋으므로 굳이 다른 음반과 비교 청취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일상을 무난히 영위하는 것도 어려워 지는 세태에 굳이 본인이 향유하는 취미에 까지 엄밀한 노력을 기울이는 건 심력(心力)의 고갈을 가속화 할지 모른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또한 이 농밀한 태양볕 아래서 음악을 분석해서 듣고 있다보면 제가 거처하는 그 태양에 저주를 퍼부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아폴론의 총애를 충분히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아는 것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히 이 후기 소나타는 모를수록 더 아름다운 것 같다. 후기소나타에 대한 분석을 한 여러 글들을 보고 난 후 이 곡들을 잘 안듣는 내 자신을 보면 정녕 그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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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8-2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음반은 제르킨의 말년 DG녹음과는 많이 다를 듯 하군요...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는 다들 좋아라해서 저 역시 여러종을 가지고 있어요.폴리니,제르킨,리히터,아라우,박하우스...정작 구하고 싶은 건 유라귈라의 음반인데 이건 정말 없더군요.

바밤바 2007-08-30 09:44   좋아요 0 | URL
베토벤 후기 피아노 소나타 정말 좋죠~ 저도 이 리뷰 쓰고 나서 다시 또 들어보고 있는데 시간에 따라 들리는 것이 다르네요~ 백건우 아저씨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는 연륜이 쌓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진정한 작품의 본질에 닿을 수 있을거란 말을 93.1에서 했던게 기억 나네요. 감상자에게도 연륜이 있어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듯 하네요^^
 

 엊그제 한시간 가량 쓴 글이 날아가 버린 적이 있었다~ 훨훨~ 이글도 날아가지 않을까 약간 걱정이 되긴 한다~ 훠이야 훠이야~ 오늘은 팬더와의 설전 때문에 잠이 안올 것 같다. 내게 유학을 가라며 아니가면 주종관계를 끊어 버리겠다는 팬더.. 무언가 애정이 작용하여 그런 무익한 압박을 가했다는 건 알겠다만.. 그아인 내가 자아성찰이라는 제목하에 적었던 페이퍼에 나오는 사람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항상 농담으로 건방진 팬더라 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나를 규정하려는 행동과 더불어 내 지인들에 대한 품평회가 일어난 것은 상당한 불행을 초래 할 잘못이였다. 상당할 것 까지 없다 하여도 팬더에 대한 애정이 눈의 여왕이 살았던 그곳마냥 차가워 지는 것은 서로에게 있어 불행이다.

 지금 오디오에선 칼리히터가 지휘한 뮌흐너 바흐 오케스트라의 요한 수난곡이 울려 퍼진다. 난 이곡을 처음 듣는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을때를 떠올리게 하는 우울한 선율이다. 이것은 종교음악으로 요한이란 사람의 수난을 다룬거 같은데 구약성서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무엇때문에 일련의 바리톤과 소프라노들이 서양식 창가를 열창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최근에 읽은 카잘스의 자서전에서 바흐 음악의 위대함에 대한 격찬이 계속 이루어졌던 바 음악의 아버지의 품에서 그가 직접 낳은 자식들을 내 귀로 감상하고 있는 것이 가장 뜻 깊은 독후감이 아닐까 한다. 이 곡이 씨디 두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다 듣고 자려면 해가 뜨지 않을까 한다. 비가와서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낮은 밤보다 더 조약한 형체를 띄고 있기에 낮밤의 구별은 가능할듯 하다.

 최근에 다시 무리한 독서로 인하여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보는 눈을 지니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는 줄리어스 시저의 말이 떠오른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면 상당히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다. 예전보다 생각이 많아졌지만 더 첨예한 고민으로 귀결되는 건 아마 그 새로운 각성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팬더가 나에게 유학을 가라고 강요한 것은 나름 나의 재능을 아껴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나름 선진 문물을 받아오거나 여러 학문을 접한다 한들 소통되지 않은 혼자만의 밀실로 귀결될 바에는 차라리 이 나라의 소시민으로 남으련다. 근자에 내가 가진 영화 디워에 관한 생각을 학교 홈피에 올린적이 있었는데 좀 말도 안되는 댓글이 몇개 있었다. 나는 그 글을 꽤나 공들여 쓰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언어를 골라 쓰려고 노력했으며 여러가지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글귀도 많았기에-물론 혼자 생각- 추천수가 높을 줄 알았다. 근데 별 거지같은 것들이 글의 논지는 보지 않고 길어서 못읽게다는 둥 아니면.. 애국심이 아니고 좋아서 보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둥.. 하는 말로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를 일으켰다. 그래도 거지가 그 사람들 보다 낫다. 왠지 모를 파시즘의 기운과 독선과 아집이 느껴졌던 그들의 댓글 때문에 가녀린 내 가슴은 상처를 받았다. 아무래도 이런 약한 마음으로는 글써서 먹고 살긴 힘들고 전공인 경제학이나 열심히 해서 그런 가치관과 초월한 자본주의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인생을 사는게 좋지 않을까..글 쓰고 보니 참 있어보일려고 여러가지 난잡한 수사학을 동원한 것 같다. 일기도 남들 보는데서 쓰면 이런 폐단이 있다. 하지만 글 쓰기에는 도움이 된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날언어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기는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가정하게 쓰는 것이 좋다. 가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위선적인 모습에 대항하기 위한 나의 소심한 무기는.. 파블로 카잘스가 첼로를 들었다면 나는 키보드를 들어야 겠다. 나는 투사다. 나약함에서 벗어나 데미안이 보여줬던 그 이상향으로 다가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번씩 나의 껍질을 깨트리는 투사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피그말리온 효과의 결과로 인해 현실이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투사다. 싸우자!!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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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tsam 2007-08-2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홈피에 올렸다는 그 글
url좀 올려봐라

바밤바 2007-08-25 02:09   좋아요 0 | URL
안된다~ 밝힐수 없다~ 움하하하.. 내가 수원놀러가면 갈챠주께^^ㅋ

flotsam 2007-09-02 17:50   좋아요 0 | URL
기대 할꾸마ㅡㅎ
 

 디워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덕분에 탈레반에 잡혀간 아해들의 소식이 덜 들려와 내 귀를 편안히 해주고 있지만 디워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귀가 동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많은 않다. 디워를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이 쓴 추천글들을 보면 참 못썼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나마 변씨 아저씨가 쓴 디워 지지 글은 좋았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진중권씨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다. 진중권에 대한 많은 비판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관한 논쟁이다. 진중권은 학술적 용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끄집어 와 서사구조의 부재를 비판하였는데 참으로 옳다고 볼 수 있다. 디워를 보면 그러려니 넘어가기엔 지나친 시나리오 상의 헛점이 많이 보인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긴밀한 이야기 구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소환되고 또 소멸한다.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있었던 부라퀴 군단의 침공은 세계 지배가 가능할 정도의 힘을 보여줬기에 굳이 이무기의 힘이 없어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혹자들은 여기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악의 대결에서도 그런 악의 무리가 반지 하나 때문에 대군단을 일으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 디워를 옹호하고 있는데 디워에서 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군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한 종족들은 악의 세력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디워의 선한쪽은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난도질 당할 뿐이다.
 그리고 혹자는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인상파의 효시인 마네의 올랭피아 사건을 들먹이며 심형래를 옹호하고 있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올랭피아의 미학적 가치가 폄훼된 이유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렸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운 여신이 아닌 일개 창녀를 그림의 주제로 그렸기 때문에 미적 아름다움을 우선시 하던 그당시 보수 논객들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다. 즉 신으로 대표되던 아름다움이 인간이라는 평범한 대상에게 아름다움을 뺏긴것에 대한 당혹과 혼란이 주된 정서였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당시의 미술과 예술 전반에 걸쳐 있던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미(美)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고 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씨앗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올랭피아 사건을 예로 들기엔 심형래의 영화에선 그런 문화의 진보적 논쟁을 일으킬 요소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유를 하려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 불가능 한 형편없는 곡이라 비난했던 안톤 루빈스타인과 같은 피아니스트의 예를 드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약간의 질시와 보드카 냄새 나는 그의 음악에 대한 거부감으로 혹평을 날렸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비난하는 평론가들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디워는 서사를 드러내기 위해 씨지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씨지를 사용하기 위해 서사를 끌어다 붙이 조악한 형태를 띄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이야기 하는 트랜스 포머나 300과 같이 비교적 서사구조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는 영화와의 비교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트랜스 포머와 같은 경우는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최대한 인과성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는 서사의 이음새에 대한 담금질이 일어난다. 또한 외계 생물체의 지구 조난이라는 설정부터 다소 이해심을 유발하는 서사 구조기에 그들이 보이는 눈부신 그래픽의 향연 만으로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300또한 많은 디테일에 신경을 쓴 영화로서 디워의 다소 쌩뚱맞은 진행과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딴지일보에서 읽은 기사에서 몬스터 주식회사에 대하여 극찬한 영화평이 있었다. 그 기자가 놀란것은 그 털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세밀한 그래픽이 아니라 저런 엉뚱한 소재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헐리우드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것이였다. 심형래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영화는 상품이고 이것이 통하기 위해서 줄거리를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화의 미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반발을 살 수 있다. 문화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나뉘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내지는 순수문학과 무협지 등을 대칭 구조로 보는 시각이 있기에 사람들은 문화의 계층성을 부지부식간에 인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워라는 영화는 영화라는 예술이 추구하였던 심미안적 가치를 기술의 진보가 선사하는 시각적 이미지로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어느정도 반감을 산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애국마케팅과 결부된 일종의 네티즌의 파시즘적인 경향이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굳이 우상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약자를 옹호하는 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심형래 감독은 지금 네티즌에게 약자라는 위치에 놓인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주류세력이 다 헤쳐먹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크나큰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파시즘을 일으켰듯이 지금 네티즌이 보이는 진중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우상의 붕괴에 분노하는 파시즘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다들 지니고 있지만 20대 80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회 구조는 조금더 세련된 형태의 파시즘의 등장의 변수또한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디워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 네티즌의 과도한 심형래 옹호로 인해 제기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전가의 보도라는 다수결의 원칙이란 미명하에 다양한 문화의 싹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네티즌들의 분노의 원천은 충무로라는 기득권이 보이는 심형래 감독에 대한 배타적 행위와 일반 관객의 시각을 무시하는 듯한 비평가들에 대한 비난에 근저가 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를 많이 수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충무로의 문화권력에 대한 대항마로 심형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는 장기적으로 우리 문화의 토양을 많이 척박하게 할 것이다. 서사가 조약하여도 그래픽과 정성만 있다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정상적 영화관을 투자자나 신인 감독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냉정해 지자. 진중권또한 네티즌이 보이는 마녀사냥의 행태에서 파시즘을 경향을 읽고 저런 공격적인 말투를 보이는 것일 게다. 언중의 힘은 그렇게 강하기에 그렇게 위험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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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8-1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약자에 대한 동정심'도 결합되어 있군요. 가끔 이렇게 놀러온답니다. 그러하여도 괜찮겠죠.ㅎㅎ 잘 읽었어요.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구요. 좀더 진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비판을 넘어서 보듬고 같은 곳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바밤바 2007-08-15 04:27   좋아요 0 | URL
자주 놀러오시옵소서 ㅋ. 비판을 넘어 보듬고 같은 곳을 보기엔 세상을 제로섬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죠. 이상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수단이 동반되어야 하니 아무래도 순순한 이상적 접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홈피니까 제 맘대로 쓰는거 이해해주시구요.. ㅎ 그래도 나름 비슷한 시각을 견지하는 것 같아서 좋네요^^ㅋㅋ
 
[수입] 쇼팽 : 4곡의 발라드, 뱃노래 Op.60 & 환상곡 Op.49
DG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친머만의 피아노 소리는 너무 아름답다. 도저히 다른 공부를 병행하며 감상하지 못하겠다. 그의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만으로 이미 다른 학문에 대한 탐구정신은 미학에 대한 배반이다. 우선 음색이 너무 좋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답다. 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암투가 뒤섞이는 콩쿠르라는 무대에서조차 이런 음색의 피아노라면 그러한 소란을 없애기 충분할 만큼 아름답다. 역대 들어본 쇼팽 발라드 중 최고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나 루빈스타인의 연주에서도 느끼지 못한 최고의 감성이다. 다른 곡인것 같다. 또랑또랑한 음색이 다른 음악적 짜임새니 구조적 관점이니.. 하는 말들을 다 잠재운다. 그저 마음 편히 들으면 된다. 그러면 가슴에 울린다. 또랑.. 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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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8-2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음반을 좋아라 하는데...정말 아쉬운 건 미켈란젤리가 4곡을 전부 녹음하지 않았다는 거에요.만약 그랬다면..부동의 발라드는 그의 몫이었을텐데..

바밤바 2007-08-30 09:41   좋아요 0 | URL
팀전님이 댓글 써주시니까 영광이네요^^ㅋ 저도 3일동안 제주도 갔다가 배타고 방금 와서 컴질을 못해서 이제야 확인 하네요~ㅎ 미켈란젤리 연주에서는 음색이 항상 귓가에 남아서 인상파계열의 연주자의 음악이 적당하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쇼팽의 발라드도 그의 연주라면 좋겠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