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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어느 책을 읽고 나서 좋다는 말을 하기는 쉽다. 듣는 이도 그 정도 표현이면 감내할만 하다. 헌데 좋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일상적이라 가슴을 두드리진 못한다. 말이 가슴에 엉키고 영혼에 스며들려면 조금은 장황해야하고 세심해야 한다. 김연수의 소설에 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또한 좋다고 말할 것이다. 부질없을 정도의 짧은 대답이지만 그토록 명쾌하고 가벼운 말이 없다. 왜 좋냐고 하면 그때서야 끝을 알 수 없는 언어의 향연이 시작될 테다. 바지런 피우며 말을 직조하고 생각을 풀어낼 테다. 그 말과 짧은 생각의 단편이 지금 시작된다.
책은 닿을 수 없는 말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김연수는 종종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다 보니 말에 대한 더듬이가 잘 발달 되어 있다. 이 예민한 더듬이가 느끼는 작은 세상을 말로 풀어내기 위해 비단을 뽑아내는 누에처럼 그는 온몸으로 글을 밀어낸다. 또 잗다라한 말의 차이에서 세계의 끝과 시작만큼의 이질감을 느끼고 파고든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나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엔 이러한 이질감이 잘 드러난다. 소통의 부재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일상의 흔적에서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더 많은 말로 그 공간을 메운다. 특히 언어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묘한 설렘과 조그마한 불신은 이야기를 직조하는 고갱이이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엔 섬이 있어서 애씀만으론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좁힐 수 없고 다리를 놓아 애써 이어 붙일 수도 없다. 섬을 섬으로 오롯이 인정할 때에야 서로 다른 자아는 하나의 해안이 되고 지구를 만든다. ‘기억할만한 지나침’에 나오는 소녀나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 안기부 직원도 세상에 섭슬리지 못하는 하나의 섬으로 떠다닌다. 그렇게 부유(浮遊)하며 느껴지는 외로움을 누군가는 껴안고 누군가는 저버린다. 특별히 잡초가 무성한 섬엔 바다의 향취만 미만하다.
무엇보다 추억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각 단편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선 김득구의 죽음과 그에 얽힌 아버지의 부재가 가슴에 멍울진 한 여인이 나타난다. 아비의 부재가 낳은 짙은 생채기가 추억과 맞물리며 시나브로 옅어진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선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이 드러난다. 어느 노파와 젊은이를 바투 이어주는 한 편의 시와 그에 대한 담론에서, 죽음은 삶의 대립항이 아닌 또 다른 무늬다. 흔적이다. 이러한 죽음의 애달픔과 죽은이에 대한 그리움은 길항작용을 하여 마음에 너울대고 삶의 빈틈에 켜켜이 쌓인다. 그 쌓임이 마음을 다독이고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한다.
글을 또 다른 글로 풀어내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사물을 활자화된 텍스트로 옮겨내는 데엔 어느 정도 상상의 공간을 활용할 수 있으나, 글은 글로써 엄연히 존재하기에 운신의 폭이 좁다. 그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선 더 벼려진 말을 써야 되고 한층 웅숭깊은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분의 말은 찌꺼기이고 지나친 화장으로 메스꺼움을 주는 꽃 파는 노파의 지분거림이다. 김연수의 글은 쉬이 익히지 않아 집중을 요구하고 문장은 사유를 담기위해 조금은 늘어져 있다. 다만 자늑자늑 다가오는 사유와 치유의 힘은 ‘생활의 발견’과 같은 깨달음과 가르침을 준다. 낮은 가독성은 쉽게 읽히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은유이고 늘어진 문장은 채워진 곳보다 비어있는 곳이 많은 세상에 대한 늘임표다. 글로 삶을 환원하는 방식이다.
이 리뷰 또한 지나친 상징어의 남발로 ‘좋다’란 말 보다 못한 촌스러움으로 읽힐 수 있겠다. 어차피 김연수의 글 또한 삶보다 못한 지식인의 ‘스토리 텔링’이라고 보았을 때 이런 촌스러움이 마냥 부질없기만 한건 아니다. 오히려 말은 횡행하고 마음은 어둑해지는 세상에 조그마한 징검다리 중 하나의 짱돌 노릇 정도는 하지 않을까 한다.
*책을 선물해주신 마음 예쁜 이에게 다시 한번 더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