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스인 조르바 ㅣ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나는 이 책을 예전부터 읽고 싶었다. 인생의 제 맘대로 사는 친구에게 조르바라는 별명을 붙여주고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들먹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실 이 책을 읽지 않은 채 조르바를 이야기 했고 왠지 모를 죄스러움은 이 책을 언제가 갚아야 빚으로 남게 했다. 때마침 알라딘에서 서평 대회도 하니 이제 이 책을 읽을 때가 됐다고 여겼다. 헌데 이 책, 읽기가 만만찮았다.
한 소설을 읽을 때 어느 정도 소설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얼마 전 타계한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처럼 사회를 이해하는 덴 말로 드러나는 의식 보다 무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그리스 문학은 호메로스의 이야기 외에 낯설기 마련이다. 또한 이 책은 카잔차키스에 대한 이해, 그리스 정교에 대한 이해,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에 대한 이해, 무엇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이윤기 씨가 이름난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무의식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대신 난 조르바의 언행에 집중해서 책을 읽었다. 이 책 속 조르바와 화자야 말로 니체가 이야기한 디오니스소와 아폴론적 인간의 전형적이며 절대적 사례다. 조르바는 제 자신에 충실하고 배가 터질 때까지 버찌를 먹으며 무중력인간처럼 춤을 추고선 제 자유의지를 중요시 한다. 이에 반해 작품 속 화자는 스스로의 정념을 잡으려 애쓰고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며 불교의 윤회사상에 심취해 있다. 조르바는 화자를 답답해하고 화자는 조르바에게 많은 걸 배운다. 니체가 말했듯 문명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디오니스소적 인간이 아폴론적 인간을 압도하는 광경이다. 화자는 조르바에게서 차라투스트라의 현현(顯現)을 보는 듯한 감동을 느끼고 그에게서 많은 걸 배운다. 카잔차키스가 니체의 사상에 심취했다는 걸 안다면 이러한 극적 구성은 지극히 그럴 듯하다.
또한 조르바의 말은 거친 언어가 조합해 낸 생활 속 아포리즘이다. 책을 많이 읽었기에 말이 무겁고 행동이 굼뜬 화자를 탓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말을 내뱉는 조르바다. 그는 화자보다 더 당당하고 씩씩하다. 화자는 제 불민함을 탓하며 반성하는 지식인으로 조르바를 아끼고 존중한다. 특히 화자를 ‘두목’으로 부르는 조르바는 사물에 이름을 제 멋대로 부르며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명명철학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이름 짓기는 조르바의 깊음이 철학적 숭고함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조르바가 매력적인 이유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고 허랑방탕한 삶을 꿈꿨다. 조르바와 같은 인물이 주위에 많았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다. 다만 현 사회는 조르바와 같은 인간을 알아 줄 현인이 많지 않고 그를 실패자로 낙인찍을 것이 분명하다. 학문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학자간의 카르텔이 강해지는 현실은 조르바와 같은 인물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풍토를 말해 준다. 아마 니체가 현 사회에 살고 있었다면 역사적 발전에 수반되는 폭력에 대한 성토 대신 현실의 두터운 장벽을 증언하다 미쳐버렸을지 모른다. 점점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억압하고 아폴론적인 면을 찬양하는 현 세태는 조르바식 자유분방함을 태생적으로 싫어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필요하다. 거짓 언어가 횡행하고 말이 넘치는 요즘 세상에서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는 게 세상을 밝게 할 테다. 혹 이미 내 주위에 있는 조르바를 나 역시 홀대 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사람을 대하려 한다. 나는 ‘한국인 조르바’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