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나붓거린다. 윤희의 나직한 음성이, 현우의 무거운 음성이 이야기를 읊조린다. 현우의 말은 1인칭이고 윤희의 말은 편지에 옮겨진 또 다른 1인칭이다. 서로 다른 1인칭 시점의 회상이 애틋하고 담담하다. 미경이가 죽었을 때도 노동자가 탄압당할 때도 말이다. 그런 담담함은 비루한 인생을 사소하게 만든다. 현우의 지난한 감옥생활도 독자의 가슴을 직접적으로 할퀴기 보다는 타자화된 시선으로 보게 한다. 결국 이 소설의 외피는 연애 소설일 수밖에 없다.

5.18의 참담함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피끓던 민주화 운동이 흐르는 연애소설. 은결이가 있고 윤희의 살가운 인연들이 있고 현우의 묵혀둔 그리움이 있기에 연애소설이다. 류시화의 시구(詩句) ‘구월의 이틀’마냥 화사했던 갈뫼가 있기에 이것은 연애소설이다. 현우에게 갈뫼에서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득해진다. 그러면서 그의 삶은 명료해져 간다. 앞에 놓인 잗다란 일상을 이겨내는데 열중할 따름이다. 은결의 존재를 아는 건 윤희였기에 그녀의 갈뫼는 시나브로 짙어간다. 언제나 돌아보면 자신을 안아줄 것 같은 따스함이다. 현우의 갈뫼는 늘그막에야 짙고 깊어진다. 짠하다.

소설을 보기 전 영화를 먼저 봤다. 현우의 나레이션에 지진희의 음성이 겹쳤다. 현우의 감옥 생활을 상상하며 지진희를 떠올렸고 그 나직한 음성이 현우와 잘 맞다고 봤다. 화사한 염정아는 온건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을 윤희와 맞물리지 않았다. 윤희는 그저 윤희였다. 현우의 얼굴은 지진희의 낯으로 명징했지만 윤희는 아스라한 실루엣으로만 남았다. 그게 소설을 더 명확하게 했다.

영화와 겹치는 부분이 꾸준히 많았다. 영화 속 미경이가 분신을 할 때 내 뱉었던 “엄마, 나 뜨거워.” 같은 말은 없었다. 그저 죽음을 애도하는 소주 한잔만이 담담히 이야기 됐을 뿐이었다. 영화 속 현우가 오토바이를 탄 형사의 쇠막대기에 쓰러진 장면도 소설에선 타인의 사례일 뿐이었다. 임상수가 지닌 386에 대한 냉소도 없었다. 영화는 386의 과한 자의식과 미시 파시즘을 조롱하지만 소설에선 스케치처럼 훑고 넘어갈 뿐이다. 영화 속 송영태는 변호사가 된 속물로 묘사되지만 소설 속 송영태는 꾸준한 노마드일 따름이다. 이렇듯 황석영의 보둠이 전반적으로 더 도타웠다. 아마도 광주를 겪었기 때문일 테다. 386의 배신을 손가락 질 하기엔 제 자신의 부채의식 또한 온전히 청산치 못했을 것이다.

윤희가 말하는 방식은 황석영이 가진 가장 서정적인 부분을 잘 드러낸다. 윤희의 느적느적 이어지는 말은 차분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상세한 묘사나 아포리즘 같은 생각의 나열도 충분히 여성적이고 황석영스럽다. 무엇보다 감옥에서 10년 동안 이 소설을 머릿속에서 수백 번 쓰고 고쳤을 그다. 아름다움이 미만한 문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생각 또한 자연스레 깊어 보인다.

1권을 읽으며, 현우의 감옥 생활 묘사에서 나는 황석영을 보았다. 헌데 황석영은 윤희에게 가 있었다. 현우는 그저 황석영의 가엾은 육체였다. 윤희에게 제 정력을 오롯이 투입하고 자신의 지난 삶을 돌이키고 아픔을 눅인다. 자연스레 뜨거운 20세기를 보낸 그 세대를 다독인다. 이 책은 10년 만에 쓴 소설이 아니라 10년 동안 쓴 소설이다. 제 생각을 다듬고 화를 삭이고 계속 고민했을 테다. 윤희 외엔 이런 그를 온당히 맞아 줄 이는 없어 보인다. 결국 윤희의 담담하지만 번잡한 심정은 황석영이 자신에게 띄우는 연서(戀書)다. 자신을 향한 연애 소설이다. 그리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전에 누군가 때문에 맘 졸였던 적이 있다. 그때의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아, 던적스런 내 삶을 돌아볼 때면 아리고 슬프다. 다들 다치지 않고 감사히 살아가길 바랐지만 내 애씀은 모질함으로 비쳐질 따름이었다. 모두가 시퍼런 칼을 갈고 신경을 날카로이 하던 무섭도록 시린 시절이었다. 그 무참한 기억이 어깨를 기댈 이 없을 때면 버짐처럼 스민다. 가슴에 여울진다.

 마음을 눅이고 일상에 전념하려 할수록 삶의 지난함이 매섭다. 음악도 책도 다 심란하다. 먼 곳의 친구를 보고 싶지만 찾아가는 여정의 번잡함이 그리움을 사소하게 한다. 어제는 비가 왔다. 가을이랑 다 잊어버리고 겨울과 함께 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마지막 정표(情表) 같다. 내게 인생이란 머무르려 할 때마다 이별을 고하곤 했다. 그런 이별이 켜켜이 쌓여 내 몸을 가누지 못할 때에는 밀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몸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런 무심함이 홀로 밤을 지새울 때면 눈을 흐릿하게 한다. 눈자위가 슬프다.

 올해 겨울은 조금 덜 추웠으면 한다. 가을에 널리 밥을 구하지 못했으니 겨울이나마 좀 더 포근했으면. 내일 내 삶을 구획 지을지 모를 일을 앞두고선 괜히 번잡하다. 마음은 어린데 육신은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듯하다. 꿈 많던 그 때가 어제처럼 생생하여 더욱 밤이 길어진다. 아침은 멀어져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9-12-1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쓰셨으니 그 날은 오늘이겠죠?
마음을 다지고, 하시려는일 잘 되시길 빕니다.

날은 좀 흐리네요..그래도 웃으시는 하루 되시길!!

바밤바 2009-12-11 18:29   좋아요 0 | URL
그냥 좀 안좋은 일이 있어서요^^;;
생각은 두서없는데 문장은 괜찮은듯 하네요.. ㅎㅎ
바람님도 웃으시길^^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석영의 세상은 달랐다. 그는 말로 회자되기만 하던 부분을 다룬다. 닿지 못할 세상을 글로 증명하고 몽환적으로 풀어낸다. 이 몽환 속에서 ‘바리’는 치유의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난다. 샤먼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살필 줄 아는 바리이기에 이 ‘잔혹동화’가 생살 찢기듯 아프지는 않다.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고 내 누이 같은 바리에 대한 연민으로 현실이 사치로 여겨질 따름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회상 장면마냥 정겹고 따스하다. 잗다란 다툼이 곰비임비 일어나지만 그걸 다 넉넉히 안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 신발을 두고 다투는 언니들은 그득 각자의 절박함을 감안하더라도 흐뭇하다. 70년 대 한국이 연상됐다. 물론 군사 독재와 같은 시대적 문제는 다 훑어내고 전원의 아름다움만 남은 70년 대 말이다. 바리네 가족 또한 북한의 모순적 실상을 걷어 낸 그저 단란한 모둠체일 뿐이다.

 삼촌이 어딘가로 사라진 후 그들의 전원은 지옥이 된다. 아비는 초주검이 되도록 일을 해야 하고 그 던적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도망가 버린다. 어미와 언니들은 다들 흩어지고 바리와 말 못하는 언니, 그리고 할미만 남는다. 고난의 행군이란 역사적 사례가 가족을 유대인마냥 떠돌게 한다. 여기서부터 삶은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시대의 벽에 부닥치기 시작한다. 고난의 역사가 바리의 삶을 옮아 맨다.

 도강(渡江)하여 제 삶을 찾더라도 삶은 더욱 잔인해진다. 할미가 저세상으로 가고 칠성이의 육체가 땅으로 스민다. 독자가 가장 아파할 부분이다. 바리의 어린 나이가 이러한 아픔을 배가시킨다. 바리는 김기림의 시처럼 공주처럼 지쳐서 허우적댈 뿐이다.

 그래도 바리의 삶엔 구원이 등장한다. 미꾸리 아저씨 덕이다. 요즘 잔인한 이야기를 많이 봐서 그 또한 바리의 삶을 더 비루하게 할까 저어했었다. 허나 그는 속 깊은 사내였고 바리를 자식처럼 아꼈다. 나 또한 내 자랑 같은 친구의 자식이라면 저보다 더 따스히 대하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가끔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며 책을 읽는다.

 그 후의 삶은 꿈과 현실이 다 성기다. 배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처참하지만 견딜만해 보인다. 견딜 수밖에 없기에 제 자신과 현실을 분리해 버린 바리 때문일 테다. 샹 언니가 강간을 당하는 것도 누군가가 배 밖으로 내버려질 때도 그 모습은 비참하기 보단 그럴 수도 있단 생각이 들게 한다. 독자와 사건의 거리를 멀게 하여 잔인한 삶을 그저 하나의 다른 이야기로 비치게 한 의도 덕분일 테다. 한국 고유의 구비문학과 샤머니즘이 섞인 밀항 장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황석영의 애도로도 보인다. 초경을 늦게 치르고 가슴도 빈약한 바리이지만 짐승 같은 손에 유린당하지 않은 건 차마 그렇게까지 바리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황석영의 보살핌이다. 리얼리즘 추구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설핏 드러난다.

 그 후에도 바리의 삶은 쉽지 않다. 행복하다가 불행하고 웃다가도 눈물짓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삶에 이처럼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드물 테다. 물론 소설이기에 가능했을 테지만.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큰 따옴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즉 이 대화가 소설 속 화자가 발화한 건지 마음으로 말한 건지 바리가 상상한 건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책은 현실에 빗댄 또 하나의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현실과 접점이 많은 또 하나의 신화다. 황구라는 바리데기의 신화를 차용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화가 뻔한 아포리즘으로 맺어지듯 황석영 또한 삶의 희망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그 진부함이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문을 보다 훔멜에 관한 글을 발견했다.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 얼마 전 구입한 샨도스 30주념 기념 앨범에 들어가 있던 작곡가다. 그의 이름은 낯설었기에 나를 잡아끌지 못했다. 그저 이런 작곡가가 있거니 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헌데 훔멜은 살아 있을 당시 베토벤의 인기를 능가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로도 인기도 많았다. 헌데 그의 인지도는 베토벤의 한 계단 밑은커녕 음악가라고 불리기도 마뜩찮을 정도다. 물론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할 테다. 우선 나와 내 주위 사람들부터 한 때 찬란히 빛나던 시절보다 그 황홀함이 바래진듯하니.  

 



 

 

 

 

 

 

 

 

 그의 음악은 친절하다. 베토벤처럼 준엄하게 들어라 강요하거나 모차르트처럼 부지불식간에 마음을 앗아가지도 않는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눅인 채 들으면 어느 샌가 사뿐히 얹힌다. 마치 뉴에이지 아티스트의 곡을 듣는 것처럼 미끌거린다. 청신(淸新)한 음의 향연이 자연스레 귀를 이끈다. 마음이 간다.

 확실히 모차르트나 베토벤과는 다르다. 줄듯 말듯 사람을 녹이는 피아노 선율은 피아니스트가 손가락을 제법 바삐 움직이게 한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3악장의 독주를 떠오르게 하다가 쇼팽의 흐느적대는 감성과도 비슷한 울림을 준다. 2악장 같은 3악장이 곡의 낭만성을 미만하게 하고 따로 제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작곡가가 아닌 청중을 위한 음악이다. 협주곡에도 청량한 음표가 만연하니 하나의 독주곡처럼 어울림이 지극히 일방향적인 매력이 있다. 새롭다. 다만 피아니스트가 고생할 듯하다.

 이런 곡이 왜 널리 회자(膾炙)되지 못하고 더 많이 연주되지 못하나? 고전 음악가들이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건 음악의 진보를 믿고 음악 자체가 국가의 뽐냄을 위해 쓰였던 19 세기경이었다. 제국주의가 만연하면서 예술인조차 종족과 자문화의 우월성을 위한 도구로 쓰이곤 했다.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자랑이 되고 괴테는 독일의, 볼테르는 프랑스의 자랑이 되었다. 누군가가 대중의 극찬을 받고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예술가는 자연스레 잊혀져갔다. 자본주의가 종종 언급하는 자연 독점이 기괴한 형태로 예술 세계에서도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슈만과 니체가 미치고 말러가 죽음을 걱정하여 스스로 사위어 간 건 시대의 폭력이 낳은 결과라 하겠다. 다만 이들은 이런 기구한 운명으로 제 분야의 위대한 아이콘이 되었다. 니체 또한 스스로가 약자의 원한(Ressentiment)을 언급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철학사(哲學史)의 강자가 되었다. 허나 나머지 패자 혹은 약자들은 제 존재증명도 못한 채 훔멜처럼 사라졌다. 이들은 아마 후세의 박절함에 대해 원한을 지닐지 모른다. 기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이 사회 전체가 약자의 원한이 모순적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거짓 ‘이데아’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샨도스의 30주념 기념 앨범은 이러한 약자의 원한을 위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나또한 이 앨범이 없었다면 훔멜을 알지 못했을 거고 잗다라한 작곡가들의 음악을 무시했을 테다. 기실 모두가 약자다. 알라딘 내에서도 강자는 몇몇이고 다들 ‘인정투쟁’을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가 공들여 쓴 좋은 글 한편이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널리 읽혀지지 않는 건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물론 알라딘의 강자들은 자기반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덕에 지극히 옳은 강자다. 허나 사회는 다르다. 소수의 강자들이 사회의 명망을 오롯이 가져가는 현실이다. 좀 더 낮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김혜리 기자와의 씨네21 인터뷰에서 했던 “모차르트의 가장 나쁜 곡조차 살리에리의 명곡보다 훌륭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은 그래서 거북하고 그 엘리트 의식의 조야(粗野)함이 역겹다. 범인(凡人)의 최고 작품이 천재의 그저 그런 작품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논박하고 민주주의를 믿는 이라면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 음악에 대한 달콤한 연서(戀書)가 지극히 온당치 못한 기질 때문에 약자의 원한으로 점철(點綴)되었다. 글로써 나를 벼릴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12-0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을 읽으니, 어쩌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등장하는 사상가들이 이들의 철학을 자신의 이념의 정당성을 위해 편리하게 끌어들여 해석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서양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통해 쌓은 것들로 동양에 상대적으로 물질적(또는 전쟁능력의)우위(이는 제 편의로 나눈 것입니다. 이성적인 것, 혹은 낭만주의라 부를 수 있는 비이성적인것들까지도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통해 통제를 바탕으로 한 팽창)의 근거가 위와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어쩌면 플라톤이 국가의 한 이상향의 모습을 스파르타에서 찾았다는 점을 보면 그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화 아닌 끄적임, 그리고 부족한 제 사유, 아직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문제가 더 중요한 저이기에 얘기가 좀 멀리 가려 하네요.^^

조금 성급히 매듭짓자면 낮은 소리, 소수의 의견, 대표성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그 "중심" 이나 "대표한다" 는 것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 되겠네요.

그리고..훔멜..혹시 들어보지 않으셨다면 첼로 소나타 한 번 들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작품번호는 104번, 지리 바르타(Jiri Barta)의 첼로연주입니다.


바밤바 2009-12-08 21:55   좋아요 0 | URL
훔멜이 첼로 소나타도 만들었군요~ 피아노 음악에 집중한 줄 알았는데 다양한 음악을 섭렵했었나 보네요^^
저는 그냥 제가 아는 단편적 철학 지식을 제가 보는 현실에 맞춰 해석하는 걸 좋아해서 글이 단정치 못했네요~ 기독교부터 해서 플라톤의 사상을 많이 차용하긴 했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정녕 없나 봅니다~ㅎ
 
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무엇보다 편집이 좋다. 시구(詩句)가 소제목 위에 달려있다. 시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간다. 다가옴이 시(詩)처럼 근사하다.

 애도(哀悼)에 관한 이야기다. 애도란 프레임으로 모든 이야기가 파헤쳐지고 분석된다. 자신의 이야기가 고갱이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의 골조를 이룬다. 다만 문학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은 이 모든 사례가 다소 와 닿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상관없다. 꾸준히 ‘좋은 이별’을 해야만 상처가 덧나지 않고 오롯이 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을 한다. 레시피로 나오는 자잘한 이야기는 다소 사족의 느낌이 강하다. 애도에 관한 좋은 사례로도 충분히 마음을 보살필 수 있기에 그렇다.

 스스로에게 이 책을 적용시켜 보았다. 나또한 책 속 등장인물처럼 스스로를 억제한 적이 있었다. 아비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죽음도 쿨하게 맞이하기 위해, 아니 눈물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거라 여기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보냄을 납득하려 애쓰고 다른 이들을 다독였다. 나를 다독이는 손길은 사치라 여기고 내 마음을 애써 눅였다. 이런 것들이 책에 의하면 내게 상처가 됐을 테다. 물론 이런 억압기제가 나를 어떻게 눌렀는지는 모른다. 헌데 이 책을 읽고 지극히 공감했기에 내게도 ‘좋은 이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작가의 전작 ‘천개의 공감’이 내게 무수한 공감으로 다가왔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 이번 책은 전작과 다르게 커다란 하나의 공감으로 다가온다. 마음에 울림을 주고 좀 더 스스로를 드러내며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준다. 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리비도’는 다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많은 사례가 저자의 치밀한 분석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고백’의 글이 범람했으면 한다. 나를 돌아봄이 가장 중요하단 걸 이 책은 기나긴 말로 사근사근 속삭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12-0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호하지 않는 작가와 장르인데 당신의 리뷰는 솔깃하네요 ^^
꾸준히 리뷰가 올라오니 생각의 호흡을 같이 하는듯해요.

바밤바 2009-12-04 13:25   좋아요 0 | URL
ㅎ 하루에 책 한권씩 읽으려다 보니 일상이 너무 번잡해지는 듯 하네요~
다소 느적느적 살아야겠음~^^;;

Forgettable. 2009-12-0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어렸을 때 인상적으로 읽어서 좋은 작가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천개의 공감]은 그저 그렇더라구요 ㅎㅎ
요즘 리뷰 정말 열심히 쓰시는군용 ^^ 전 책 권태기에요 ㅠㅠ

바밤바 2009-12-06 19:57   좋아요 0 | URL
오~ 뽀님 오랜만~ ㅎ 저도 책 권태기로 빠지려공~ 책을 너무 보면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읊조릴 때가 많아서리~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