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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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의 세상은 달랐다. 그는 말로 회자되기만 하던 부분을 다룬다. 닿지 못할 세상을 글로 증명하고 몽환적으로 풀어낸다. 이 몽환 속에서 ‘바리’는 치유의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난다. 샤먼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살필 줄 아는 바리이기에 이 ‘잔혹동화’가 생살 찢기듯 아프지는 않다.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고 내 누이 같은 바리에 대한 연민으로 현실이 사치로 여겨질 따름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회상 장면마냥 정겹고 따스하다. 잗다란 다툼이 곰비임비 일어나지만 그걸 다 넉넉히 안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 신발을 두고 다투는 언니들은 그득 각자의 절박함을 감안하더라도 흐뭇하다. 70년 대 한국이 연상됐다. 물론 군사 독재와 같은 시대적 문제는 다 훑어내고 전원의 아름다움만 남은 70년 대 말이다. 바리네 가족 또한 북한의 모순적 실상을 걷어 낸 그저 단란한 모둠체일 뿐이다.

 삼촌이 어딘가로 사라진 후 그들의 전원은 지옥이 된다. 아비는 초주검이 되도록 일을 해야 하고 그 던적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도망가 버린다. 어미와 언니들은 다들 흩어지고 바리와 말 못하는 언니, 그리고 할미만 남는다. 고난의 행군이란 역사적 사례가 가족을 유대인마냥 떠돌게 한다. 여기서부터 삶은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시대의 벽에 부닥치기 시작한다. 고난의 역사가 바리의 삶을 옮아 맨다.

 도강(渡江)하여 제 삶을 찾더라도 삶은 더욱 잔인해진다. 할미가 저세상으로 가고 칠성이의 육체가 땅으로 스민다. 독자가 가장 아파할 부분이다. 바리의 어린 나이가 이러한 아픔을 배가시킨다. 바리는 김기림의 시처럼 공주처럼 지쳐서 허우적댈 뿐이다.

 그래도 바리의 삶엔 구원이 등장한다. 미꾸리 아저씨 덕이다. 요즘 잔인한 이야기를 많이 봐서 그 또한 바리의 삶을 더 비루하게 할까 저어했었다. 허나 그는 속 깊은 사내였고 바리를 자식처럼 아꼈다. 나 또한 내 자랑 같은 친구의 자식이라면 저보다 더 따스히 대하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가끔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며 책을 읽는다.

 그 후의 삶은 꿈과 현실이 다 성기다. 배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처참하지만 견딜만해 보인다. 견딜 수밖에 없기에 제 자신과 현실을 분리해 버린 바리 때문일 테다. 샹 언니가 강간을 당하는 것도 누군가가 배 밖으로 내버려질 때도 그 모습은 비참하기 보단 그럴 수도 있단 생각이 들게 한다. 독자와 사건의 거리를 멀게 하여 잔인한 삶을 그저 하나의 다른 이야기로 비치게 한 의도 덕분일 테다. 한국 고유의 구비문학과 샤머니즘이 섞인 밀항 장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황석영의 애도로도 보인다. 초경을 늦게 치르고 가슴도 빈약한 바리이지만 짐승 같은 손에 유린당하지 않은 건 차마 그렇게까지 바리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황석영의 보살핌이다. 리얼리즘 추구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설핏 드러난다.

 그 후에도 바리의 삶은 쉽지 않다. 행복하다가 불행하고 웃다가도 눈물짓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삶에 이처럼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드물 테다. 물론 소설이기에 가능했을 테지만.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큰 따옴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즉 이 대화가 소설 속 화자가 발화한 건지 마음으로 말한 건지 바리가 상상한 건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책은 현실에 빗댄 또 하나의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현실과 접점이 많은 또 하나의 신화다. 황구라는 바리데기의 신화를 차용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화가 뻔한 아포리즘으로 맺어지듯 황석영 또한 삶의 희망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그 진부함이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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