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여섯 달 전에 읽었고 하나는 어제 읽었다. 둘의 결은 비슷하다. 그의 삶과 고민이 골자다.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고민하는 힘’은 직접적이고 ‘청춘을 읽는다’는 간접적이다. 존재론적 고민과 시대에 대한 고민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다. 두 책은 나스메 소세키의 이야기와 막스 베버의 책을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진행된다. 일본의 국민 작가라지만 국내엔 익숙지 않은 소세키이기에 그 닿음이 살갑진 않다. 그래도 지그시 받아들일 정도는 된다.

다만 그런 고민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 될 진 의문이다. ‘책 읽는 밤’에서 철학자 탁석산은 고민이 보이지 않는 책이라며 위 책을 폄하했다. 그의 고민거리라고 해봤자 재일 한국인이란 정체성과 자본주의, 일본의 미래에 대한 고민인데 유한계급(有閑階級)이란 신분과 도쿄대 교수라는 지위는 고민을 하나로 레저로 보이게 한다. 인문학이란 원래 어려워야 하고 인문학 자체의 힘은 그러한 힘듦을 뚫고 나오는데 있다. 이런 연성화된 책을 시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자기 계발서와도 비슷한 홍보문구 또한 책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편집도 독자에 대한 배려보단 아름다움에 치중한 듯하다. 표지 디자인은 좋지만 전체적 편집이 헐겁다. 책은 여백으로 가득하고 각주가 아닌 주석을 뒤 페이지에 몰아넣은 건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부분은 글을 생동감있게 하나 제 생각을 읊조린 부분에선 공감하기 힘들다. 제 작은 아버지가 서울의 매우 부자였단 사실을 기술하는 부분에서도 그의 관심은 서울의 척박한 환경에 쏠린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 문화적 심미안같은 것들은 불안이란 실존적 감정이 제거되고 난 뒤에야 스멀스멀 올라오는 여분의 것이다. 요즘은 불안은 하나의 좌표에 의지하여 이겨낼 만큼 단선적이지 않다. 고민의 결과물이 여윈 탓으로 이 책은 누군가의 불안을 다독일 진정성이 부족해 보인다. 제 청춘에 관한 과한 나르시시즘만 미만하다.

로쟈님이 책 후기에 서평을 써 주셨다. 고운 말로 이 책의 헐거운 부분을 메우려고 하나 텍스트 자체의 미진함을 극복하긴 힘들다. 오히려 로쟈님의 서평이 책 자체보다 좋다. 재일 한국인의 성장기는 ‘고’라는 영화를 통해 익히면 되고 실존에 관한 고민은 좀 더 진지한 책을 읽고 생각을 벼릴 일이다. 일상의 잗다란 근심도 해결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다소 외로된 고민은 야위어 보인다.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화의 역사 -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준만은 미시사로 거시사를 다루길 즐겨한다. 인물과 사상에서 연재하는 그의 글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전화로 보는 한국 문화 훔쳐보기다.

애초 전화는 귀중품이었다. 사교보다는 정말 필요에 의해 전화를 써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화는 필수품이 되었다. ‘소통의 과잉’ 시대가 일어난 거다. 책은 전화에 대한 언급을 하다 전화와 관련된 산업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책이 뒤로 갈수록 지루해지는 이유다. 맺는말의 그 올곧은 맺음이 있지 않았다면 독자는 이 책을 읽고 많이 공허했을 테다.

강준만은 한국에서 전화가 종교의 위치에 오른 이유로 일곱 가지를 제시한다. 첫 째, 고독으로부터의 탈출 욕구. 1990년대 들어 급속하게 붕괴되는 공동체를 경험하던 한국인들이다. 기술적 통신수단을 사용해서 타인과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확인해보길 갈망했던 문화적 배경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초고밀집사회에서 동질적 한국인들은 서로 부대끼며 사는 걸 사람 사는 것 같다고 말하며 늘 빨리빨리를 외칠 정도로 성격이 급하다. 휴대 전화가 없는 사람이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욕을 먹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 김택근은 “휴대전화는 인간에게서 자꾸 여백을 앗아간다. 전화를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어 있다. 내가 엿보듯 누군가도 날 훔쳐본다. 우리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고 말한다. 윤영민은 “문자메시지는 고독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지만 역으로 고독과 고립을 참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고독의 역설이다.

둘째 이유로 한국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는 것을 든다. 전석호는 “우리는 어느 사회계층이든 즐겁게 어울리고 휴식을 취한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폐쇄적 공간에 몰입하게 되고 전화에 탐닉하게 된다. 텔레비전 시청이 손꼽히는 여가 선용 방법으로 부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옥외 여건이 넉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은 스트레스 폭발을 개인적이기 보다 집단적인 표출로 드러내며 이것은 휴대폰이 정치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걸 시사한다. 한국정치는 카타르시스 기능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 헌데 이런 기능은 일시적이고 기만적이기에 다른 스트레스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가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라는 건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사이클을 형성한다는 방증이다.

세 번째 이유로 공사구분의식이 희박한 한국 문화를 꼽는다. 피에르 레비는 ‘디지털 시대의 가상 현실’에서 ‘뫼비우스 효과’를 말했다. “이런 뫼비우스 효과는 여러 영역 속에서 변화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과의 관계, 주관과 객관의 관계, 지도와 영토의 관계,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계는 더 이상 분명치 않다. 장소와 시간이 뒤섞인다. 분명한 경계가 없어지고 공과 사의 개념이 사라진다.” 한국은 가상화를 들먹일 것도 없이 문화적으로 공사구분의식이 희박하다. 핸드폰 번호는 사적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에선 휴대 전화가 울리면 즉각 받는 것이 에티켓이 되었다. 휴대전화 소리는 새로운 공공 음악이 됐다. 이런 배경에는 한 세대 이상 지속된 식민 통치의 경험, 한국 전쟁, 한 세대에 걸친 강압적 권위주의 통치 때문에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된 이유가 크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선 집단주의적 가치에 충실해야 했지만 자신과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각자도생하거나 개인적 연고에 의존하는 수밖엔 없었다. 결국 한국에선 공적으로 발표된 것도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개인화를 심화시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늘 집단화와 연결돼 있다.

네 번째 이유는 한국이 인맥사회라는 거다. 한국인은 인맥을 정당한 능력으로 간주한다. 어떤 일을 해결할 때 학연과 지연, 혈연을 찾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허나 부탁한 일이 닥쳐서 전화하면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 일상적으로 전화정치를 해둬야 한다. 연고가 없으면 꾸준하게 전화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 안부전화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대단한 홍보 자산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에서 유명 연예인과 자연스레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란 걸 과시하는 게 고정메뉴로 자리 잡았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전문브로커들도 전화 통화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다.

다섯 번째 이유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초강력 1극 구조 사회라는 것을 든다. 그렇기에 중심이나 상하계층 구조가 없는 전화 커뮤니케이션을 한풀이 하듯 저항적으로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가치 패러독스 현상이다. 이는 평소 삶에 녹아있는 가치와 정반대되는 가치를 의도적 활동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역설이다. 미국은 평소 개인주의적으로 살기에 공동체주의에 피곤함을 느낄 정도로 치일 일이 없다. 반면 한국은 공동체에 치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집단주의적이기에 공동체주의에 대해 피곤하게 생각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그걸 피하게 되는 것이다. 전화는 본질적으로 초강력 1극 구조에 저항하는 미디어다. 티비나 라디오는 중심이나 상하 계층적 구조가 있다. 인터넷마저 포털이란 중심이 있다. 전화는 1대1 관계일 뿐이므로 한국형 평등주의에 잘 어울린다. 또 전화는 위험부담 없는 안전한 만남을 증가시켰다. 헌데 서열이나 계급이 동등하거나 낮은 사람과의 약속은 높은 사람의 전화에 의해 취소되거나 변경도리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만들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항상 취소될 수 있는 상황,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결국 한국처럼 원래 사전 약속문화가 약하고 위계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약속이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휴대전화는 기존 권력구조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면이 있다. 휴대전화가 사실상 노동 감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섯 번째 이유는 한국의 ‘구별짓기’문화다. 전화는 1990년대 이전까지 특권이었고 1990년대부터 오락이었으며, 2000년대 들어선 종교가 되었다. 휴대전화 교체주기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게 이것을 잘 드러낸다. 한국은 여전히 초고속 압축 성장을 겪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뒤진 걸 정보화시대에 만회하겠다는 의지로 풍만하다. 디지털 경제는 속도경영을 요구한다. 새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빨리 내버리는 정보처리 방식이 ‘냄비근성’과 잘 맞아 떨어진다. 얼리 어답터 층이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나라로 한국이 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달리보면 구습타파에 능하고 새로운 도전을 사랑하는 진취적 민족이라고 긍정평가할 수도 있겠다.

일곱 번째 이유는 휴대전화가 국민적 자존심과 국민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적 배경이다.

강준만의 책을 정리하는 형태로 서평을 써봤다. 정리하는 일이 상상하는 일만큼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올 곧으려 노력하는 강준만의 노력이 근사해 보인다. 이 책은 사소한 사물 하나에도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는 걸 가르쳐 준다. 휴대폰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진정 좋은 책이라면 이 책은 좋은 책의 한 갈래에 속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0-02-0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꽤 좋은 정보인데요. 제가 휴대전화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이 도움될 것 같아요. 이렇게 정리를 잘 하시다니... 이것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것,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것, 글 써 본 사람이라면 다 압니다. 덕분에 잘 읽고 갑니다. 저도 구입해야겠어요. 인용할 게 많아요.

바밤바 2010-02-06 17:14   좋아요 0 | URL
와우. 기대할께요.^^ 강준만은 요즘 자기 이야기보단 남의 이야기를 자주해서 그만의 특징이 다소 바랜듯 합니다. 화이팅!!ㅎ
 


어릴 때 외가는 시골에 있었다. 방은 미닫이문으로 구분되었고 창호지가 바람막이를 했다. 가끔 외할머니가 창호지를 풀에 먹여 문에 바를 땐 신기해 보였다. 얇디얇은 종이가 추위를 막아주는 원리가 와 닿지 않아서였다. 창호지의 방한 기능은 겨울에 명징했다. 뜨거운 구들장 덕에 더울 때면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온도를 조절하곤 했다. 사촌 형들도 항상 북적였기에 그런 바람은 차갑기 보단 시원했다.

부엌은 외따로 있었다. 겨울이면 나무로 된 마루가 얼음장처럼 시렸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하던 외숙모들이 지금도 선하다.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얼음을 깨어 손을 씻던 그런 수줍은 날이 있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불을 때던 아궁이었다. 솔잎을 넣으면 불은 삽시간에 옮겨 붙곤 했다. 불이 주는 따스함과 주홍빛 황홀함은 시간을 잊게 했다. 종종 큰 나무 조각과 불쏘시개 몇 개로 불을 지피곤 했다. 나무를 많이 넣으면 방이 너무 뜨겁다며 손자를 나무라던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는 창고를 ‘고방’이라고 했고 종종 일본어가 섞갈린 우리말을 하곤 했다. 그런 외할머니의 온건한 보살핌이 좋았다.

네 살 무렵, 외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밭을 메러가고 외할아버지는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19번 버스 종점에 가면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지척이지만 당시엔 꽤나 멀었던 그곳에 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쭈그리고 앉아 땅에 그림을 그리며 울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고서 시린 손을 꽉 쥐었다. 버스는 오갔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오기보단 서러움에 싸여 시간을 보냈다. 헌데 외할머니가 내 뒤에 나타나더니 한창을 찾았다며 그제 서야 마음이 놓인 듯한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셨다. 왜 이 먼데까지 나와 있냐며 어여 집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엄마 올 때 까진 외갓집에 가지 않을 거라며 앙탈을 부렸다. 외할머니는 사탕을 사주겠다며 손자의 어리광을 다독였다. 그리고선 나를 엎고 집으로 갔다. 집에 있으면 엄마가 올 거라 하시며 채근하는 손자의 등을 쓰다듬으셨다.

멀리 가면 나쁜 사람이 잡아간다는 외할미의 말이 무서웠는지 나는 집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얼마 후 엄마가 한복을 입은 채 택시를 타고 내렸다. 난 엄마를 향해 울며 달려갔다. 말 그대로 길 잃은 아이가 서럽게 울듯 난 엄마를 탓하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내게 조금 엄하게 대해왔던 엄마였지만 그때만큼은 따스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선 아마 새근새근 잠이 들었을 테다. 엄마 품에 안겨, 하루 종일 서성이던 버스 정류소를 잊어버린 채.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른 건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26일이 외할머니 제사라며 내려올 수 있으면 시간을 내보라 하셨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편한 대로 하라는 말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의 관심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내 미욱함 때문일 테다.

내가 대학을 갈 때 쯤 외갓집은 기와집에서 신식 양옥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그때는 그런 치장과 함께 옛 기억조차 바래 질 거란 생각은 못했다. 그저 추억의 공간이 하나 사라지는구나 하는 덤덤한 마음만 가득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할 것 같던 사람과 공간들이 시나브로 옅어진 지금에서야 과거의 흔적을 떠올린다. 따뜻하던 아궁이도 사라지고, 닭이 뛰어놀던 그 널찍한 마당도 콘크리트로 덮였다. 북적거리던 친척들도 재산 다툼이나 각자의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느라 외따로 흩어졌다.

지아비와 어미의 부재를 절감하는 울 엄마의 공허한 마음이 겨울처럼 시릴 요즘이다. 나 또한 애틋한 그리움에 마음이 아려오는데 엄마는 갑절로 옛사람과 추억을 고파할 테다. 죽은 외할미의 넋을 달래고 엄마의 지친 어깨에 힘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이번 주엔 시간을 내서 진주를 가야겠다. 엄마를 보둠어야겠다. 그때 외할미의 등이 나를 보둠었듯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12-2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외가집도 초가였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폐가가 되었어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돌아가셨는데, 집을 비운 사이에 시골빈집 전문털이가 있는지.. 우리 생각엔 값이 될것 같지도 않은 소여물통이며, 한지발라진 집 문틀이며(참 신기한거 같아요 종이한장 발랐는데 안춥다는게..) 하여간 벽만 빼고 다 뜯어가버렸어요.. 추억도 남의 추억 뜯어다가 팔고, 돈주고 사서 지 아파트 장식하는데 쓰는 세상이예요 --

바밤바 2009-12-23 19:01   좋아요 0 | URL
많이 각박해졌네요~ 이제는 벽도 뜯어가는 사람 나올 듯 .. ㅠㅠ

비로그인 2009-12-2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어릴적 놀던 마당과 봄볕에 앉아 있던 마루가 생각나곤 합니다. 오랜만에 들른 그곳은 제 기억속 크기보다 작아져 있어 놀랐는데 이젠 다시 볼 수 없어 아쉽네요.

후 아궁이. 불 너무 쬐면 밤에 오줌싼다고 하시던 기억도 납니다. ^^

바밤바 2009-12-23 19:02   좋아요 0 | URL
아궁이 참 좋았는데~ 그립고 그리워 그립네요~ ㅎ
 
레이첼 결혼하다 - Rachel Getting Marrie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카메라는 불친절하다. 홈비디오를 찍듯 등장인물을 훑는다.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킴’이 보인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다. 끽연(喫煙)을 하고 육두문자를 남발한다.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지만 쉽게 다가설 순 없다. 타이틀에 나오는 레이첼은 그녀의 언니다. 이야기는 이 결혼식에서 발화점을 찾는다.

영화는 사소해 보이는 말다툼에서 가족의 상처를 드러낸다. 약물 중독으로 인생을 낭비하였던 킴이지만 가족의 지나친 관심 혹은 경계가 불편하다. 묘한 긴장의 분위기엔 킴의 동생 에단이 흐르고 있다. 에단은 킴이 약물중독 상태에서 운전한 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에단은 킴에겐 끝까지 짊어지고 갈 ‘스티그마타’이고 가족에겐 그 이유가 어쨌든 상처다. 모두가 봉합해 놓았던 상처가 결혼식을 기화로 폭발한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생채기다. 애써 괜찮은 척 하려 했던 깊은 배려가 모질게 상처를 후벼 판다. 소설가 김형경의 말에 따르면 애도(哀悼)를 충실히 하지 못한 여분의 정서가 드러나는 거다.

결국 가족 모두는 혼란스러워 한다. 레이첼의 임신 사실이 터지려던 상처를 봉합하는 듯하지만 대증요법(對症療法)일 뿐이다. 결국 킴이 차사고가 나고 제 상처를 문신으로 드러내고서야 다들 마음을 눅인다. 클리셰해 보이기도 하다. 허나 조나단 드미 감독은 극(劇)적인 분위기보다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춘 연출로 진부함을 이겨낸다. 다들 조금은 아픈 채로 제 삶을 향해 떠난다. 이혼한 부모도 결혼한 언니도 그들 각자의 삶에서 햇살처럼 웃으며 최선을 다한다.

영화의 연출은 다소 산만하다. 루즈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 있으며 미용실에서의 우연과 같은 ‘약한고리’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사람의 동선을 따라가듯 찍은 카메라가 이런 무리수 또한 일상으로 비치게 한다. 그들 각자의 레이첼과 얽힌 추억 읊조림은 킴의 상처 드러내기로 이어지고, 장인과 사위의 그릇 빨리 씻기 경쟁은 에단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보여준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 상처가 있다는 이야기를 가벼운 카메라는 묵직하게 보여준다. 사뭇 느리게 진행되지만 각 이야기의 매듭이 적절히 묶여있다. 성긴 고리를 이어주는 단단함이다.

재미있는 건 우리와 다른 결혼 풍습이다. 이들은 결혼 전날 축가 연습을 하며 하나의 축제로 결혼을 맞이한다. 허겁지겁 결혼을 끝내고 일 하나를 치러냈다는 뿌듯함을 주는 우리와는 다르다. 그런 삶의 여유와 어울림이 부러웠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결합과 인도식 결혼식을 하는 그 문화적 다양성 또한 영화 자체의 메시지보다 더 근사한 울림을 준다. 쉽게 이혼을 하고 또 쉬이 사람을 만나는 그들의 풍습엔 ‘현실을 즐기라’라는 아포리즘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정(情)’이란 말로 모든 걸 견디고 보듬고 사는 우리네 모습도 아름답지만 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아마 그 근사한 결혼이 준 행복의 이미지 덕분일 테다.

킴의 아비도 빨리 불안을 잊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누렸으면 한다. 그는 한국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속 깊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그 속 깊음이 킴의 상처를 드러낼 기회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마음속으로만 울게 했다. 조금은 그 웅숭깊은 속을 고백으로 채워야 멀어진 그들 각자가 바투 이어질 듯하다.

죽음에 대한 문화가 다르고 삶을 즐기는 방식이 다른 한국인인 내가 이 영화를 즐겼다는 건 이 작품이 수작이라는 방증(傍證)이다. 스케치 같은 사소한 묘사로 실루엣을 그려내고 속마음을 보여주는 감독의 역량 덕이다. 내 마음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듯 아물었으면 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였지만 비워진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건 없어진 다리 한 쪽을 목발로 메우는 것 마냥 끝없는 허전함이다. 그 허전함을 이겨내는 게 삶이란 걸 언제가 읽은 니체의 책에서 본 듯하다. 그걸 견디는 이를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했다. 초인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초월적인 어떤 것을 동경하는 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 현실에서 낮은 포복을 하다 살갗이 벗겨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자다. 그러기에 위버멘쉬는 극복하는 자이지만 초월이 아닌 현실의 생생한 결을 안고 넘어가는 사람이다.

이런 위버멘쉬는 삶의 부정성을 단지 긍정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자가 아니다. 삶의 부정성을 받아들이면서, 삶에 긴장감을 끊임없이 부여하며 그 부정성을 극복해가는 자다. 그러기에 위버멘쉬는 어쩔 수 없이 삶을 주어진 것으로 체념하거나 만족 혹은 이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삶의 불안, 갈등, 고통을 회피하며 초월적 존재를 동경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위버멘쉬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찾아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습관의 껍질에서 벗어나 결과에서 과정으로, 상승에서 몰락으로의 변용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몰락은 삶을 파탄으로 이끄는 몰락이 아니라 이전의 습관적 자신에 대한 몰락이며 새로운 극복의 계기를 위한 몰락이 되어야 한다. 위버멘쉬의 극복은 인간 자신에 내재한 자유스러운 긍정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자유정신을 통해 가능하다.

말이 길었다. 이 영화는 위번멘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김형경의 에세이와 호흡을 같이 하는 영화다. 에단의 죽음, 부모의 이혼, 언니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긍정한다면 킴은 제 상처를 오롯이 극복할 테다. 허나 니체 또한 이런 모진 삶을 견디지 못해 광기에 사로잡혔기에 그러한 경지는 실로 어렵다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12-2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런..
아까 쓴 댓글에 "위버멘쉬" 로 다시 댓글 남기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또 보네요..^^

바밤바 2009-12-21 22:32   좋아요 0 | URL
헛^^;; 신기한데요~ ㅋ
 
아바타 - Avata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톰 행크스의 연기는 연기 같지 않다. 자연스럽다. 일상이다. 아카데미가 두 번이나 선택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실로 연기의 최고봉이다. 설경구의 연기는 매우 연극적이다. 최민식은 파토스를 극대화시킨 연기를 보여준다. 송강호는 자연스럽다. 밀양에서 보여준 송강호의 연기는 일상이다. 개인적으로 송강호를 한국 최고 배우로 꼽는 이유다.

이 영화 아바타의 그래픽은 자연스럽다. 어색하지 않다. 그래픽이라고 애써 인지하기 전엔 제 존재를 숨긴다. 게다가 3D로 보면 더더욱 실감난다. 아바타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다.

영화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두 개의 골조로 한다. 다만 자아 정체성의 혼란은 영화 제목만큼 뻔해 보인다. 오히려 제국주의의 침탈이란 주제가 더 명징하다. 나비 족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은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列强)과 닮아있다. 나비족의 문명을 우습게 알고 그들의 기술적 뒤쳐짐을 무시한다. 나비족을 신비롭게 그린 것에서 ‘오리엔탈리즘’과 비슷한 징후도 느껴진다. 다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말 그대로 환영이고 나비족의 가이아적 생태는 실존한다. 20세기 역사와 달리 영화 속 미개인들은 이러한 자연의 힘으로 침략을 이겨낸다.

왜 인간의 영혼을 가진 자가 나비족을 대표하는 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에서 백인이 흑인의 상징적 존재가 되는 그런 부조리함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상업 영화가 지는 약한 고리 정도로 봐줘야겠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예술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리한 상업 영화를 만들 뿐이다. ‘터미네이터’에서는 인류의 무한한 기술발전이 초래할 세계의 붕괴를, ‘타이타닉’에선 계급과 사회적 억압기제를 뛰어 넘는 위대한 사랑을 역설했다. 뻔한 주제를 뻔하지 않게 드러내는 그 치밀함이 제임스 카메론의 재능이다.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말 그대로 유토피아다. 즉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란 말이다.

헌데 이 영화에 대한 언론의 평이 재밌다. 동아일보에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상상력을 떠받치는 기술과 자본의 힘 앞에 할말을 잃는다.  ★★★★ (박유희) 

그저 현란한 비주얼만 추구했다. ★★☆ (정지욱)

조선일보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영상미를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볼 내용 자체가 새롭지는 않은, 제임스 캐머런의 보기 드문 범작.★★★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기술의 선구자, 또 한 번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황희연·영화칼럼니스트

한겨레 이지성 기자는 ‘억’소리 나는 볼거리.. ‘싼티’나는 아이디어 라고 말했다.

결국 일간지 기자들은 영화의 콘텐츠 부족을 개탄하는 의견이 다수다. 조선일보는 기자들을 동원하진 않았지만 특이하게 동아일보와 비슷한 평점을 매겼다. 유력 일간지 기자간의 카르텔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평점은 매체 자체의 영향력에 걸맞은 비판 의식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예의 그 콧대 높음이 역으로 천박하다.

이에 반해 씨네 21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을 내 놓는다.

★★★★★ 지상 최대의 쇼 김도훈

★★★★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김봉석

★★★★ 무섭다, 날개를 단 카메론 감독! 박평식

★★★★★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이용철

★★★★★ 귀신이 봐도 싼다 주성철

★★★★ 블록버스터 역사의 새 이정표 이동진

★★★★ 앞으로 수년간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를 말할 수 없다 황진미

찬사 일색이다. 새로운 황홀경을 체험한 듯하다. 평론가들이 별 다섯 개를 다 주는 작품은 2~3년에 한번 꼴이라고 보았을 때 이런 찬사는 보기 드물다. 이렇듯 영화 전문 잡지와 일간지와의 평가가 꽤 많이 차이 난다. 헌데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 평론가들이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보다 더 많이 봤을 테다. 물론 이동진 씨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긴 하지만 그는 조선일보 내에서도 영화 부문에선 에이스였다.

일간지 기자들의 평을 보면 아무래도 케인즈가 이야기한 ‘미인선발대회’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인선발대회 채점자들은 자신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게 아니라 남들이 높은 점수를 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점을 준다는 이론이다. 아바타라는 영화는 세계에 동시 개봉했다. 결국 외국 유력 언론의 평을 듣지 못했기에 일간지 기자들은 눈대중으로 평점을 매긴 듯하다. 영화를 많이 보는 이라면 온당 뻔한 줄거리를 탓할 줄 알았을 테다. 평범함을 비범하게 만드는 제임스 카메론의 장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다. 시오노 나나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면 이렇게 느꼈다지 않나. ‘천재란 결국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본다’라고.

결국 매체 영향력은 크지만 어설픈 전문기자의 아바타 흠집 내기는 실패한 듯하다. 매체 영향력은 작지만 전문적인 영화 평론가의 말이 대중과 일치한다. 간만에 대중과 전문가 평점이 일치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기자들은 그와 같이 호흡하지 못해 아쉽다. ‘다크 나이트’도 대중과 전문가, 나아가선 기자들의 평점이 거의 비슷했다. 아마 국내와 미국의 개봉 일자가 달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임이론에서처럼 리더가 있으면 팔로어처럼 따라 하기만 되는 게 문화 평이니 말이다. 간만에 제 자신이 리더가 된 일간지 기자들은 어설픈 헤아림으로 핀잔을 맞을 듯하다. 물론 이 글에선 씨네 21 기자들의 평이 옳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그 도그마가 사맛디 아니한다면 글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 참으로 대중은 알기 어렵고 제 자신을 알기는 더더욱 어려운 듯하다. 그래도 너무 정치적 바름을 추구하다보면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다. 간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기에 일간지들의 ‘딴지’가 거슬려 또 다른 딴지를 걸어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12-2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오늘 저녁 9시까지 매진되있어서 못봤어요.. 거참..

바밤바 2009-12-20 23:44   좋아요 0 | URL
3D로 보세요.. 신기함. 앞에서 잿가루가 날리고 사람이 불쑥 틔어나옴~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12-21 08:26   좋아요 0 | URL
네 24일날 밤에 볼듯해요~ 어찌나 3d만 빨리 매진이 되는지 --;;

바밤바 2009-12-21 15:25   좋아요 0 | URL
이야~ 클스마스이브에 보겠네요~ ㅋ 대단대단^^

마노아 2009-12-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반 극장에서 한 번 봤는데 3D로 다시 한 번 보려고 해요. 리뷰 인상깊게 읽었어요.^^

바밤바 2009-12-21 15:2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반가워요^^ ㅋ 저도 이승환 좋아라 하는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ㅎ

Arch 2009-12-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추천했어요. 바밤바님 눈썰미가 대단한데요^^
저도 제국주의와 정체성, 왜 나비족의 대표가 인간의 아바타인지 등등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좀 더 생각하면 재미있는 얘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전 3D로 보진 않았지만 영화 속 장면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너무 아름다워서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누구누구 빵꾸똥꾸들. 아, 이 말도 아깝다.^^

바밤바 2009-12-21 15:26   좋아요 0 | URL
오~ 누나 방가방가^^ㅋㅋㅋㅋ 역시 아름다운 영화였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