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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결혼하다 - Rachel Getting Marrie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카메라는 불친절하다. 홈비디오를 찍듯 등장인물을 훑는다.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킴’이 보인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다. 끽연(喫煙)을 하고 육두문자를 남발한다.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지만 쉽게 다가설 순 없다. 타이틀에 나오는 레이첼은 그녀의 언니다. 이야기는 이 결혼식에서 발화점을 찾는다.
영화는 사소해 보이는 말다툼에서 가족의 상처를 드러낸다. 약물 중독으로 인생을 낭비하였던 킴이지만 가족의 지나친 관심 혹은 경계가 불편하다. 묘한 긴장의 분위기엔 킴의 동생 에단이 흐르고 있다. 에단은 킴이 약물중독 상태에서 운전한 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에단은 킴에겐 끝까지 짊어지고 갈 ‘스티그마타’이고 가족에겐 그 이유가 어쨌든 상처다. 모두가 봉합해 놓았던 상처가 결혼식을 기화로 폭발한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생채기다. 애써 괜찮은 척 하려 했던 깊은 배려가 모질게 상처를 후벼 판다. 소설가 김형경의 말에 따르면 애도(哀悼)를 충실히 하지 못한 여분의 정서가 드러나는 거다.
결국 가족 모두는 혼란스러워 한다. 레이첼의 임신 사실이 터지려던 상처를 봉합하는 듯하지만 대증요법(對症療法)일 뿐이다. 결국 킴이 차사고가 나고 제 상처를 문신으로 드러내고서야 다들 마음을 눅인다. 클리셰해 보이기도 하다. 허나 조나단 드미 감독은 극(劇)적인 분위기보다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춘 연출로 진부함을 이겨낸다. 다들 조금은 아픈 채로 제 삶을 향해 떠난다. 이혼한 부모도 결혼한 언니도 그들 각자의 삶에서 햇살처럼 웃으며 최선을 다한다.
영화의 연출은 다소 산만하다. 루즈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 있으며 미용실에서의 우연과 같은 ‘약한고리’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사람의 동선을 따라가듯 찍은 카메라가 이런 무리수 또한 일상으로 비치게 한다. 그들 각자의 레이첼과 얽힌 추억 읊조림은 킴의 상처 드러내기로 이어지고, 장인과 사위의 그릇 빨리 씻기 경쟁은 에단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보여준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 상처가 있다는 이야기를 가벼운 카메라는 묵직하게 보여준다. 사뭇 느리게 진행되지만 각 이야기의 매듭이 적절히 묶여있다. 성긴 고리를 이어주는 단단함이다.
재미있는 건 우리와 다른 결혼 풍습이다. 이들은 결혼 전날 축가 연습을 하며 하나의 축제로 결혼을 맞이한다. 허겁지겁 결혼을 끝내고 일 하나를 치러냈다는 뿌듯함을 주는 우리와는 다르다. 그런 삶의 여유와 어울림이 부러웠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결합과 인도식 결혼식을 하는 그 문화적 다양성 또한 영화 자체의 메시지보다 더 근사한 울림을 준다. 쉽게 이혼을 하고 또 쉬이 사람을 만나는 그들의 풍습엔 ‘현실을 즐기라’라는 아포리즘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정(情)’이란 말로 모든 걸 견디고 보듬고 사는 우리네 모습도 아름답지만 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아마 그 근사한 결혼이 준 행복의 이미지 덕분일 테다.
킴의 아비도 빨리 불안을 잊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누렸으면 한다. 그는 한국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속 깊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그 속 깊음이 킴의 상처를 드러낼 기회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마음속으로만 울게 했다. 조금은 그 웅숭깊은 속을 고백으로 채워야 멀어진 그들 각자가 바투 이어질 듯하다.
죽음에 대한 문화가 다르고 삶을 즐기는 방식이 다른 한국인인 내가 이 영화를 즐겼다는 건 이 작품이 수작이라는 방증(傍證)이다. 스케치 같은 사소한 묘사로 실루엣을 그려내고 속마음을 보여주는 감독의 역량 덕이다. 내 마음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듯 아물었으면 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였지만 비워진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건 없어진 다리 한 쪽을 목발로 메우는 것 마냥 끝없는 허전함이다. 그 허전함을 이겨내는 게 삶이란 걸 언제가 읽은 니체의 책에서 본 듯하다. 그걸 견디는 이를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했다. 초인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초월적인 어떤 것을 동경하는 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 현실에서 낮은 포복을 하다 살갗이 벗겨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자다. 그러기에 위버멘쉬는 극복하는 자이지만 초월이 아닌 현실의 생생한 결을 안고 넘어가는 사람이다.
이런 위버멘쉬는 삶의 부정성을 단지 긍정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자가 아니다. 삶의 부정성을 받아들이면서, 삶에 긴장감을 끊임없이 부여하며 그 부정성을 극복해가는 자다. 그러기에 위버멘쉬는 어쩔 수 없이 삶을 주어진 것으로 체념하거나 만족 혹은 이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삶의 불안, 갈등, 고통을 회피하며 초월적 존재를 동경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위버멘쉬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찾아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습관의 껍질에서 벗어나 결과에서 과정으로, 상승에서 몰락으로의 변용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몰락은 삶을 파탄으로 이끄는 몰락이 아니라 이전의 습관적 자신에 대한 몰락이며 새로운 극복의 계기를 위한 몰락이 되어야 한다. 위버멘쉬의 극복은 인간 자신에 내재한 자유스러운 긍정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자유정신을 통해 가능하다.
말이 길었다. 이 영화는 위번멘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김형경의 에세이와 호흡을 같이 하는 영화다. 에단의 죽음, 부모의 이혼, 언니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긍정한다면 킴은 제 상처를 오롯이 극복할 테다. 허나 니체 또한 이런 모진 삶을 견디지 못해 광기에 사로잡혔기에 그러한 경지는 실로 어렵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