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외가는 시골에 있었다. 방은 미닫이문으로 구분되었고 창호지가 바람막이를 했다. 가끔 외할머니가 창호지를 풀에 먹여 문에 바를 땐 신기해 보였다. 얇디얇은 종이가 추위를 막아주는 원리가 와 닿지 않아서였다. 창호지의 방한 기능은 겨울에 명징했다. 뜨거운 구들장 덕에 더울 때면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온도를 조절하곤 했다. 사촌 형들도 항상 북적였기에 그런 바람은 차갑기 보단 시원했다.
부엌은 외따로 있었다. 겨울이면 나무로 된 마루가 얼음장처럼 시렸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하던 외숙모들이 지금도 선하다.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얼음을 깨어 손을 씻던 그런 수줍은 날이 있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불을 때던 아궁이었다. 솔잎을 넣으면 불은 삽시간에 옮겨 붙곤 했다. 불이 주는 따스함과 주홍빛 황홀함은 시간을 잊게 했다. 종종 큰 나무 조각과 불쏘시개 몇 개로 불을 지피곤 했다. 나무를 많이 넣으면 방이 너무 뜨겁다며 손자를 나무라던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는 창고를 ‘고방’이라고 했고 종종 일본어가 섞갈린 우리말을 하곤 했다. 그런 외할머니의 온건한 보살핌이 좋았다.
네 살 무렵, 외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밭을 메러가고 외할아버지는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19번 버스 종점에 가면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지척이지만 당시엔 꽤나 멀었던 그곳에 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쭈그리고 앉아 땅에 그림을 그리며 울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고서 시린 손을 꽉 쥐었다. 버스는 오갔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오기보단 서러움에 싸여 시간을 보냈다. 헌데 외할머니가 내 뒤에 나타나더니 한창을 찾았다며 그제 서야 마음이 놓인 듯한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셨다. 왜 이 먼데까지 나와 있냐며 어여 집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엄마 올 때 까진 외갓집에 가지 않을 거라며 앙탈을 부렸다. 외할머니는 사탕을 사주겠다며 손자의 어리광을 다독였다. 그리고선 나를 엎고 집으로 갔다. 집에 있으면 엄마가 올 거라 하시며 채근하는 손자의 등을 쓰다듬으셨다.
멀리 가면 나쁜 사람이 잡아간다는 외할미의 말이 무서웠는지 나는 집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얼마 후 엄마가 한복을 입은 채 택시를 타고 내렸다. 난 엄마를 향해 울며 달려갔다. 말 그대로 길 잃은 아이가 서럽게 울듯 난 엄마를 탓하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내게 조금 엄하게 대해왔던 엄마였지만 그때만큼은 따스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선 아마 새근새근 잠이 들었을 테다. 엄마 품에 안겨, 하루 종일 서성이던 버스 정류소를 잊어버린 채.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른 건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26일이 외할머니 제사라며 내려올 수 있으면 시간을 내보라 하셨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편한 대로 하라는 말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의 관심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내 미욱함 때문일 테다.
내가 대학을 갈 때 쯤 외갓집은 기와집에서 신식 양옥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그때는 그런 치장과 함께 옛 기억조차 바래 질 거란 생각은 못했다. 그저 추억의 공간이 하나 사라지는구나 하는 덤덤한 마음만 가득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할 것 같던 사람과 공간들이 시나브로 옅어진 지금에서야 과거의 흔적을 떠올린다. 따뜻하던 아궁이도 사라지고, 닭이 뛰어놀던 그 널찍한 마당도 콘크리트로 덮였다. 북적거리던 친척들도 재산 다툼이나 각자의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느라 외따로 흩어졌다.
지아비와 어미의 부재를 절감하는 울 엄마의 공허한 마음이 겨울처럼 시릴 요즘이다. 나 또한 애틋한 그리움에 마음이 아려오는데 엄마는 갑절로 옛사람과 추억을 고파할 테다. 죽은 외할미의 넋을 달래고 엄마의 지친 어깨에 힘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이번 주엔 시간을 내서 진주를 가야겠다. 엄마를 보둠어야겠다. 그때 외할미의 등이 나를 보둠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