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읽은 지경사 문고 <꿈꾸는 발레리나>가 발레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것 같네요. 만화가 김숙씨가 그린 삽화도 참 예뻤는데..
안나 파블로바 이야기였구요. 그 얇은 책 한권으로 미하엘 포킨이며, 니진스키며, 디아길레프 등의 이름에 익숙해지게 되었지요.

실제로 안나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지 궁금했는데 (안나 파블로바의 빈사의 백조를 보는 것이 꿈이었어요. ^^;;)  사진을 보니.. 상상했던 모습과는 다르지만 정말 멋진 모습이네요.  오랜 궁금증이 풀려서 시원-합니다.  

 


 

 

 

 

 

파블로바와 니진스키

 

 


왼쪽 사진 : 니진스키와 파블로바

 

 

 
안나 파블로바 Anna Pavlova

 

무대 위에서 우아한 "빈사의 백조"를 춤추는 위대한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 

(1881.1.3-1931.1.23)!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따뜻한 피가 통하는 활기찬 여자였다.  안나 파블로바처럼 포카를 못하는 사람은 이미 없을 것이다.  좋은 카드가 오면 콧노래를 부르거나 쓸데없이 유쾌한 말을 지껄이든지 아니면 애써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상대는 금방 눈치 차리게 되고, 반대로 나쁜 카드가 오면 마치 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안나 파블로바라고 하면 발레계의 제1인자로 전설적인 명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아직도 발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나 발레에 전혀 흥미없는 사람들 에게 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파블로바는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찬란히 빛나는 영원한 우상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활기있고 따뜻한 마음의 여성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의 비오는 필름으로 밖에 파블로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아주 먼 과거의 존재로만 보일 것이 당연하다.  그 멋지고 차가울 정도로 아름다운-깊은 조각의 얼굴.  그리고 슬픔을 머금은 크고 검은 눈동자.

 

 실제 무대 위의 그녀는 너무도 섬세하여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환상적이며 이 땅 위의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빈사의 백조".  어느 때는 꿈속의 사람같은 여인.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왕.  새 하얗게 화장하고 검은 머리를 꽉 졸라맨 순백의 발레 의상을 입은 그녀는 틀림없는 환상의 세계에서 온 천사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발레 팬들이 알고 있는 파블로바는 이런 존재였다.  그러나 57년 이란 긴 세월동안 대 예술가들의 매니저를 해온 나로서는 지난날은 물론, 앞으로는 그녀와 같이 발랄한 생명력을 지닌 사람과 만난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녀와 처음 만날 때의 일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한다.  그때 나는 이미 흥행사로서 꽤 알려져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나는 안나 파블로바에게 반해 버려 뉴욕의 히포드롬 극장으로 매일 밤 관객의 제일 뒤쪽에 서서 그녀의 모습에 심취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친구가 나를 무대 뒤에서 그녀를 만나게 해주기로 되어 나는 첫 대면하는 그녀에게 영어와 러시아의 인사말을 할 양으로 연습하고 갔었는데 분장실에 첫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인사말이 잊혀져 마치 벙어리처럼 돼 버려 그녀가 내미는 손등에 키스하는 것이 겨우 였다.  그리고 저녁식사에 초대되었을 때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꿈까지 꾼 나의 우상을 현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발레의 여신 안나 파블로바는 대체 어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까? 나는 호화롭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요리를 우아하게 맛보는 그녀를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한 레스토랑은 뉴저지주에 있는 파리에이즈 유원지 속의 야외 카페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거기서 5센트짜리 스테이크와 프릿트(감자를 잘 게 썰어 기름에 튀긴 것),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겨우 내 앞의 요리에 손을 댈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는 의자를 뒤로 밀치면서 장난끼 있게 웃으며 '자! 좀 보시지 않겠어요?'했다.  파블로바의 '놀음'이란 유원지 내의 오락시설을 돌면서 걷는 것이었다.  요철 거울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깔깔대고 로라코스타에서는 꽥 소리를 지르고 마지막 댄스홀에서는 나를 끌어 당겼다.  그는 포크.트로트를 멋지게 췄었다.

 

 이것은 미국의 극작가 J.반 드루덴으로 하여금 '그림자처럼 보리밭을 지나가는 미풍' 이라고 까지 감탄케 하였던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여자의 화장기 없는 얼굴-. 반 드루덴이 물에서 헤엄치는 파블로바를 몰랐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을 것이다.  파블로바는 수영을 좋아했으나 물 속에선 놀랍게도 서툴렀다.  손발로 물장구를 칠 뿐 몸은 뜨지 않고 밸런스를 잡지 못했다.  더욱 심한 것은 다이빙을 할 때의 모습이다.  무대 위에서는 찬란한 빛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워 마치 공기처럼 가볍게 보이는 그녀가 다이빙 할 때면 큰 대자로 물 위에 부딪쳤다. 따라서 나는 그때마다 식은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안나 파블로바는 애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기를 좋아해 애기를 보면 쓰다듬고 안아주고 하였다.  이것은 그녀가 러시아에서 피난 온 30명 가까운 아이들을 위하여 파리에 집을 가진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또 발레단의 젊은 처녀들을 병아리를 품는 어미 닭처럼 애정을 붓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인 양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한 축제날이나 생일에는 틀림없이 좋은 선물을 하곤 하였다.  1923년에는 모국 러시아에 큰 기근이 생겼을 때 구제물품을 보내기도.  볼쇼이 극장이나 마린스키 극장의 무용수들이 파블로바 한테서 온 구제물품을 받으려고 한 줄로 서던 광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파블로바가 태어난 고향 러시아를 떠난 것은 혁명 전 1913년의 일이다.  지금의 소련에서도 그녀의 명성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파블로바가 그 재능을 바쳐 최대한 공헌을 한 것은 러시아 이외의 나라들, 특히 미국에서였다.  파블로바의 무엇보다도 큰 공적은 이런 나라들의 발레 예술을 대중들에게 소개한 일이다.

 

 

 어떤 때에는 9개월도 안되는 기간에 2백38회나 되는 공연을 하여 미국의 77개 크고 작은 고장을 찾아다니며 공연했다.  그는 무대생활을 통하여 총 80만킬로미터를 여행했으며 세계 각지의 관객에게 사랑을 받았다.(주:1923년 동아일보에 '파블로바 부인'으로 소개 되었음)-그것도 지금처럼 비행기편이 없었던 때의 일이다.

 

 내가 파블로바의 매니저를 한 긴 세월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약속한 공연을 취소한 적이 없었다.  미시시피주의 잭슨에서는 오히려 내 쪽에서 공연을 그만 둘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공연하기로 되어 있는 극증에 가보니 낡은 차고였으며 무대도 없는 그저 형편없는 연단 뿐이었다.  물론 분장실 같은 것도 있을 리 없고, 쥐가 들끓는 지하실에는 커튼이 두 석장 걸려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는 불평 하나 없이 '여러분께 나의 춤을 보이고 싶어 왔습니다 -' 라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극장 지붕에 큰 구멍이 나 있어서 비가 샜기 때문에 출연자들의 의상이나 배경들이 젖어 버렸으나 파블로바는 그 빗물 속에서 피루엣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이면 이런 말을 하였다.

 

 '멋있어....조명 같은 것은 필요없어....번개불이 극장 속까지 비쳐주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파블로바도 인간, 성녀는 아니었다.  참다 못해 메니저인 나에게 발레슈즈를 던진 일도 있었으며, 러시아 말로 독설을 퍼붓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어는 물론, 폴란드어,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 마음대로 욕할 수 있었다.  자기가 자기자신에 대하여 또는 분을 참을 수 없을 때에는 몇 번이고 십자를 긋고는 러시아말로 '쌍것들!'이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단원들에게 욕할 때의 그녀 모습이 지금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다들 가만이만 있지 말고, 뭐라고 대답을 해요...'라고 소리를 지르던 그녀.   그리고 때로는 아주 잔소리꾼이 되기도 하였다.  워싱턴에서 공연할 때의 일이다.

 

 공연 첫날 '사소한 잘못'으로 무대 연습과 레슨 시간을 스케줄에 넣지 않았다.  그날 밤, 개막 10분전이 되어 전원을 무대에 한 줄로 세운 파블로바는 일부러 침착한 표정을 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지고 캐묻는 것이었다.  '오늘 연습을 하였습니까?'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그녀는 '좋아요! 알았어요'라고 말을 이었다.  '나는 발레리나이다.  너희들도 발레리나이다.  너희들이 아무 것도 안할 때 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부터 레슨을 시작한다-'고 말하고는 막 오르기를 기다리는 관객을 생각지 않은 듯 단원들을 연습시켜서 개막 시간 30분이나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나 파블로바는 1881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미망인이된 어머니와 생활은 말이 아니게 가난했다.  모녀 두 사람은 검은 빵과 양배추 스프만으로 하루를 지내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파블로바가 열살되는 때 '제실 발레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아 학교에서 주는 간유로 야위었던 몸이 제 못습을 찾게 되었다.

 

 마침 호아제 알렉산더 3세와 그의 황후가 이 발레 학교를 방문, 학생들과 같이 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러한 차마시는 자리에서 어느날 황제는 한 소녀를 그의 무릎에 앉혔다.  그러니까 이것을 본 작은 소녀 안나 파블로바는 질투를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황제는 왠일이냐고 안나에게 묻자 안나는 흐느끼면서 대답하였다.

 

 '나도 황제의 무릎에 앉고 싶어요...'라고.  할 수 없이 곁에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이 안나를 안았다. 그러나 안나는 대신 안킨 것이 싫다고 더 크게 울부짖었다.

 

 

 안나 파블로바에게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발레는 그녀 자신이 안무한 "마른 잎 새"였다.  작품을 무대에서 춤춘 때에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무대 뒤로 들어오던 일이 생각난다.  이 발레는 그 옛날 그녀가 러시아에 있을 때 사귄 한 청년에게 바친 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청년은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마른 잎 새"는 이 젊은이를 사랑했던 파블로바의 추도의 춤이었다.

 

 '사랑을 모르고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어요. 사랑의 비림을 알지 못하면 안돼요.  그러면서 그것이 없어도 살아가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돼요.'  그녀는 이런 말을 나에게 한 일이 있었다.

 

 파블로바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겨 사람들을 자주 초대하였다.  런던 교외에 있는 그녀의 화려한 저택에는 버나드 쇼나 샬리아핀(러시아의 바리톤 성악가) 등 명사가 종종 나타나곤 하였다.  파티할 때면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는 그런 여성이었다.  파블로바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불경기 때는 보수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녀는 '나는 돈이 필요없어요.  당신이 괜찮으시면 우리 단원들에게는 주십시오'라고 자기의 보수는 사양하였다.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으로 공연갈 때 배 위에서 단원들은 모두가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지 못하게 된 것에 쓸쓸한 감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눈치 챈 파블로바는 모두를 놀라게 할 계획을 몰래 세웠다.  배가 적도를 통과하자 그녀는 단원 전부를 자기 선실에 초대하였다.  거기에는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던 것이 아닌가.  이미 배에 오를 때 선창에 감춰놨던 나무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한 사람씩 모두에게 주는 선물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리오데자네이로에서의 공연 때의 일. 파블로바는 막이 내리는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화가나 있었다.  그래서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하면서 무대 뒤로 퇴장을 해 버렸다.  마침 그때 분장실 입구에 한 여인이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그 소녀는 파블로바에게 왜 무대로 나타나지 않느냐고 묻고, 답을 듣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백조의 춤을 보여준다고 내게 약속했는데....'하면서.    

 

 사실 어머니는 딸의 생일 축하고 파블로바 공연 티켓을 사주었는데 이렇게 되었다는 설명을 듣자 파블로바는 그 소녀에게 키스를 하면서 무대로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0분 후 파블로바는 그 소녀를 위해 백조를 춤추었다.  바로 이 백조야 말로 사람들이 아직까지 안나 파블로바라고 하면 금방 연상하는 "빈사의 백조"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음의 고통을 표현하는 빈사의 백조는 그녀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그녀의 태크닉이라기 보다 죽어가는 백조의 마음으로부터의 연민의 정이 그녀의 춤에 스며 나오기 때문일까.

 

 파블로바가 죽은 후 런던에서 행해진 추도공연에는 콘스탄트 람바드가 "빈사의 백조"를 지휘하였다.

 

 오케스트라의 첫 멜로디와 더불어 막이 오르면 무대는 캄캄하게 어두운 채 아무 장식이 없고 등장 인물도 없다.  그리고 한줄기 스포트 라이트가 지금은 가고 없는 발레리나를 뒤쫗아 좌로 우로 비쳤다.  그리고 관객은 오케스트라가 벌써 영원히 파블로바와는 끊을 수 없는 생상의 그 곡을 마칠 때까지 일어선 채 침묵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최후의 파블로바를 만난 것은 1930년 가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돌아가는 준비를 하고 있는데 런던에서 공연 중인 파블로바한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사잔 푸톤에서 승선해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 날은 기분 나쁘게 흐린 날이었는데  파블로바는 내가 타는 배로 와서 선실을 점검하고 침대가 편안한가까지를 돌아보고는 사무장에게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마치 자식을 대하듯이 음식물 주의며 매일 체조를 잊지 말라고, 그리고 잠을 잘 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감기 걸리면 안되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녀에게 빨리 배에서 내리라고 권했으나 그녀는 '괜찮아요'라고 목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데 -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 되어 버렸다.

 

 3개월 후 파블로바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그 생애를 마쳤다.  폐렴에 걸렸던 것이다.  그 날 미명 3시에 그녀는 높은 열 때문에 눈을 뜨고 하인을 불러 '백조의 의상을 트렁크에게 꺼내 달라고 말하고 매니저인 나에게 병이 모두 나았으니 내일부터 무대연습이 된다고 전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한 시간후 그녀는 숨졌다.  49세였다.  파블로바가 죽은 다음 해 봄, 나는 런던에 갔었다.  유럽을 여행하고 파블로바를 만나지 않은 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그녀가 살고 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다스 그린의 화장터로 간 나는 거기에 일하는 사람에게 파블로바가 묻힌 묘가 어디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동쪽 벽의 3/7/11호'라는 답이었다.

 

  그 묘는 이 세상에 있어서의 안나 파블로바의 전부였다.  나는 작은 오랑캐 꽃다발을 놓았다.  

 

그녀가 생전에 사랑했던 꽃이었다.

 

 

솔 휴록(Sol Huro)
 
(리더스 다이제스트)



 

 

 

 


 

빈사의 백조를 추는 안나 파블로바


 

 



 

 

 




사진은 여기저기서 짜집기해서 퍼 온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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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9-1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정말 백조의 호수를 다룬 만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입니다..ㅎㅎ

panda78 2004-09-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ㅂ^ 멋지죠, 물장구님--- 흐흐
결국.. 올해도 발레 한 번 못보고 지나가기에.. 이런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답니다. ^^;;

비로그인 2004-09-1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발레를 좋아하시나요? 왜요? (기냥 궁금해서요 ^^)

panda78 2004-09-16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뻐서요.... ^^ 발끝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