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보슬비 > 땅콩이 이렇게 열리는구나

▲ 땅콩이 불볕 더위와 극심한 가뭄에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2004 김민수
지난 봄 텃밭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던 중 볶지 않은 땅콩을 발견했다. 지난 여름 우도에 들어 갔다 간이매점에서 우도 땅콩이라는 것을 사 먹었는데 여느 땅콩과는 맛이 달랐다. 우도와 가까운 곳이니 이 곳 종달리에서도 땅콩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심심풀이로 땅콩을 심었다.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이라는 말이 있다. 땅콩이나 오징어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정겨운 수식어가 또 어디에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연신 먹어대던 오징어와 땅콩의 구수한 냄새가 추억의 향기가 되어 코끝에 스치는 듯하다.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싹이 나기 시작했다.

"여보, 땅콩도 싹이 나왔어!"

새벽에 텃밭에 나가 김을 매다 말고 수선을 피우는 내 모습이 어린 아이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마른 씨앗에서 새순이 돋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신비로운 경험이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다. 어느덧 땅콩밭도 무성해졌다.

▲ 마치 핏줄을 간직한 듯합니다.
ⓒ2004 김민수
싹이 나면 꽃이 피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언제 땅콩의 꽃을 보게 될까 기대를 많이 했다. 땅콩을 처음 심어 보기도 했지만 땅콩의 꽃도 유심히 보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여느 콩과의 꽃들과 비슷하면서도 빨간 핏줄 같은 것이 노랑 꽃잎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남다르다.

아내의 어릴 적 꿈은 오징어 땅콩 장사와 결혼하는 것이었단다. 오징어와 땅콩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내는 그런 남편을 얻으면 오징어와 땅콩을 실컷 먹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씩을 가져 보았을 소망이다. 가끔씩 오징어와 땅콩을 먹으면서 아내를 놀릴 때가 있다.

"어쩌냐, 오징어 땅콩 아저씨하고 결혼하지 못해서?"
"뭐, 그래도 이렇게 다 사 주는 남편이 있는데 뭐…."

땅콩의 꽃을 보는 순간 살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땅콩은 어떻게 열리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 땅콩을 수확할 때 땅콩을 뽑으면 땅에서 줄줄이 땅콩이 딸려 나왔고, 땅 속에서 자라는 콩이라 '땅콩'이 아닌가? 그런데 꽃이 이렇게 위에서 피면 도대체 꽃은 왜 피는 것인지 궁금했다.

ⓒ2004 김민수
땅콩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고서야 그 궁금증은 풀렸다. 꽃이 진 다음 꽃줄기가 땅으로 들어가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꽃이 지고 나서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흙을 고슬하게 해 주고 북도 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모래까지 두툼하게 깔아 주었다.

'그런데 정말일까?'

믿어지지 않았다. 마른 장마로 들판이 목말라 하다가 마른 장마가 지나자마자 뜨거운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불볕 더위가 시작되었다. 밭에 나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새벽에 잠시 나가 검질을 하고, 호박이나 고추, 가지 등 간단히 먹을 것만 해 왔다. 그랬더니 채소들은 시름시름한데 잡초들은 왜 이리도 극성인지 작은 텃밭이 온통 잡초 세상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더 놔두면 내가 주장하는 태평농법을 넘어서서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해가 뜨기 전에 골갱이를 들고 텃밭으로 나갔다. 땅콩 밭을 매는데 풀과 함께 땅콩의 뿌리 부분이 살짝 드러났다. 그 곳에는 땅콩이 달려 있었다.

▲ 꽃이 지고 나면 원에 있는 것처럼 긴 줄기가 나와 땅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2004 김민수
땅콩은 꽃이 진 후에 꽃을 피웠던 줄기가 길어지면서 땅으로 파고 들어가 열매를 맺는다. 땅콩의 꽃이 그냥 폼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자꾸만 들여 보면서 북을 충분히 주었다.

▲ 살짝 땅을 파 보니 땅으로 파고 들어간 줄기에서 이렇게 땅콩이 열립니다.
ⓒ2004 김민수
이제 저 땅콩이 무럭무럭 자랄 것이라 생각하니 행복해졌다. 아침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땅콩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은 더 좋아졌다. 저절로 휘파람이 나는 새벽이다.

하늘에서 꽃을 피우고 땅에서 열매를 맺는 땅콩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우리네 사람살이에서는 조그만 성과도 크게 부풀려 말하기 일쑤요, 때로는 없는 것까지도 있다 하고, 자기를 알리지 못해서 난리들인데 땅콩을 자기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열매를 살포시 흙에 숨기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생각이요, 콩과의 식물들은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니 고난과는 아예 벗하여 사는 묘미를 아는 것들이구나 하는 것이 두 번째 생각이었다.

콩은 딱딱하다. 물러터지지도 않고 딱딱해서 일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비썩 말라 있다가도 흙만 만나면 이내 새순을 낼 줄 아니 죽음을 넘어설 줄 아는, 부활의 신비를 품고 산다.

그랬다. 모든 것은 허투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아침 텃밭에서 만난 땅콩, 그들은 말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 이야기는 너무 선명해서 마음 속 깊이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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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8-1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진짜, 신기하다!!! 땅콩, 당연히 콩깍지처럼 그냥 열리는 줄 알았는데.^^

panda78 2004-08-16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그쵸! 저도 시댁에서 흙에서 막 파낸 땅콩 받아오면서도 아무 생각 안했는데, 이거 보니까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반딧불,, 2004-08-1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파고 들어가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냥 땅 속에서 열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거 퍼가서 다른 곳에 좀 올릴께요.^^;;

panda78 2004-08-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너무 신기하죠! 정말.. 모르고 있는 것들이 무지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
쌀나무 어쩌고 하는 애들 뭐라 그럴게 아니더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