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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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8-1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코르사코프 들어봤다고 검색어에 넣었더니 ..이런 결과가..
코르사코프증후군 [-症候群 Korsakoff's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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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기명력(記銘力;기억의 처음 단계로 새로운 경험을 뇌리에 새기는 능력)의 극단적인 저하를 수반하는 독특한 정신상태. 건망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바로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기명장애와 발병 이전의 일까지 잊어버리는 역행건망이 있는데, 비교적 오래된 기억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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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기명력(記銘力;기억의 처음 단계로 새로운 경험을 뇌리에 새기는 능력)의 극단적인 저하를 수반하는 독특한 정신상태. 건망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바로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기명장애와 발병 이전의 일까지 잊어버리는 역행건망이 있는데, 비교적 오래된 기억은 유지된다. 또한 시간이나 방향 등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소재의식 장애와 되는 대로 말을 지어내는 작화증(作話症)증세도 두드러진다. 만성 알코올 의존의 경과 중에 의식혼탁과 신체의 진전을 일으키는 진전섬망 후에 많이 나타난다. 그 밖에 두부외상(頭部外傷)·일산화탄소 중독 후 뇌연화·노년치매의 증상(일시적으로 가벼워지기도 하지만 치유되기 어려움)으로도 나타난다. 1887년 러시아 정신병리학자 S.S. 코르사코프에 의하여 기재되었다. 증상은 뇌의 일정 부위, 예를 들면 호르몬의 중추인 시상하부, 기억과 관계가 깊은 암몬각(角) 등에 변화가 있을 때 일어나기 쉽다. 대뇌피질의 광범위한 변화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알코올 의존의 경우는 간장애·다발성신경염 등을 수반하는데, 이것은 비타민 부족 등 영양부족과 관계가 있다. 알코올 의존에 의한 코르사코프증후군은 일시적으로는 가벼워지더라도 재발하기 쉬우므로 음주를 중지하지 않으면 경과가 좋지 못하다. 치료는 소량의 정신안정제의 투여나 전신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대증요법을 시행한다.



플레져 2004-08-1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마음도 사로잡네...
판다, 어디 갔다온거에요? 안보여서 보고싶었고, 궁금했어요...^^

panda78 2004-08-1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그렇구나... 그런데,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아마 전람회의 그림의 작곡가죠?
S.S코르사코프라.. 오호... 그렇군.

panda78 2004-08-1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헤헤- 엄마가 오셔서 둘만의 시간을 갖느라구요. ^ㅂ^
내일도 못 올 것 같네요. ;;;;

반딧불,, 2004-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


나 운 영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소위 「러시아 5인조」의 주요인물입니다. 본래 이 「러시아 5인조」는 19세기 후반에 동구와 북구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국민주의운동으로서 그 본질은 낭만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서구의 전통적인 음악의 여향에서 벗어난 각민족의 음악어법을 존중하고 강한 민족성을 구가하자는 움직임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민요, 민속무곡의 요소를 사용하고 자기나라 말에 의한 성악곡을 작곡하거나 자기민족의 전설, 고담, 역사, 자연, 생활을 소재로 한 가극 또는 표제음악 등을 작곡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국민주의의 선구자는 러시아의 그링카이며 「러시아 5인조」는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다섯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라키레프는 본래 수학과 박물학을 전공했고 퀴는 공과대학 교수, 포병소위였으며 보로딘은 약학을 전공했고, 군의학교 교수였으며 무소르그스키는 근위기병, 행정관사였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사관 후보생이었으니 모두가 음악전문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음악원의 설립자요, 궁정관현악단 지휘자가 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모여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이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였으며 그들의 작품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즉 무소르그스키는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을 쓴데 비하여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비독창적이고, 아카데믹한 수법에 의한 작품을 썼습니다. 전자는 예술가요, 피아노곡, 가극을 썼으며 후자는 관현악곡, 가극을 썼습니다. 또한 전자는 인상파음악에 선구자로서 드뷔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후자는 관현악법의 대가, 원색적 관현악법의 창시자로서 라벨, 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에프,레스피기 등 세계적인 작곡가를 길러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한때 한방에서 공동생활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무소르그스키는 행정관사로서 박봉에 허덕이었으며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성을 그만두고 고정수입도 없이 다만 음악원의 작곡교수의 박봉만 가지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테이불 하나와 피아노 한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방해됨이 없이 공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즉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무소르그스키가 피아노를 사용하는 동안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사보(寫譜)를 하거나 관현악 편곡을 했고 점심시간 이후에 무소르그스키가 직장에 나가면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피아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형편을 보아 서로 양보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서로 대조적인 작곡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소르그스키는 술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아편중독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의 작품인 가극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치나>와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등의 관현악편곡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편곡이 다소 원곡을 손상시킨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공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로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공동생활은 역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가 맞지요??

플레져 2004-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새로운 걸 또 알았네요~
반딧불님, 코멘트 퍼갈게요. (퍼가도 되나요? 우선 허락 부터 받고...기둘기둘~~)

반딧불,, 2004-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그새..
여하튼...

음악가가 맞습니다..어흑..
이런 플레져님과 고새 바람을??

panda78 2004-08-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무소르그스키가 전람회의 그림이고, 코르사코프는 민둥산의 하룻밤이었나?
헷갈려..헷갈려.. 모르겠어요. ㅠ_ㅠ 흑..

반딧불,, 2004-08-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녜..
퍼가소서..플레져님.

그나저나...판다님은 두고가소서..질질질~~

플레져 2004-08-1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무거워서 못 데리고 가요...캬캬~~

panda78 2004-08-1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 플레져님, 잠깐 일루 와보아요. 흠흠.

반딧불,, 2004-08-1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림스키 코르사코프, 니콜라이 (Nikolay Rimsky-Korsakov) 1844-1908년



생애와 작품


러시아의 작곡가·사회운동가. 노브고로드 출생. 유년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않고 1856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해군사관이 되었다. 이 무렵 발라키레프와 사귐으로써 ‘5인조(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크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한 멤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작곡지도도 받았다. 71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초빙되고 또 해군군악대의 지휘자로서 내외의 명곡을 편곡하는 한편 궁정성가대지휘자도 지냈다. 81년 무소르크스키가 사망하여 ‘5인조’가 해산되자, 악보 출판업자인 벨라예프의 도움으로 ‘벨라예프그룹’을 결성, 후진인 글라즈노프, 랴도프 등을 지도하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된 혁명소동 때는,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측에 서서 학원에의 권력개입을 거절한 탓으로 페테르부르크의 교수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작품은 연주 금지처분을 당했다. 그후 복직이 되었으나 퇴직하고, 심장병으로 급서할 때까지 자택에서 작곡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의 작풍은 대체로 색채적이고 묘사적이며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화성적인 표현에 차 있다. 관현악의 묘사성 등은 러시아의 오페라, 표제교향시, 가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라벨, 레스피기 등 근대 작곡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기상곡》(1887) 《세헤라자데》(88)와 같은 표제음악과, 《사드코》(98) 《설희(雪姬)》(82) 《금계(金鷄)》(1909) 등의 오페라가 많으며, 이들의 소재로는 러시아의 민요와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교적인 세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합창곡·가곡·피아노곡·관현악곡 등도 많다. 저서에는 《러시아민요 100곡》(1877) 《화성학 실습》(84), 《관현악법 원리》(1913) 자서전인 《나의 음악 연지(年誌)》(1909) 등이 있다.



작품의 특징


1874년 경에 러시아 민요수집, 편곡에 열의를 나타내어 국민주의에 대한 접근을 나타내는 한편 실내악과 푸가를 포함하는 피아노곡의 작곡등을 통해 전통적 수법을 소화하는 데애도 의욕울 보였다. 그의 관현악은 색채적인 동시에 환상적이며 객관적 묘사가 뛰어났다. 이것은 직접 근대 음악의 오케스트레이션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제자인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키예프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낭만파적 표현과 러시아 민요의 선율의 융합이 이같은 오케스트레이션과 맺어졌을때 가극과 관현악곡 등의 표제적인 작품에서 유니크한 효과가 발휘되었던 것이다.

이게 도움이 되시려나요??
세헤라자데가 유명하다는뎁쇼??

반딧불,, 2004-08-1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캬~~
플레져님 멋쟁이!!

panda78 2004-08-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헤라자데와 금계였구나.... ㅡ..ㅡ;;;;
그렇군요, 별 언니! ^^ 기억해 놓읍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