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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평점 :
8만 4천자의 법문을 설파한 부처가 말년에 "나는 한 마디도 설법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혹자는 선불교의 정신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결국 진리 그 자체인 불법(佛法)은 불립문자일 수 밖에 없으며, 8만 4천자가 된다해도 그것은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라는 뜻일 게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을 받아보곤 선(禪)이란 글자에 자꾸 눈이 간다. 이 책은 총 12만 단어로 이루어졌는데 이 12만 단어가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자꾸 눈이 간다.
작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꺼져, 나는 지금 진리를 찾고 있어"라고 말하자 진리가 가버리는 꼴이다."(27면)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데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말한다. 작가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니 나도 작가의 삶을 정리해 본다.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는 1928년 미국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대학에 입학한다. 지능지수검사에서 170을 기록한 과학 분야의 영재였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하여 한국에서 군복무를 한다. 미국으로 돌아가 철학을 공부하고, 인도에서 잠깐 동양철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대학 강사를 하며 결혼 후 두 아이를 갖지만, 심각한 우울증 증세로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전기 충격 치료까지 받고선 증세가 회복된 후 아들과 함께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난다.
무엇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이 수재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이끌었을까? 작가를 너무도 닮은 소설의 주인공은 전기 충격치료를 받기 전의 자신을 '파이드로스'라고 말한다. 파이드로스가 미치게 된 원인을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합리성이라는 유령이 파이드로스의 추적 대상이었으며 그를 미친 사람이 되도록 몰아간 장본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175면)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그 밑절미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유령일텐데, 그 유령은 자신을 쫓던 파이드로스마저 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자신의 현재 모습을 형성한 장본인이 바로 그 유령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162면)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제 주인공은 여행을 떠난다. 미친 사람이자 유령이 돼버린 자신이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다.
미국 문학에서 여행 소설 혹은 방랑 소설의 역사는 길다고 하겠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두 방랑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과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은 소년들의 방랑을 다룬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도 방황하는 소년을 다룬다. 이 세 소년은 왜 여행을 떠난 걸까? 마크 트웨인의 두 주인공은 가족들로부터 벗어나려 여행을 떠난다. 헉과 톰은 각각 아버지 팹과 이모 폴리로부터 잠깐이지만 자유를 맛본다. 샐린저의 주인공 콜필드는 학교와 주변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이들 소설과 비교할 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주인공은 꽤 다르다. 이 주인공은 더이상 소년이 아니다. 소년인 아들을 데리고 여행한다. 여행의 분위기가 묵직하고 진중함은 물론이다. 가족인 아들과 동행함은 그가 단지 가족이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로서 여행을 함이 아님을 말해준다. 더 주목할 점은 그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터사이클과 그 관리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터사이클은 전적으로 이성의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또한 모터사이클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공부는 실제로 합리적 이성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공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175면) 미시시피 강을 건너려는 허클베리 핀에게 있어 뗏목은 여행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이지만 우리의 바이커 주인공에게 있어 모터사이클은 합리성의 대표로서 하나의 실험물이다.
이 합리성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바로 선(禪)이다. 합리성은 언어에 기반한다. 합리성과 언어가 서로 다르지 않음은 데리다의 주장대로 언어(말씀)가 곧 이성이며, 신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요한복음> 1장 1절을 분석한다. "태초에 말씀께서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는 구절에서 그는 서구 '말 중심주의'의 근원을 찾는다. 그런데 동양 철학의 선이란 말이든 글이든 논리의 세계 자체를 무화시킨다. 왜냐하면 동양 철학은 "현실에 대한 언어적 진술을 결코 현실 그 자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258면) 그리고 논리의 세계를 무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훈련 방법이 바로 선이다.
합리성의 세계에서 힘겹게 뛰쳐나온 주인공에게 동양적 선은 대안적 삶의 태도로 다가온다. 이것이 옳고 그른지는 내가 판단할 깜냥이 아직 없지만, 그가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 뿌려 놓은 12만자의 단어가 진리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소중한 방법임은 힘겨이 소설을 덮으며 확인하게 된다. 고맙게도 말이다.
Robert Maynard Pirsig(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