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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과 상처 - 우리 시대 문학의 주요 논쟁에 대한 탐사!
권성우 지음 /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1999년에서 2002년 사이의 이른바 '문학권력논쟁'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논쟁의 입각점이 여럿이었지만 내 관심은 진보를 자처하는 에콜과 예술주의를 표방하는 비평가들의 행태에 있었다. 논쟁 속의 문제 제기가 지금 의미가 있달 수 있을까? 며칠 전 발간된 <창작과비평> 겨울호에서 이 잡지의 주간 백영서는 통권 150호를 맞는 <창작과비평>을 이렇게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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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창비>의 영향력을 무겁게 보면서 창비가 '문화권력'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 '권력화'되었다는 일각의 비판은 물론 창비가 나태해지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다그치는 고마운 채찍질로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창비가 쌓아올린 성취에 합당한 영향력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지는 않으며 오히려 최대한으로 키워나가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실제로 <창비>는 보수적 주류언론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로부터 소외당하기 일쑤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주류의 위치에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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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이 말이 비주류 창비가 아직 문화권력이 아니라는 소리로 들린다. 창비가 보수언론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나? '소외'를 어떤 뜻으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창비와 창비의 좌장격인 백낙청의 운신을 <한겨레> 못지 않게 보수언론도 주워 섬긴다. <창비> 통권 150호 발간도 <한겨레>엔 기사가 아직 없지만, <조선일보>는 기사를 실었다. 보수의 이데올로그라 자처하는 안병직도 자신이 펴내는 <시대정신>을 <창비>의 위상만큼 끌어올린다는 다짐을 해대니 창비를 비주류라 일컫는 건 마땅치 않다.
예술주의를 표방하는 에콜 <문학과사회> 동인들은 어떤 모습일까?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인 이광호가 지난해에 펴낸 비평집 <익명의 사랑> 서문이다. 내가 대학에서 비평 공부를 게을리하기도 했지만, 난 이 서문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회통불능의 자폐적인 비평을 주워섬기는 비평가들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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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소설에서 읽은 것은 무심함의 존재 미학과 자기 연출법이었고, 시에서 읽은 것은 탈현대성의 언어가 익명성의 공간으로 존재를 이동시키는 장면이었다. 오늘의 시에서 비인칭성의 언어를 읽었고, 소설에서 초연성의 존재 미학을 읽었다면, 그것은 시가 언어(감각)의 국면과 관련되고, 소설이 인간(윤리)의 국면과 더 관계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둘은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현대 이후의 다른 삶의 '정치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어떤 젊은 텍스트 속에서는 거꾸로 소설의 비인칭성과 시 언어의 초연성을 읽었다. 동시대 문학의 무심함과 익명성으로부터 다른 사랑의 사건을 만났다. 놀랍게도 지난 시대의 빛나는 텍스트들 역시, 명사적인 것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동시대성을 보존하고 있다. 다른 삶(인간, 언어)의 가능성을 꿈꾸지 않는 문학은 불온하지 않다. 비평은 저 매혹적인 텍스트들, 그 몸의 일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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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과 상처>에서 권성우는 열심히도 논쟁을 하고 비평을 썼다. 그가 싸웠던 남진우, 류보선, 윤지관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창비>와 <문사>의 요즈음의 모습에 권성우가 겹쳐 보인다. 그는 여전히 쓸쓸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