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者の奢り·飼育 (新潮文庫) (改版, 文庫)
大江 健三郞 / 新潮社 / 1959년 9월
평점 :
품절


1 중심과 주변 

  소설은 외딴 산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촌 마을은 오에가 자주 택하는 소설의 배경이다. <만연원년의 풋볼>(1967), <동시대 게임>(1979), <타오르는 푸른 나무>(1995) 3부작 등이 산촌 마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꽤나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곳은 외부와의 소통이 막힌 폐쇄의 공간이다. <죽은 자의 사치>(1957)는 의과대학의 사체 처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적 인간>(1963)에서는 반사회적이라 할 수 있는 성을 다루고 있다.  

       마을에서 읍내로 통한 지름길에 걸렸던 그네다리를 산사태가 휩쓸어 가버린 뒤론,  

       우리 국민학교 분교장은 폐쇄됐고, 우편은 마비돼 버렸다.   

  그러나 홍수로 인한 일시적인 격절이 아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읍내 사람들한테 더러운 짐승 같은 천대를 받아 왔"다. 읍내와 산촌 사이엔 심리적 거리감이 놓여 있다. 거리감이란 차별로 말미암으며 결과물은 소외다.  

  소설은 두 세계가 만나고 있다. 읍내와 산촌 마을이 그것이다. 이를 앞으로 중심과 주변이라 이름 짓는다. 읍내가 중심일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현청은 산촌 마을로서는 권위의 공간이다. 현청의 대언자인 서기의 명령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의 공간은 전시이다. 또한 읍내는 전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을 청년들의 부재와, 때때로 우편배달부가  

       전해오는 전사통지라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전쟁은 딱딱한 겉껍질과 두툼한 과일의 

       살속까지 침투하지 않았다.  

  미국 흑인 비행사가 산촌 마을에 불시착함으로 중심과 주변의 소통이 시작된다. 서기가 자주 마을로 발걸음 한다. 마을 역시 이제는 전쟁의 공간이 된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선에 두 사람이 선다. 서기와 언청이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 모두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바흐친의 이론은 시사적이다. "이 세 인물 - 악한, 광대, 바보 - 은 이 세계 속에서 '타자'가 될 권리, 즉 현존하는 인생의 범주들 중 어느 하나와도 협력하지 않을 권리를 지닌다."(<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이 말은 악한, 광대, 바보만이 중심과 주변의 경계선에 설 수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서기와 언청이를 바흐친이 말한 바 주변적 인물로 본다. 서기와 언청이는 경계선에 서 있다. 경계선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서기는 의족을 한 외다리이다. 서기가 차별받는 부락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읍내로 대변되는 국가에 의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가 하는 일은 앞서 말한 바처럼 현청의 지시를 대언하는 것이다. 비행기의 불시착으로 서기는 할 일이 많아졌다. 그가 마을로 전하는 것은 전쟁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관념으로 존재하던 전쟁이 흑인 병사라는 실체로 현재 보여지지만 흑인병, 즉 전쟁을 그들은 스스로 처리할 권리가 없다. 전쟁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그는 경계인이다.  

         "저 포론 검둥이로구나." 언청이는 감동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놈을 어쩔 작정인가? 광장에서 쏴 죽일라나?" 

         "쏴 죽인다고?" 놀라움에 숨길을 몰아가며 언청이가 외쳤다.  

         "진짜 검둥일 쏴 죽여?" 

         "적병이니까."하고 나는 자신 없는 주장을 했다.  

         "적, 저놈이 우리 적병이야?" 

         "검둥이야. 그런데 무슨 적이냐?" 

  왜 언청이는 흑인 병사가 적이 아니라 주장하는 것인가? 미국과의 전쟁이므로 미군 가운데 흑인이 끼어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흑인 병사가 적군이 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아군과 적군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당연히 국가이리라. 아군과 적군은 아국군과 적국군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차원에서 볼 때 흑인 병사가는 분명한 적이다. 그러나 언청이는 다른 차원에서 흑인 병사를 바라보고 있다. '검둥이'란 말은 국가 이전의 개넘이다. 일본인이 일본인이기 전에 황인종이듯이, 흑인 병사 역시 미국인이기 전에 흑인종이다. 인종으로 따지자면 흑인 병사와 마을사람들은 적이 아닌 것이다. 언청이는 더 나아가 "저 놈, 인간 같구나."하는 데서 보여지듯이 흑인 병사를 동물 취급하기도 한다. 또한 성의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흐친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물질적인 육체적 원칙'을 들고 있다. 이 곳에서 인간의 육체는 극도로 과장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언청이가 소녀들과 벌이는 기묘한 행동들은 그가 기존의 성의식에서 썩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청이 역시 유다른 생각을 가지며 바흐친이 말한 바 '타자'로 서 있다.  

  타자로서의 속성 외에도 서기와 언청이를 한 데 묶을 수 있는 요인을 한 가지 더 지적할 수 있다. 서기는 직위상 마을 사람들로부터 권위의 존재이다. 그런데 언청이 또한 자신의 소세계(아이들 세계) 속에선 권위자이다. "언청이가 아이들로부터 대추, 살구, 무화과, 감 따위의 구경값 예약을 한 놈 한 놈한테 받고서야 채광창을 짧은 시간 동안 들여다보게 하였다."  

2 성장 소설 

  <사육>은 성장 소설이다. 왜인가? '나'는 어떤 면에서 성장을 하는가?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그런 생각이 계시처럼 내 머릿속을 채웠다. 

           언청이와의 피투성이 싸움, 달밤의 새사냥, 썰매장난, 개승냥이 새끼, 

           그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세계와의 연결 

           과는 인연이 없어져 버렸다.  

  소년이 맞닥뜨린 것은 세상의 악이다. 악한 세상을 경험한 소년은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다. 이는 성장 소설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토니오 크뢰거>, <데미안> - 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사항이다. 소년이 맞닥뜨린 악은 무엇인가? 

  흑인 병사를 적으로 생각하던 소년은 차츰 그와 '급격히 깊고 힘찬, 거의 인간적인 연줄로 결합됨'을 느낀다. 소년은 그를 '한 마리 검둥이'로 생각한다. 짐승일진대 암염소와의 흘레붙이기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생각이라고는 하나 사람을 짐승으로 보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흑인 병사는 언어가 없다. 그가 발하는 것은 소리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있어 흑인 병사의 소리는 짐승의 소리일 뿐이다. 무엇보다 단절된 마을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외다리의 서기만이 유일하게 마을로 들어온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이다.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도 피차별 지역인 우리 마을에는 짐승이 아니면 그 어떤 정상적인 존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가축으로만 여겼던 흑인 병사에게 소년은 배신을 당한다.  

            나는 포로였다. 그리고 미끼였다. 흑인병은 '적'으로 변신했고...... 나는 

            난폭한 흑인병 팔 속에서 분노에 불타면서 눈물을 흘렸다.  

  흑인 병사는 가축이 아니었고, 적이었다. 친밀감은 사라지고 분노만이 남는다. 아버지는 흑인병을 도끼로 내리찍고, 소년도 손을 다친다. 소년이 깨닫는 악한 세상의 모습은 이렇다. 우선 이 공간은 배신의 공간이다. 흑인병은 자신을 인질로 삼았으며, 그 인질을 아버지는 모질게 살해한다. 흑인병에 대한 감정 - 친밀감과 배신감 - 이 뒤섞일 때 아버지는 가차없이 흑인병을 살해한다. 소년은 어쩌면 양쪽으로부터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애정을 쏟던 존재에게 도끼질을 가할 수 있는 세상이다. 저 도끼질은 언젠가 내게로 향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소년의 아버지를 천황으로 보는 시각은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근거가 있다. 어른들의 세계의 무정무자비함이 소년이 목도한 세상의 악이다.  

3 죽음의 이미지 

  소설을 시종 지배하는 이미지는 죽음이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나하고 아우는 산골짝 밑바닥의 가설 화장터, 지저분한 나무숲을 깎아버 

              리고 흙만 얄팍하니 파헤친 간소한 화장터에서, 기름과 재 냄새가 풍기는 

              파삭한 표면을 나무개피로 헤치고 있었다. 

  '나'와 아우에게 있어 죽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아버지 직업이 사냥꾼이라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소설엔 또한 두 사람이 죽고 있다. 흑인 병사와 서기가 그들이다. '흑'의 이미지 역시 원자폭탄의 검은 연기와 관련하여 죽음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흑인=검은 연기=원폭) 또한 전시 공간 속에서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흑인 병사와 서기의 죽음은 깊이 관찰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적국이지만 함께 전쟁을 치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통한다. 서기는 흑인병에게 담배를 권하고, 흑인병은 답례로 파이프를 건넨다. 국가에 의해 전쟁에 고용됨이 무언중에 공감되었는지도 모른다. 흑인병이 전쟁에 참가한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으나 미국 사횡에서의 흑인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다시 중심과 주변의 논리가 놓인다. 중심과 주변은 이미 그 자체가 위계로 배열되어 있다. 주변은 어디까지나 중심에 종속되어 있다. 주변부의 인물이 경계선에서 하는 역할이란 기껏해야 중심부의 활성화일 뿐이다. 역할이 끝나면 그들의 삶도 다하는 것이다. 역할을 다 한 흑인병과 서기는 죽음을 맞는다. 오에 문학에 있어 중심과 주변이 상호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탈구조주의적 구도는 <동시대 게임>에 가서야 보여진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갖게 된 비극적 느낌은 이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