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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위다푸 지음, 강계철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1999년 2월
평점 :
<타락(원제는 침륜)>(1921)의 주인공은 일본 N시에 소재한 고등학교에 유학중인 중국인이다. 그는 일본학생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가 즐기는 삶은 책 속에서 만나는 세계이다. 워즈워드와 하이네의 시구, 에머슨과 소로우의 글들을 그는 아끼고, 아끼며 읽어간다. 주인공의 고민은 퍽 심각하다. 적(敵)인 일본학생들과 함께 지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롭고, 조국인 중국의 약소함으로 인해 괴롭다. 그러나 그를 괴롭히는 가장 큰 고민거리는 다름 아닌 성적욕망이다. 길거리의 여학생들만 봐도 그는 흠칫 놀라고, 하숙집 주인 딸을 향해 남모른 연모(戀慕)의 감정을 품는다. 그러나 소심한 그는 사람들을 피해 산 위로 이사하지만, 우연찮게 남녀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화들짝 놀란다. 용기를 얻은 그는 유곽으로 달려간다. “조국이여, 조국이여.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이 구절을 실제 죽는 걸로 해석한다면 주인공은 자살로 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위따푸(郁達夫)의 첫 소설이 사소설인 이유는 무엇일까? 전기에 따르면 그는 1913년 17세에 일본에 건너간다.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경제과에 1919년에 입학한다. <침륜>이 1921년작이니 재학중에 발표한 것이 된다. 1922년 그는 귀국한다. 그가 일본에 거주한 약 10년 동안 배운 문학은 과연 어떤 것일까?
1910년대는 자연주의 문학이 일본을 풍미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 일본 작가들이 이해한 자연주의는 사소설의 창작으로 이어진다. <파계>라는 걸작을 통해 신분 모순을 비판한 시마자키 도손마저 이후에는 가정사(<집(家)>)와 같은 신변잡기적 소재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등이 자연주의를 비판하며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지만, 문단의 큰 흐름은 자연주의였다. 1910년에 결성된 주요 문학동인 그룹인 시라카바파(白樺波) 역시 자연주의를 비판하였으나 그들의 문학 역시 사소설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위따푸가 일본에서 배운 바도 사소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을 듯 싶다. 그러나 내가 갖는 한 가지 문제의식은 왜 꼭 사소설이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사실 <침륜>은 썩 잘 써진 소설이 아니다. 아직 덜 여문 문학소년취향이 내내 소설을 사로잡고 있다. 표백되지 않은 감정과 관념이 소설에 넘치고, 과장하자면 요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를 사소설에 대한 얕은 이해라고 생각해야 할 지, 작가의 어린 나이 때문이라 해야할 지 자신이 서질 않는다. 하지만 사소설을 동원한 위따푸의 문제의식을 조금은 알겠기에 이야기를 꺼낸다.
“조국이여, 조국이여.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너는 빨리 부자가 되어라. 강해져라. 너의 품안에서는 아직도 많은 젊은이가 괴로워하고 있단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유는 일본과 조선의 청년과는 그가 썩 다른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정 소설의 범주에 세 소설을 넣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침륜>의 주인공은 가장 합법적이며, 떳떳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자살로까지 몰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조국이 아닐까? 나는 사소설을 사회성과 시대성을 의식적으로 벗어난 갈래라고 생각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대해왔다. 김동인(金東仁)과 이태준(李泰俊)의 많은 소설이 그러하며, 일본이 자랑하는 많은 소설 또한 그러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1947)은 내게 심하게 말하면 자폐문학으로 읽혔고,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여뀌 먹는 벌레(蓼喰ふ蟲)> 역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이해하는 사소설의 가장 큰 병폐는 사회성 혹은 시대성의 결여이다. 이 때 소설은 소통의 공간이 아닌 밀폐 또는 자폐의 공간이 되고 만다. 따라서 사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실패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침륜>의 주인공 역시 실패자인 것은 분명하다. 허나 그를 실패로 몰고 간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조국이다. 중국적 지식인의 고통은 조국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사소설 작가인 다야마 가타이, 김남천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사소설만큼 잘 드러낼 수 있는 갈래가 또 있을까? 다른 누구보다 작가인 내가 괴롭다. 힘없이 가라앉는 조국으로 인해 괴롭고, 얻지 못하는 사랑으로 인해 괴롭다. 이 절실함을 드러내는 양식으로 사소설은 존재한다.
郁達夫(1896-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