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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은 자기 중심적으로(혹은 나에 빗대어) 생각하기 마련인게 인지상정이다. 그 중의 한가지가 세상 유명 인사들의 나이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해 보는 것. 어린 시절에는 당연하게도 내 또래나 나보다 어린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이미연'이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는지. (대학 입시철 당시 이미연의 지망 학교가 초미의 관심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은 워낙에 고등 학생 스타들이 많아서 이런일은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대머리가 다 된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이나 40대 용모의 루이스 피구가 나보다 어리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기도 하며, 20대 초반의 젊은 연예인들이 나와 몇살 차이나 나는지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 '작가'나 '문인'들의 나이를 확인하다 보면 나는 아직도 내가 젊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 인생의 경륜과 경험이 이들에게는 큰 자산이기에 어린 나이에 문명(文名)을 크게 날리는 일은 쉽지 않은가 보다.
<러시 라이프>의 작가이자 일본은 물론 최근 한국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인 이사카 고타로는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이다. 즉, 문단에서는 아직 젊은 신진 작가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최근 한 달 사이에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작가의 책이 세 권이나 출간되었다. 그만큼 출판 기획자들의 구미를 끄는 작가인 모양이다. 아직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작품세계와 그 근간을 이루는 주제의식들을 미처 알 수는 없지만, <러시 라이프> 한 권만으로도 이 젊은 작가의 재기 넘치는 상상력과 간결하면서도 촌철살인한 글 솜씨를 충분히 맛 볼 수 있었다.
<러시 라이프>는 젊은 작가가 말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인들은 쳇바퀴 돌듯한 단순한 삶을 하루 하루 살아간다. 그러나 단조로운 그들의 삶에도 전기(轉機)가 마련되는 중요한 순간들이 반드시 있을 터. 각기 다른 삶을 사는 네 명의 주인공이 그 터닝 포인트를 어떻게 맞이하는지를, 그들의 하루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단순하게 보여주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소설의 매력이 빛을 발한다.
가이 리치의 영화나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처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센다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병치되어 진행이 된다. 미스터리 작가인 S. 밸린저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플로팅 기법이다. 기차의 선로마냥 평행하게만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절묘하게 맞물리게 된다. 그것도 두, 세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네 명의 각기 다른 하루, 그리고 이야기의 처음과 중간, 끝부분에 등장하는 젊은 화가와 부유한 화상(畵商)의 이야기까지 모두 다섯개의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철학이 있는 절도범 구로사와, 신흥 종교에 심취한 대학생 가와라자키,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는 교코, 재취업 도전 40연패(連敗)의 암울한 실직자 도요타. 센다이 시에 사는 이들 네 사람은 같은 장소를 지나기도 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그들의 하루를 보낸다. 과연 그 하루 동안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이며, 그들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일까.
플로팅 기법을 쓰는 영화나 소설은 대개 독립적으로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관객이나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결말이 궁금해서라도 독자는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말 뛰어난 작품은 결말만을 위해 치닫는 파노라마식 내용이 아니라 그 각각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러시 라이프>는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결말을 궁금해 할 틈도 없이 각각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정신 없이 몰입하게 한다. 네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 하나 하나 만으로도 훌륭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착착 아귀가 맞물리는 순간에 또 한번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모든 톱니 바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 순간 작가는 독자들에게 말한다.
"인생은 러시 라이프(Lush Life). 돌고 도는 인생이다."라고.
인생에 대한 평범한 진리로부터 이렇게 정신없이 재미있고 멋진 이야기를 창조해 낸 작가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덧글 하나. 작가는 친절하게 복선을 여러 군데에 걸쳐 제시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이 이야기의 구조가 어떤 방식인지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아챈다고 해서 그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지만.
덧글 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교코의 인물 묘사이다. 정신과 의사라는 인텔리한 직업을 가진 교코는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한 '성질 나쁘고 짜증을 유발하는, 제멋대로인 어리석은 여성'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가장 구태의연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또한, 제멋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버릇 없는 인물이 대개 '여성'으로 묘사되는 것은(그것도 남성 작가에 의해) 유감스러운 일이다. 신경과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