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에 책을 읽는 사람은 옛날보다 더 미움을 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이치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건 그냥 들어넘길 말이 아닌걸. 어째서?"
"글쎄요. 일본사회 자체가 책 읽는 사람에게 냉담해요. 책을 읽는다는건 고독한 행위고, 또 시간이 걸리잖습니까. 그런데 일본사회는 바빠요.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느긋하게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예를 들어 제가 상사에게 회식에 못 가겠다고 한다고 해요. '오늘은 얼른 집에 가서 저번에 줄 서서 산 비디오 게임을 하고 싶거든요'라고 거절합니다. 상사는 쓴웃음을 짓기는 하겠지만 '못 말리는 녀석이군. 저녀석 오타쿠니까'하고 말죠. 하지만 '오늘은 얼른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싶거든요'라고 거절하면 어떨까요? 상사는 틀림없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거고, 저에 대해 반감을 가질 겁니다. (후략).."
온다 리쿠, <삼월은 붉은 구렁을> 중에서.
굳이 인용을 하지 않더라도, 요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수파'이다.
잠을 자거나 책을 읽고 있지 않으면 도무지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들을 찾는건 쉽지 않다. 무료 신문이 정복한 출근길은 그렇다 치더라도, MP3 Player나 DMB 휴대폰, PSP, PMP 등 첨단 미디어 제품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책은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간혹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책도 대개는 "부자 되는 법..", "성공하는 사람.." 같은 자기 계발서나 재테크 관련 서적들이고, 그게 아니라면 영어나 일본어 등의 어학책을 들고 공부에 열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오로지 '재미'로 책을 읽는 나는 속절없는 소수자이다. 뭐 그렇다고 정치적 탄압을 받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말이다.
소수자가 소수자를 만나는 기쁨(?)은 남다르다. 지하철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손에 들린 책이 내가 읽었거나, 관심있어 하는 분야의 책이라면 반가움에 악수라도 청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물론 그러진 않는다. -_-;) 마이너리티의 연대 의식은 강한 법이다.
지하철에서 단연 강세를 떨치는 소설은 삼국지, 조정래의 대하소설, 다빈치 코드등이다.(이문열의 삼국지나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에는 학교 도서관, 회사 도서자료실 등의 직인이 찍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젊은 여성 층을 위주로 하루키 등의 일본 소설이나 국내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편이다. 남자들에게는 무협 소설이나 환타지 소설들이 인기다. 영화 개봉을 통해 새삼 주목을 받았던 <오만과 편견>을 읽고 있는 여자분들도 몇 번 보았다. 최근 두 명이나 발견(?)된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읽고 있던 여자분이 미스터리 독자인 내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반가운 지하철 독서족이었다.
범위를 좁혀 보자면, 추리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거의 없다. 한참 셜록 홈즈가 잘 나가던 3~4년 전에는 홈즈나 뤼팽을 읽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곤 했으나, 그거야 일시적인 시류였을 뿐. 작년 가을인가 반짝반짝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새 책(해문의 하드커버판이었다)을 손에 들고 여자친구에게 "이거 되게 재미있다더라"라고 말하던 남학생이 지하철에서 만난 '최후의 미스터리 독자'였던 것 같다. (들고 있는 책과 대사로 미루어 '미스터리 애호가'는 아닌듯 하지만)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그 많아 보이는 독자들은 사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지독한 소수자들일 뿐이다. 작년 미스터리 출간 러시속에 최대의 승자가 되었던, 미스터리 독자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인기를 끌었다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겨우 2만부 판매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국내 미스터리 독자층은 얇다. (사실 2만부라면 이 바닥에서는 거의 한계치의 판매량이 아닐까. 엄청난 대박이다.)
지난주, 출퇴근길에 모처럼 비교적 '베스트셀러라 할 만한 소설'을 손에 쥐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지독한 장르 소설 편식증인 내게도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퇴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공중그네>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하철 독서족의 '비주류'인 나보다 좀 더 나이들어 보이는 회사원 차림의 아저씨였기에 그 놀라움은 더 컸다. 반가움과 쑥쓰러움이 교차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때와 같은 겸연쩍은 느낌이 들었다는게 우습다. 원체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서 그랬으려나.
그 순간이 올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지하철에서 옆사람과 나란히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 시리즈 신간(예를 들자면)을 읽고 있는 장면을 기대해 본다. 그 때는 꼭 반갑게 인사하리라.(그러나 그 사람은 온라인상에서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미스터리 팬덤일 가능성이 클것 같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