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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과학은 문화다>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대담집의 기획자인 애덤 블라이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과학이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엔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학이 세상을 개선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 세상만사는 과학에서 시작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의 배후에도 과학이 자리 잡고 있다.”(4) 즉, 그에게 문화란 인간의 삶과 사회의 근본적 토대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 토대를 과학이 다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혹은 인간 사회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면, 그건 바로 과학으로부터 비롯된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반대편에서, 과학이 인간 사회에 가져온 다양한 진보를 인정하지만 그와 더불어 온갖 폐해 또한 양산해 냈음을 지적하는 입장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20세기를 ‘과학의 세기’로 부르며 앞으로의 세기는 과학에 쏠린 무게중심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단적 생태주의나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극단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혹은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도 많다.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 즉 과학 문화와 인문 문화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의식한 듯 책의 첫 대담은 에드워드 윌슨과 대니얼 데넷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윌슨은 <사회생물학>이나 <통섭> 등의 저서를 통해 생물학과 진화론을 바탕으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을 제안한 생물학자이고, 데넷은 진화심리학을 기반으로 의식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시도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다시 말해 둘 모두 진화론이라는 공통된 토대 위에서 인간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은 진화론이 두 문화를 단단하게 엮어줄 밧줄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진 분야의 융합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며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두 척의 배가 나란히 서서 밧줄로 서로를 묶으려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서로 상대편 배에 밧줄을 던지기는 했지만 배는 아직도 서로 삐걱거리며 부딪치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는 밧줄을 너무 심하게 잡아당기기도 하고 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일 겁니다.”(데넷, 25) 그렇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사회의 많은 의문들이 과학을 통해 해명될 수 있으리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만능해결사가 될 것인가? 이 부분에서 윌슨과 데넷의 생각이 구분된다. 윌슨은 ‘통섭’의 주창자답게 윤리적 규범에 대한 많은 문제들도 진화론적 접근이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데 반해, 데넷은 철학자답게 과학적 사실과 규범적 의문은 논리적으로 상호 독립적인 것이라 지적한다. “인간이 오늘날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된 데 대해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데넷, 34)
이런 종류의 논쟁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하나는 과학철학 수업 때 들었던 얘기이다.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많은 윤리적 논쟁이 과학적 발전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거칠게 예를 들어,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라 볼 수 있는지 등과 같은 과학적 판단이 끝난다면 낙태와 같은 윤리적 논쟁은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종석의 어느 글에서 본 내용으로, 문명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을 억제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던 말이다.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특성을 활용하며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특성을 밝혀내려는 수많은 과학적 시도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걸 아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 주는가?
두 생각 모두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직까지 무엇이 더 바람직한 입장인지 나름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유전자가 특정 행위를 유발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을 우리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한 조작이 범죄나 심각한 장애와 관련되었을 경우와 멋진 외모나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일과 관련되었을 경우를 동일하게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현실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특정 행위와 관련된 유전자의 수나 조합은 대단히 다양하며, 하나의 유전자라고 하더라도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우저, 320) 그러나 만약 저런 일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떤 심리적 거부감과 더불어 ‘도대체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라는 생각이 마구 뒤섞여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첫 대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첫 대담이 나머지 대담들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윌슨과 데넷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이 대담자로 참여하고 있다. 기획자인 애덤 블라이의 잡지 <시드(SEED)>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기획이기에 대담에 참여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과학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과학이 이뤄낼 성과에 대해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과학의 성과들이 다른 분야에 끼치게 될 영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첨예한 논쟁이 아니라 서로 덕담을 주고받거나 큰 틀의 동의와 약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식의 대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각 분야 대가들의 대화답게, 하나의 대담이 특정 주제에 대해 무수히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자신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라고 한다면 이 책의 관련 대화에서 많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접한다면 다소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아마도) 긴 대담 중 특정 논점과 관련된 일부만을 편집해 실어놓았기에 뭔가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오겠지 기대하다가 대담이 끝나버려 입맛만 다시게 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을 언급하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 역시도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과학 연구에는 애매함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과학이 재현 가능한 사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레빈, 180)나 “실제로 우리가 하는 작업은 존재하는 대상을 추측하여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시험할 방법을 찾아 진실을 재현하는 것입니다.”(랜들, 214),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아는 것을 설명할 이론을 찾아낼 것이며, 이 이론이 아직 측정해보지 않은 새로운 대상을 예측도 해주리라는 희망도 갖게 해주는 거죠.”(스타인하트, 400)와 같이 과학적 연구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진 과학자들이 한편에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결국 과학은 일종의 어설픈 추론 과정일지도 모릅니다.”(스틱골드, 168)라거나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사실은, 과학은 어떤 것이 진실임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그저 어떤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것이 과학이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크라우스, 257)라고 말하며 ‘과학이 진실을 밝혀준다’와 같은 거대한 위상에 유보를 표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양쪽 편 모두 과학이 여타의 학문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지 에롤 모리스의 말이 눈에 확 띤다.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려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뭔가 빛을 던져 주리라고 생각되는 단순한 게임이나 모델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그저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악몽의 한가운데 던져져 있을 뿐이죠.”(모리스, 312)
과학이 이런 혼란과 불확실을 거두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