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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서양철학을 전공한 이들에게는 그리스라는 이름이 주는 어떤 아우라가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나라이자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르지 않는 지적 샘물과도 같은 곳이 바로 그리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문학을 전공하거나 문학에 관심 가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리스는 또한 온갖 상상력의 원천인 신화의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문학의 발원지, 즉 현대 인문학의 기원으로써 그리스라는 이름이 주는 고유한 무게감 같은 것이 있다.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 지칭한 이 책의 제목 역시 이러한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 테다. 물론 이런 식의 설명이 대단히 서구중심적인 시각이라는 지적도 있고, 기꺼이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서구중심의 교육 체제에서 공부를 해온 이들에게 이러한 느낌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이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서구중심성에서 벗어난 동양적인 혹은 우리만의 고유한 어떤 것을 제시해주길 바랄 뿐이다.

 

어쨌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로 들어서게 되는 출입구는 대개 철학이거나 신화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박경철은 특이하게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창을 통해 그리스와 조우한다. 20대의 어느 날 책방에서 우연히 접한 카잔차키스의 책을 읽고 불도장에 찍힌 듯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가슴에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 일었습니다. 마침내 그 뜨거운 불길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5~6)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한 권의 책의 경험. 그 후 카잔차키스의 모든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또 읽으며 그의 나라, 그리스에 대한 꿈을 키워오다 마침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카잔차키스를 길동무 삼아 그리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여행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의 문명과 역사를 다루면서 시간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닌 공간 중심의 서술을 시도하겠다고 언급한다. 왜 공간 중심의 서술이 필요한가?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인식하건 못하건 공간은 중요하다. 구체적인 삶의 자취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 사정이 이러한데도 연대기의 틀을 고수한다면 왕조나 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한 주류의 이야기에 머물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에 명멸했던 그 모든 문명이 그들 주류들의 몫이라 잘못 전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이란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 허리 휘도록 무거운 돌덩이를 등짐지어 나르며 그 위대한 문명의 탑을 쌓아 올린 이름 모를 민초를 빼놓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법. 문명의 정통성이 바로 민초들에게 있기 때문이다.”(17~18)

 

아마 저자의 의도는 이런 것이리라. 시간에 따른 연대기적 서술이란, 결국 몇 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다음 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고 라는 식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역사를 관통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나열이 될 테고, 그런 사건들의 주인공은 대개 왕조나 지배 계급의 인물들이기에 주류의 이야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공간 중심의 서술은 각 지역의 고유한 환경과 지정학적 위치를 중심에 놓고 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실제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 민초들의 삶과 밀착해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 대답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역사란 글로 남겨진 과거의 사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되는 것이고, 역사 구성을 위해 활용되는 자료들이란 대부분 스스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지배 계급의 시각이 반영된 것일 수밖에 없다. 특히 고대사는 이 한계가 더욱 분명하다. 이미 지나가버린 200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그 지역의 삶의 양태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을 것이기에, 지금 그 지역을 직접 눈으로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지배 계급의 서술 사이사이에 감추어진 당시 민초들의 삶을 복원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경험은 관련 역사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해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린토스나 스파르타와 같은 지역이 가진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이나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그러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역사적 정보에 공간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는 일로도 충분할 테고, 이러한 시도 자체로 당시 민초들의 삶과 밀착된 역사를 새로이 발굴할 수 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저 연대기적 서술은 이미 여러 종류의 책으로 출간되어 있기에 그들과 중복을 피하고, 기행문이라는 형식을 살리기 위해 공간 중심의 서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굳이 민초들의 삶의 복원이라는 거창한 의도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책을 읽는 내내 유지된다. 저자는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아, 코린토스, 네메아, 아르고스, 스파르타 등을 방문한다. 그냥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물 하나에도 이렇게 신화와 전설이 있고, 역사가 깃든 곳이 그리스”(62)이기에, 저자는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 하나하나의 역사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그러나 저자는 책의 2/3 가까운 분량을 할애하며 이미 호메로스나 여러 비극 작가들의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역사와 신화들을 재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단지 다른 책에서는 시간과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 해당 지역에 맞게 발췌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미 그리스 신화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직접 방문의 경험이 뭔가 새로운 해석과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여행 중 만난 여러 그리스인들과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그리스인들의 특질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신화 등을 통해 이미 알 수 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기에 이로부터 파생된 우정이나 용기를 인간의 탁월함의 징표로 여긴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을 안다면 굳이 그리스를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자원도 없는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소규모 도시국가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사정이라면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무엇을 공동체의 미덕으로 삼아야 할지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이처럼 거창한 의도에 대한 의구심을 잠시 제쳐놓고 글을 읽는다면 매우 훌륭한 교양도서로써 이 책의 역할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현장에 대한 생생한 설명과 신화에 대한 친절한 해설은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그리스 고전들을 직접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이 책이 제공하는 풍부한 정보와 해설은 원전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이런 점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 지도를 추가해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펠레폰네소스 반도 전체 지도와 코린토스 지역을 제외하곤 상세 지도가 제공되고 있지 않아 저자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총 열 권으로 출간이 기획되었다고 하니 다음 책에서는 이를 추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놓치지 않고 있는 문제의식 중 하나는 문명의 발전 조건에 대한 것이다. 어떤 사회가 자신들의 문화를 꽃피우고 융성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저자는 코린토스와 스파르타라는 양 극단의 사회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그 중간 어디쯤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과도한 부를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을 누리던 코린토스. 그러나 코린토스의 영화가 순간의 불꽃으로 끝난 데는 깊이 있는 문화가 없었던 점도 크게 작용하였을 터, 사치와 향락의 도시에 인간과 삶의 본질을 고민하는 철학자나 문인, 예술가가 등장할 리 만무했다.”(133) 이와 반대로 엄격한 통제와 절제를 강조한 스파르타. 그러나 획일성은 창조적 긴장이라는 씨앗을 말라죽이고 마는 척박한 토양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문명의 발전이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360) 결국 저자가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나치지 않음, 적절함, 바로 중용의 미덕이 아니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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