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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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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이렇다 할 꿈은 없었지만, 막연히 빈둥대는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었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밴, 새벽에 잠드는 생활 습성 탓에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일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바라던 대로 살아왔다. 일 년 중 대략 반 정도 일하고 반은 노는,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한두 달 해외여행도 다녀오는 그런 식의 삶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어떤 사람은 부러워하고 어떤 사람은 한심해하는 그런 삶.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 어려서부터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듯싶다. 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뭔가를 해보고 싶어도 가정 형편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경험 때문일지, 아니면 능력 부족을 절감하고 쉽게 포기해버린 습관 때문일지. 어쨌든 달라질 게 없다’, 혹은 달라질 수 없다는 자각은 바라는 것도 없고 노력하지도 않는 습관을 선물해 주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편리한 변명으로 살아가는 삶.

 

그러나 이런 식의 삶, 그러니까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게 없는,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이 어떤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다고 답한다. 사실 그렇다. 어차피 채워야 할 욕망이 없으니, 결핍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간혹 무언가를 열망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지만, 잘 안 되면 쉽사리 포기해버리면 된다. 그러니 고민이 없다! 고민이 없으니 행복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재미있다. 나 자신의 행복감을 해명해주는 듯 보이니 말이다.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134)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사회를 보여주는 모든 지표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왜 젊은이들이 저항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답,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26)를 해명하고자 한다. , 불행의 요소가 도처에 널려 있고 이를 명백히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비율이 점점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요즘 젊은 것들은~’ 이라는 상투적 호통인 세대론의 허구를 파헤치고(1), 실제 젊은이들의 의식 성향을 분석한 뒤(2), 이러한 의식이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고(3, 4, 5),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결론(6)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각 장은 긴밀하게 꽉 짜여 있기보단 엉성한 연관을 가지고 진행된다. 각각의 장들도 깊이 있는 분석이나 이론적 내용보다는 피상적인 스케치에 가깝다. 저자 스스로 인정하듯,도처에서 볼 수 있는 통계 자료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320)가 근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문체 또한 사회학자의 글답지 않게 대단히 발랄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벼운 사회학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실 문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대안 모색을 기대한다면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의도로 쓰여진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또한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이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이 책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묘사된 일본은 한국의 거울상 혹은 미래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묘미는 일본 사회를 분석하는 글에서 오히려 한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다. 해제를 단 오찬호는 이 책의 일본이라는 단어를 한국이라는 단어로 치환해 읽을 것을 권한다. 과연 대부분의 문장에서 어떠한 어색함도 느낄 수 없다. 월드컵 거리 응원의 모습, 일베와 같은 넷우익의 활동, 점점 축제화되는 사회 운동, 그리고 저자가 우와, 아무래도 이것은 좀 그렇다.”(184)라고까지 말한 인터넷상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까지. 특히 일상의 패배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망각의 정치는 세월호 이후채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우리에게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대지진의 여파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얼마나 변했을까? ‘재난 피해자피난민이라고 정의되는 십여만 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은 대지진 발생 후 한 달여 만에 일상생활로 돌아가지 않았을까?”(260~261)

 

그러나 이것이 문제인가?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를 꾸짖으려 하겠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는 젊은이들이 오늘날과 같은 불안의 시기를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일본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젊은이 1인당 부양해야 하는 고령자 비율은 점차 증가하고 있고, 거품경제 붕괴 후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비정규직 일자리는 늘고 정규직은 희귀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가족이라는 안전망과 상대적 높은 최저임금으로 인해 아직 경제적 빈곤선에 이르지 않았고, 인터넷을 통해 그럭저럭 손쉽게 사회적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

 

실리실익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가 증가하면서, 승인 욕구를 채워 주는 것들이 분산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보장해 주게 되었다. 이런 공동체에서 제공받는 포근한 상호 승인 덕분에, 젊은이들은 굳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300)

 

이러한 조건이 바로 일본의 젊은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는 지연된 문제일 수도 있다. 아직 닥치지 않았기에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그래서 “‘기묘하고 뒤틀린행복”(316)이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젊은이들을 향해 호통치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그래서 뭐?”라고 반문한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고 그동안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껏 살아봐, 라는 응원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응원은 고맙다. 나 같은 삶에게도, 그래도 괜찮아, 라고 다독여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위안만 받고 있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다시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일본이라는 거울상에서 어긋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우리는 저임금 노동이 만연하고 있어 일본의 프리터처럼 아르바이트만 해도 일상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취업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입시 경쟁에 일찌감치 뛰어들어야 하며, 입시 경쟁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해도 다시 스펙 쌓기라는 이상한 경쟁에 내몰려야 한다. 학자금 대출로 대학에 다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시급 오천 원으로 월세 50만원을 때워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경제적 빈곤은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다. 우리에겐 일본처럼 사회적 자포자기를 개인적 욕구 충족으로 전환할 조건조차 없으며, 우리의 젊은이에게 행복의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 책은 우리의 우울한 현실을 재확인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희망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그저 저자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은 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책을 우리의 사회학자 누군가 써주길 기대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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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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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글 혹은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기준은 이렇다. 글의 모든 구성 요소가 충족이유율을 만족하는 글. ,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단 각각이 자신의 자리에 위치해야할 필연성을 지닌 글. 그 단어, 문장, 문단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글. 모든 구절이 결론이라는 목적지로 차근차근 향하도록 디딤돌이 되는 글. 그러므로 어떤 단어나 문장을 빼고 문단의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는 글, 도대체 이 개념과 저 문장이 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는 글, 이런 글들은 아마 좋은 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기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책은 세상에 없을 테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널리 인정받는 대가라 할지라도 종종 자신의 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습이 이해가 된다. 아마도 완전성이란 인간의 것이 아닐 터이므로. 그러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자신의 글을 출판해 다른 이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 명의 저자로서 완성되는 일일 테니 말이다.

 

리뷰의 서두에 이렇게 길게 좋은 책의 기준을 늘어놓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책이 대단히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는 분명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일정 부분 저자의 탓도 있다고 항변하고 싶다. 저자는 서문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자리는 사회과학으로 때우려 하고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인문학으로 얼버무리려는 어설픈 짓을 한 것 같아 느끼는 두려움”(6)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보다 근본적으로 글을 구성하는 논리에 대해 묻고 싶다.

 

먼저 간단하게 제목이 준 실망을 얘기해 보자. 제목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아마도 이 제목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라는 단어에서 방식이나 원인을 떠올릴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되는가, 서울이 이렇게 작동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등 서울이 현재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데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책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책은 대부분 소비 공간이자 계층 분화 공간으로써의 서울, 그러므로 물신과 배제의 공간으로써의 서울의 풍경을 피상적으로 스케치하는 데 머물고 있다. 물론 갖가지 이론을 언급하며 풍경에 대한 설명을 해보려는 부분도 있지만, 이 역시 분석이라기보다는 얼핏 스쳐지나가는 단상에 가깝다.

 

저자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어떻게라는 단어에는 어떤 방법이나 방식으로어떤 이유로. 또는 무슨 까닭으로뿐만 아니라 어떤 모양이나 형편으로라는 뜻도 있으니 말이다. 그저 서울의 모양이나 형편을 스케치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공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므로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17)고 말한다. , 이처럼 사람과 공간의 변증법을 인식하는 사회과학자라면, 인간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인간을 만드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더 나은 공간을 위한 실천을 제안해주길 바라는 게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독자의 기대가 아닐까. 이런 기대는 본문에서 더욱 무참히 무너진다.

 

책은 서울의 특정 공간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그 공간의 현재 모습을 탐색하고, 그러한 모습에 내포하는 의미를 분석하여 오늘날 서울, 곧 도시에서의 삶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설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조합은 불협화음을 내며 삐걱대고, 맥락에 맞지 않는 삽입들이 집중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한 페이지 반 정도의 분량인 사교육, 그 죄수의 딜레마라는 부분을 보자. 저자는 죄수의 딜레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교육은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다. 아무도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실은 내 아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교육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 모두 사교육을 받는다면 나도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뒤처지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모두 경쟁적으로 사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사교육을 받으면 성적이 오른다라는 것이다. 입시 경쟁, 정확하게는 학벌 취득을 위한 경쟁은 유전자와 훈육의 결합체다. 그러므로 사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은 결국 학부모가 가진 문화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욕망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다.”(82~83)

 

죄수의 딜레마와 사교육 경쟁의 유비는 그럴 듯하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전체적인 파국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 경쟁이후의 두 문장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입시 경쟁이 유전자와 훈육의 결합체라는 문장이 죄수의 딜레마와 사교육의 유사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한 결론을 의미하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다음에 나오는 문장, 사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은 욕망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죄수의 딜레마와 사교육의 유사성에서 사교육의 장이 욕망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 수 있는가? 나는 이 논리구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하여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해보자. 사교육은 죄수의 딜레마와도 같다. 사교육 게임에 던져진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사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입시 경쟁에서는 타고난 지능뿐만 아니라 후천적 교육의 역할도 크므로, 자녀들이 입시 경쟁에 승리하기를 욕망하는 부모들은 사교육에 투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왜냐하면으로 바꾸면 약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바로 앞의 부분과 똑같은 말일 뿐이다. 게다가 여전히 훈육이니 규율이니 하는 단어가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부모가 억지로 사교육을 시키기 때문일까? 그저 죄수의 딜레마의 죄수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비약하여 훈육, 규율, 욕망과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초록물고기>라는 영화를 언급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한 후, 영화가 1997년에 만들어졌음을 상기하고 이를 곧 IMF와 연결시킨다. 이를 통해 주인공 막둥이의 몰락이 저자로 하여금 적어도 이 순간 내게는 맨주먹 하나로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보려다가 결국 좌절하고 마는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275)고 고백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십여 년 전의 영화지만 오늘날의 징후를 보여주는 작품일 수도 있고, 십여 년 동안 우리 사회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이어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할리우드 영화 <파 앤드 어웨이>를 소개하며, 한국 자본주의 성장을 이끌어 온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가 무너질 때, 서구 선진자본주의가 바라는 사회, 즉 사람들이 자신의 조건에선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깨닫고, 계층에 따라 격리되어 관리, 통제되는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막둥이의 몰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사회가 이제 맨주먹 하나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선진사회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가? 그렇다면 굳이 <파 앤드 어웨이>라는 작품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초록물고기>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니. 아니면 아메리칸 드림은 과거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지만 막둥이의 몰락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초록물고기>보다 <파 앤드 어웨이>를 먼저 소개하는 게 자연스럽다. 더구나 <초록물고기><파 앤드 어웨이>에 대한 설명 어디서도 저자가 이후 강조하는 공간적 격리나 통제의 공간에 대한 은유를 읽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맥락에서 두 영화가 등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학자로서의 설명력이 힘을 발휘하는 렌트경제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책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인과관계가 약한 나열로 점철되고 있다. 스피노자에서 알랭 드 보통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정이현까지, <유브 갓 메일>에서 <파 앤드 어웨이>까지, 온갖 사상가들과 소설과 영화들이 인용되지만 중요한 맥락을 가지고 언급되기 보다는 그저 지적 편력을 자랑하기 위한 소품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얼핏 떠오른 단상들을 이리저리 꿰어 가까스로 이어붙이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짜깁기가 점묘파의 그림이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멋진 작품이 되지 못하고 그저 마구잡이로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서 심오한 통찰을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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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미셸 푸코의 책이다. 호불호가 있긴 해도, 푸코의 글들엔 어떤 번뜩임이 있다. 특히 앎과 권력에 대한 그의 사유는 현대 사회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래전 동문선에서 나온 판으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로 번역된 이 책으로 다시 한 번 그 번뜩임을 경험해보고 싶다.

 

 

 

 

 

 

 

 

 

2.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

대단히 매력적인 제목을 가진 책이다. 한 시간 이내의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편이고, 여행을 가서도 관관 명소를 찾아다니기보단 동네를 어슬렁거리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당장 걷게 하라! 그러면 많은 보상이 뒤따를 것이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3. 시간 연대기

시간에 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는 편이고, 이것저것 읽은 것도 많지만 새로 나올 때마다 저절로 손이 가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주제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시간의 물리학과 시간의 문화사를 비범한 통찰로 융합"하고 있다는 책소개가 얼마나 그럴듯한지 확인해보고 싶다.

 

 

 

 

 

 

 

 

 

4. 뉴로코믹

뇌에 관한 책이고 게다가 만화다.

 

 

 

 

 

 

 

 

 

 

 

5. 아나키와 예술

아나키즘과 관련된 책은 눈에 띄는 대로 모으는 편이다. "예술에서의 아나키즘"이라는 낯설지만 재밌어 보이는 주제이기에 마지막 관심도서로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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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가 있어야 할 굴뚝엔 엄한 사람들만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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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으로 시작해 최악으로 끝난 한 해였다.

 

생존은 침몰했고 상식은 해체되었다.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그래도 연말, 모든 이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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